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상 입은 뒤 스스로 권총을 겨눴다

한겨레21 2021. 2. 2.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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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석의 역사극장]빨치산 박종근, 경북 지역 산으로 올라가 유격대를 이끌었으나
군사 경험도 전투력도 장비도 부족.. 눈 덮인 겨울산에서 최후를
박종근의 20대 초반 시절. 아내 이숙의가 평생 품에 간직한 빛바랜 사진이다. <이 여자, 이숙의> (삼인, 2007)

제1346호(‘빨치산 아버지가 남긴 사진 4장’)에서 박종근의 삶을 소개했다. 지리산이나 신불산 지역에 비해 경북 쪽 양상이 덜 알려졌기 때문인지 그의 빨치산 활동이 어떠했는지를 묻는 분들이 있다. 미흡하나마 그에 답할 필요를 느낀다. 미국 국립기록관의 북한 노획 문서함 속에는 빨치산 시절 박종근이 작성한 몇몇 기록이 있다. 그것을 이용하면 국지적이나마 그의 빨치산 활동의 개략을 그려볼 수 있다.

실천과 이론 면에서 준비된 간부

러시아 유학에서 되돌아온 박종근에게 주어진 보직은 경북도당 위원장이었다. 29살이었다. 젊은 나이였지만 경력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17살부터 반일운동에 참여했으니 혁명운동 경력이 벌써 13년째였다. 사상범으로 투옥된 기간만도 3년7개월이나 됐다. 대중운동 현장 경험도 갖추고 있었다. 농촌지대인 경북 의성군에서 면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군당 선전부장·조직부장을 했다. 해방 직후 합법적 활동이 일시 가능했던 조건 속에 대중을 진두에서 지휘한 경험도 있었다. 중앙당 간부 활동도 했다. 서울 시내에서 비합법 조건 아래 당 중앙 선전부 소속 중간간부로 1년간 일했다. 그뿐이랴. 외국 유학도 다녀왔다. 모스크바 조선당학교 2년간의 유학에서 견문을 넓혔고, 본격적으로 마르크스주의 이론도 배웠다. 실천과 이론, 어느 방면에서 보더라도 잘 준비된 간부였다.

발령 시기는 1950년 7월 하순이었다. 평시가 아니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직후였다. 박종근은 즉시 임지로 향했다. 짐작하건대, 8월 초 경북 경계를 넘어 진군하는 북한군을 따라 임지에 도착했을 것이다. 비슷한 사례로 전남도당 위원장 박영발이 생각난다. 그도 박종근과 함께 모스크바 조선당학교를 수료한 간부였다. 그는 북한군 제6사단이 7월23일 전남 광주를 점령한 뒤, 8월 초 임지에 도착했다.1

박종근은 그보다는 약간 늦게 경북에 입성했을 것이다. 소백산맥을 경계로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려는 전투가 치열했기 때문이다. 충북 영동과 경북 상주·김천 일대의 방어전은 7월22일부터 30일까지 계속됐고, 예천·안동 일대의 방어전은 7월30일부터 8월1일까지 벌어졌다. 북한군이 경북 북부 지방을 장악한 것은 7월 말~8월 초였다. 북한군은 7월25일 영동을 접수한 뒤, 7월31일에는 상주를 점령했다. 예천·안동 방면도 비슷했다. 영주에는 7월23일, 예천에는 7월30일, 안동에는 8월1일 각각 북한군이 입성했다.

박종근의 임무는 여느 도당위원장과 다를 바가 없었다. 도당 집행부를 편제하고 행정단위별로 군당·면당 조직을 구축했다. 군·면 인민위원회 등의 정권 기관도 설립했다. 하지만 범위에 제한이 있었다. 북한군 점령지가 경북 북부 지역에 한정됐기 때문이다. 경북의 중부 지역은 격전지였다. 낙동강 방어선을 둘러싸고 치열한 전투가 계속됐다. 동해안 영덕부터 의성군 낙정리까지 동서 방향으로 180㎞, 낙정리에서 마산까지 낙동강 물길을 따라 남북 방향 160㎞ 전선이 한국전쟁의 운명을 결정하는 최후 방어선이었다.

북한군의 우세는 오래가지 않았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황이 일거에 뒤집혔다. 남한 깊숙이 진공했던 북한군은 서둘러 퇴각해야만 했다. 그해 9월25일 당 중앙에서 특별 지시가 하달됐다. 모든 당 조직을 비합법 지하당 기구로 개편하라는 내용이었다.

제3유격지대장이던 박종근의 친필 서명. 임경석 제공

미군에 쌀 한 톨도 남기지 말 것

경북도당 집행부는 산으로 올라가기로 결정했다. 일월산이었다. 해발고도 1219m에 이르는 이 산은 영양군의 청기면과 일월면, 수비면에 걸쳐 있었다. 소백산을 제외하면 도내에서 가장 고도가 높고, 일찍이 비정규 유격전의 무대로 활용됐다. 대한제국 말기, 신돌석 의병부대가 활동한 곳도 바로 여기였다. 신돌석을 가리켜 ‘일월산의 호랑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 시기 박종근의 주된 임무는 ‘당 단체들을 지하로 옮기는 것’과 ‘유격대를 조직하는 것’이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알려 한다면, 그해 10월11일자로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이 방송에서 하달한 지시 사항을 상기하면 좋으리라. 당 조직을 비합법적 지하당으로 전환·개편할 것, 산간지대에 식량과 시설·설비를 비축·은닉하고 미군에는 쌀 한 톨도 넘기지 말 것, 야산대 경험자와 유격전 참여가 가능한 당원을 모두 입산시켜 유격대를 편성할 것 등의 내용이었다.2

경북도당은 일월산에 오래 체류하지는 않았다. 한 달쯤 뒤인 10월31일 북서쪽으로 이동했다. 멈춘 곳은 ‘남대리’였다.3 경북 영주군 부석면 남대리가 도당 집행부의 두 번째 산악 근거지가 됐다. 경북 영주와 강원도 영월을 가르는 소백산맥 능선부의 깊은 산골이었다. 주위를 둘러싼 산악의 해발고도는 1천m가 넘었다. 선달산 1236m, 어래산 1064m 등이었다. 왜 옮겼을까? 아마 안전과 연락 때문일 것이다. 토벌대의 압박을 모면하고 당 중앙과 연락하는 데 좀더 유리한 곳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떻든 경북 행정구역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했음을 읽을 수 있다.

남대리 지역으로 거점을 옮긴 뒤에도 당 중앙과의 연락이 쉽지 않았다. 박종근은 “오랫동안 중앙과 연결을 가지지 못한 처지”인 탓에, 정세 분석도 사업 진행도 큰 곤란을 느꼈다고 술회했다.4 귀머거리 같았다고 표현했다. 급변하는 전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다행히 1951년 1월13일 곤란이 타개됐다. 중국 지원군 참전 이후 재반격에 나선 북한군 제2군단 부대들과 남대리 지구에서 조우하는 데 성공했다. 이어서 1월20일에는 총사령관의 명령서도 접수할 수 있었다. 제3유격지대를 편성해, 곧 있을 북한군과 중국 지원군의 총공격에 호응하는 제2전선을 구축하라는 내용이었다. 지대장으로는 박종근이 임명됐다. 경북도당 위원장과 제3지대 사령관을 겸하게 됐음을 의미했다.

즉각 제3지대 편성 사업에 착수했다. 고충이 있었다. 자신에게는 군사활동 경험이 전혀 없었다. 그거야 젊음과 각오, 헌신을 통해 극복하면 될 터였다. 하지만 도당 당원들은 무장부대를 편성하거나 이끌 만한 간부 역량이 적었다. 무기와 장비가 부족한 것도 해결해야 했다. 박종근은 도당 집행부를 이끌고 강원도 방면으로 북상했다. 자기 지역을 벗어나는 것은 허용할 수 없는 일이지만, 제3지대를 속히 편성하려면 북한군 정규군의 인적·물적 원조를 받아야 했다. 제2군단 본부가 주둔한 횡성군 둔내면으로 향했다. 둔내면은 횡성군 동쪽 끝에 있는, 해발고도 500m의 고원지대였다. 산과 언덕이 둘러쌌다. 주봉인 태기산은 해발 1261m였다.

미국 국립기록관의 빨치산 노획 수첩에 그려진, 제3유격지대 부대별 분산 투쟁 배치도. 임경석 제공

젊은 20대 대원은 35%뿐

가장 큰 난관은 시간 부족이었다. 임박한 총공격은 대전과 안동을 잇는 선까지 진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들었다.5 속히 적군의 등 뒤로 움직여 후방 교란 작전을 해야 했다. 1951년 2월14일 박종근은 제3유격지대를 이끌고 서둘러 둔내면을 출발했다. 4월20일까지 보현산(1124m) 지역으로 진출해, 그곳을 근거지로 유격전을 벌일 계획이었다. 경북 영천군 화북면과 청송군 현서면에 걸친 이 산은 대구에 인접한 요충지였다.

출발할 때 병력 총수는 356명이었다. 각자 소총 1자루에 탄환 40발이 지급됐고, 수류탄을 평균 1.3개씩 소지했다. 공용화기는 경기관총 2정뿐이었다. 장비도 빈약했고 대원들의 전투력도 문제였다. 70%가 경북 출신인데 후퇴할 때 입산한 사람들이었다. 대중 사업과 군중 정치운동에 종사한 당원으로서 군사 경험이 없는 동무들이었다. 연령도 30살 이상이 60%를 점했고, 젊은 20대는 35%에 지나지 않았다. 박종근은 유격대 대원이 전투 성원으로는 적당치 못한 일꾼이 대부분이었다고 평했다.6 그가 기대한 수준은 훈련된 군사 간부가 지휘하는 1천 명의 병력이었다. 당 중앙과 유기적인 연락을 주고받는 조건 아래 이 정도 병력을 갖는다면, 보현산 지구를 근거지로 제2전선을 구축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두 달이 지났다. 4월20일이 됐을 때, 제3지대는 출범 당시 계획과는 사뭇 다른 상황에 처했다. 가장 큰 곤란은 국군과 북한군이 대치하는 전선을 돌파하는 것이었다. 숫자와 장비, 기동력이 월등히 우세한 정규군이 밀집한 지역을 뚫고서 이동하는 것은 많은 희생을 초래하지 않고는 불가능했다. 전투와 쉴 새 없는 행군을 계속해야만 했다. 그 결과 전사, 낙오, 실종 등으로 대원 257명이 줄었다. 그 대신 낙오된 북한군 편입, 경북 관내 지하당원 편입 등으로 121명이 보충됐다. 전체 대원 수는 220명 선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중 환자가 43명이었다. 사령관인 박종근조차 재귀열에 걸려서 3월 말부터 5월 초까지 한 달 이상 병고에 신음해야 했다. 장비 부족 문제가 심각했다. 대원들이 소지한 탄환 수는 1인당 7~8발이 고작이고, 수류탄을 가진 자는 거의 없었다. 공용화기는 탄환을 전부 소모했기에 무용지물이었다.

제2전선 구축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게다가 최전선 형성이 애초의 예상과 달라졌다. 대전~안동 라인은 언감생심이었다. 1951년 5월 접어들면서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제3지대는 국군 토벌대의 포위 속에 갇힌 꼴이 됐다.

박종근 사령관은 결심했다. 애초 계획을 폐기하고 ‘부대별 분산 투쟁’ 방침을 세웠다. 역량 보존에 적합한 방침이었다. 대원을 네 부대로 나눴다. 자신이 이끄는 본대는 일월산에 거점을 두고, 다른 세 부대는 경북 관내의 다른 산악지대에 분산 배치했다. 지휘관의 성을 따서 도부대·백부대·강부대라고 부르는 세 예하 부대는 각각 청량산 지구, 금장산-명동산-주왕산 지구, 태백산-소백산 지구에 주둔했다.

대규모 토벌 작전의 시련을 넘어서지 못했다

박종근이 이끄는 제3지대는 악조건 속에서도 10개월을 더 버텼다. 그러나 1951년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전개된 대규모 토벌 작전의 시련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작전이 거의 막바지에 이른 1952년 2월 어느 날, 박종근 제3지대 사령관은 총상을 입었다. 스스로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의 중상이었다.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동료들은 들것을 만들어서 사령관을 싣고 다녔다. 그러나 눈 덮인 한겨울 산중에서 쉴 새 없이 추격해오는 토벌대를 피해 다니면서 부상자를 돌보는 일은 불가능했다. 결국 박종근은 권총으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길을 택했다. 경북 영양군 석보면 포산리에 있는 포도산(748m)의 한 기슭, 1952년 2월27일의 일이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정관호, <전남유격투쟁사>, 선인, 35쪽, 2008년.
2. 김광운, ‘한국전쟁기 북한의 게릴라전 조직과 활동’, <군사> 48, 104쪽, 2003년.
3. 박종근 조선로동당경상북도당부 위원장, ‘조선로동당경상북도당부 결정서: 도당단체들의 강화를 위한 당면과업’, 3쪽, 1951년 5월2일.
4. 박종근 경북도당부, ‘조선로동당중앙당본부 허가이 동지 앞’, 2쪽, 1951년 5월3일.
5. 이선아, ‘한국전쟁기 강원·경북 지역 빨치산 활동 연구노트’, <역사연구> 23, 198쪽, 2012년.
6. 박종근 제3유격지대 지대장, ‘제3유격지대 2개월간의 사업보고서(1951년 2월14일부터 1951년 4월20일까지)’, 1951년 5월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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