'삼성 총수 집행유예 악습' 이번에 끊었다
징역 2년6개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사실상 최종 선고받은 형량이다. 형사소송법상 양형부당을 이유로 재상고하려면 징역 10년 이상을 선고받아야 한다. 1월18일 이재용 부회장은 파기환송심(재판장 정준영) 선고공판에서 법정구속돼 그 자리에서 곧바로 서울구치소로 갔다. 3년 만의 재구속이다.
그는 2017년 2월17일 사전 구속된 바 있다. 2018년 2월5일 2심(재판장 정형식)에서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당시에 1년가량 수감되었기 때문에 남은 형기는 1년6개월 정도다.
파기환송심의 쟁점은 양형이었다. 2019년 8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 부회장이 박근혜·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에게 준 뇌물을 86억여 원으로 인정했다. 이재용 부회장의 뇌물공여 혐의 여부는 1·2·3심 내내 유죄로 판결에서 흔들리지 않은 부분이었다. 삼성준법감시위원회(준감위)는 결과적으로 이 부회장의 양형에 반영되지 못했다. 준감위는 정준영 부장판사가 양형 요소로 감안할 수 있다며 언급한 ‘기업 총수도 무서워할 정도의 실효적 준법감시제도’에 대응해 삼성이 꾸린 외부 기구였다. 재판부는 준감위가 실효적이지 못하다고 판단했다. 전문심리위원 등을 통해 살펴본 결과, 준감위는 발생할 수 있는 새로운 위험을 정의(위험의 유형화)하고 선제적 위험 예방 및 감시 활동에 이르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파기환송심 재판부는 판결문에 이렇게 밝혔다. “준법감시제도를 양형에 긍정 요소로 반영하는 데에는 매우 신중할 필요가 있다. 특히 이 사건과 같이 대법원의 파기환송 이후에야 준법감시제도를 강화한 경우 더욱 그러하다. 기업들에게 유죄가 인정되면 그제서야 준법감시제도를 도입하거나 강화해도 된다는 잘못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준법감시제도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위법행위의 예방에 있지, 감형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기류는 파기환송심 공판 막판에 드러났다. 2020년 12월21일 재판부는 이재용 부회장 쪽에 ‘석명(사실을 설명해 내용을 밝힘)’을 요청했다. 지난 30년 동안 발생한 삼성 총수의 범죄 8건을 콕 찍었다. 모두 삼성에게는 ‘흑역사’인 사건이었다. 각각의 범죄가 일어난 이유를 어떻게 분석하며, 재발 방지 수단은 무엇인지 밝혀달라는 내용이었다. 주심인 강상욱 부장판사는 “아무리 전문심리위원 보고서 내용을 들여다봐도 그런 내용이 없다”라고 말했다. 준감위의 실효성이 부족하다는 취지로 들리는 말이었다.
8건은 다음과 같다. △1983~1987년 8회에 걸쳐 당시 이병철 회장이 전두환 대통령에게 뇌물 220억원을 준 사건 △1990~1992년 4회에 걸쳐 당시 이건희 회장이 노태우 대통령에게 뇌물 100억원을 준 사건 △1999년 당시 이건희 회장이 이재용 남매에게 경영권 승계 등을 목적으로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를 헐값에 발행한 사건 △2002년 삼성이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차남 김홍업씨에게 5억원을 준 사건 △2008~2011년 삼성이 당시 이명박 대통령과 다스의 로펌 수임료 89억원을 대신 내준 사건 △삼성 임원의 차명계좌로 당시 이건희 회장이 조세 78억원을 포탈한 사건 △삼성물산 자금으로 당시 이건희 회장 가족 소유의 서울 한남동 주택 공사비 33억원을 낸 사건 △삼성바이오로직스·삼성바이오에피스와 삼성의 컨트롤타워로 지목되는 ‘사업지원TF(미래전략실 후신)’의 임직원들이 증거를 인멸한 사건 등.
부끄러운 과거 시정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이재용 부회장 쪽은 ‘1000만원 이상의 대외후원금 지출은 준감위 안건으로 올려 심의를 거치도록 해, 뇌물 제공 위험을 차단할 수 있다’ 등을 담은 의견서를 냈다. 하지만 파기환송심 재판부는 부정적으로 판단했다. ‘삼성 흑역사’인 8가지 사건에 대한 재발 방지 대책이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고, 준감위의 역할도 부족하다고 봤다. “삼성 관계사 담당자들이 뇌물임을 밝히면서 준감위에 안건으로 올려 심의를 받을 거라는 예상은 현실적이지 않다. 과거 전두환·노태우·이명박·박근혜 대통령 등에 대한 뇌물 사건에서 비자금 조성 방법을 삼성 측이 스스로 분석해 대응 방안을 마련해둘 필요가 있다(파기환송심 판결문).” 오히려 삼성으로서는 재판 과정에서 부끄러운 과거가 시정되지 않았다는 사실만 환기시킨 셈이 되었다.
대신 재판부는 이 부회장의 양형에 유리한 요소로 ‘당시 현직 대통령 박근혜의 거절하기 어려운 요구’를 꼽았다. 재판부는 그러나 이 부회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요구에 편승해 적극 뇌물을 주며 승계 작업을 도와달라는 부정 청탁을 했고, (뇌물 송금을 위장하기 위해 제3의 회사와) 허위 용역계약을 맺고 회삿돈을 보냈으며, 국회에 가서도 위증을 했다’라고 봤다. 그 결과가 징역형 2년6개월이라 ‘재판부가 깎아줄 수 있는 최대치를 깎아서 실형을 선고했다’라는 평가도 나왔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은 1월18일 “이재용의 뇌물-횡령 총액 대비 낮은 선고 형량은 유감이나, 재벌총수에 대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악습(3·5법칙)’을 끊어낸 점은 긍정 평가한다”라고 밝혔다.
이재용 부회장과 함께 재판을 받아온 최지성 전 삼성그룹 미래전략실(미전실) 실장(부회장)과 장충기 전 차장(사장)도 같은 날인 1월18일 징역 2년6개월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미전실의 핵심인 두 사람은 이재용 부회장의 뇌물 공여에 적극 관여한 혐의를 받았다. 파기환송심 재판부는 “승계 작업의 성공으로 인한 이익이 최지성·장충기에게 직접 귀속되는 것이 아닌 점을 참작한다”라면서도 이재용 부회장과 똑같은 형량을 선고했다. 1심과 2심은 이재용 부회장의 형량을 최지성 전 부회장과 장충기 전 사장보다 높게 주었다.
장충기 전 사장은 전체 재판 과정에서 이번 사건의 본질이 ‘정경유착’이라는 사실을 본의 아니게 드러내기도 했다. 〈시사IN〉이 단독 입수해 보도한 장충기 전 사장의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는 이 부회장의 뇌물 혐의를 넘어 ‘삼성공화국’의 실태를 가감 없이 보여줬다(〈시사IN〉 제517호 ‘장충기 문자에 비친 대한민국의 민낯’ 기사 참조). 장 전 사장의 문자메시지를 보면, 그는 청와대, 국정원 등으로부터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관련 정보를 전달받았다. 그(삼성)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언론인들의 모습도 문자메시지를 통해 여실히 드러났다. 1심(재판장 김진동)은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의 부도덕한 밀착이 사건의 본질이다. 대한민국의 최고 정치권력자인 대통령과 대규모 기업집단이 관련된 정경유착이라는 병폐가 과거사가 아닌 현실이라는 사실로 인한 신뢰감 상실은 회복하기 쉽지 않다”라고 밝혔다.
박상진 전 삼성전자 사장과 황성수 전 전무는 각각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이 선고됐다. 두 사람은 최서원씨의 딸 정유라씨 승마 지원과 관련된 혐의가 법정에서 인정되었다. 각각 대한승마협회 회장과 부회장을 맡았던 박 전 사장과 황 전 전무는 국정농단 관련 보도가 막 시작되던 때인 2016년 9월28일, 최서원씨를 독일의 한 호텔에서 직접 만났다. 이재용 부회장 쪽은 정유라씨가 탄 말 3마리에 대해 빌려준 것이라고 계속해서 주장했지만, 대법원은 뇌물로 판단했다. 파기환송심에서도 같은 결론이 나왔다. 이에 따라 이재용 부회장의 뇌물 액수가 50억원을 넘기게 되었다. 이 부회장은 뇌물을 회삿돈으로 처리했는데, 그 횡령 금액이 50억원을 웃돌면서 집행유예가 어렵게 된 면이 크다.
정유라씨의 말 사용이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박상진 전 사장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재용 부회장의 1심 재판 기록에 따르면, 박상진 전 사장은 “이건 VIP(박근혜)가 (최서원 일가에) 말을 사주라고 한 것인데 세상에 알려지면 탄핵감이다. 앞으로 입조심하고 (잘못하면) 죽을 수 있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 때문에 말을 삼성승마단 소유로 등록했다가 최서원씨의 화를 부르기도 했다. 최씨는 “이재룡(최씨는 이재용 부회장을 이재룡이라 불렀다)이 VIP(박근혜) 만났을 때 말을 사준다고 했지 언제 빌려준다고 했냐”라고 항의해, 박상진 사장이 독일까지 찾아가 최씨에게 해명하는 일도 있었다.
“형 집행 종료 후에도 5년간 재직 못한다”
말을 탄 당사자인 정유라씨 또한 이재용 부회장 1심 재판의 증인으로 나와 거침없이 관련 사실을 증언했다. “어머니(최서원)한테 ‘삼성이 지원한 말을 네 말인 것처럼 여기고 타라’는 말을 들었다.” “(외국인) 코치가 삼성에서 돈이 안 들어온다고 짜증 낸 적이 있다. 녹취도 있다.” 당시 이재용 부회장 쪽 변호인들은 갑작스러운 정유라씨의 증언에 안절부절못했다. 지금까지 삼성의 변명과 거리가 먼 모습이 드러나서다.
삼성 측은 국정농단 보도가 처음 나왔던 2016년 9월까지만 해도 정유라씨를 지원한 사실 자체가 없다고 잡아뗐다. 그러다 삼성전자가 최서원씨의 회사로 돈을 보낸 기록이 나오자 말을 바꿨다. 대한승마협회 회장사로서 정당한 지원이었다고 했지만, 정유라씨 외에는 지원한 선수가 없었다. 결국 이재용 부회장은 박 전 대통령 강압에 따른 피해자라 주장하다, 최서원씨의 강요가 무서웠다는 의견까지 냈다.
이로써 국정농단 사건 재판은 큰 틀에서 마무리가 되었다. 1월14일 대법원은 ‘국정농단’ 사건으로 재판에 넘겨진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징역 20년을 확정했다. 앞서 새누리당 공천 개입 혐의로 징역 2년이 확정돼 박 전 대통령의 총 형기는 22년이다. 최서원씨는 징역 18년이 확정됐다.
삼성과 관련된 국정농단 혐의로 최종 판단을 받지 못한 이는 문형표 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과 홍완선 전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장 정도다. 2015년 7월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 건으로 재판을 받았다. 당시 제일모직(4.85%)과 삼성물산(11.2%)의 대주주인 국민연금공단이 합병에 찬성했다. 이러한 국민연금공단의 판단에 문형표·홍완선의 부당한 압력이 있었다는 점은 1·2심에서 모두 인정됐다. 두 사람은 징역 2년6개월을 선고받았고, 이 사건은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이들의 판결문에는 “당시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으로 이재용 부회장 등 삼성그룹 대주주에게 최소 7720억원의 이익, 국민연금공단에는 최소 1387억원 규모의 손실이 발생했다”라고 쓰여 있다.
경제개혁연대는 1월19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특경가법)에 따른 취업제한 규정 14조에 따라, 이 부회장은 형 집행이 종료된 이후에도 5년 동안 삼성전자에 재직할 수 없다”라는 논평을 냈다. 5억원 이상의 횡령·배임 혐의로 유죄를 받은 사람은 ‘범죄행위와 밀접 관련 있는 기업체’에 일정 기간 취업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아버지 이건희 회장에게 61억원을 증여받아 세금 16억원만 내며 시작된 ‘이재용 승계의 역사’는 2016년 촛불시위 이후 계속해서 예기치 못한 복병을 만나고 있는 셈이다. 2016년 말 꾸려진 박영수 특검팀 수사로 박근혜·최서원에게 뇌물을 준 사실이 들통났다. 이후 4년 만에 삼성은 총수 일가 범죄 역사상 첫 실형이라는 결론을 맞았다.
김은지 기자 smi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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