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자녀 살해 뒤 극단 선택.. 아이들은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다

유지혜 2021. 2. 2.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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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보도 사례만 20년간 247건
범행동기 64%가 생활고·처지 비관 차지
가해부모 사망 땐 '공소권 없음' 사건 종결
통계 따로 집계 안 해.. 실제론 더 많을 듯
살인범죄, 온정주의적 시각 버려야
홀로 남은 아이 불행해질 게 뻔해 범행?
자녀를 소유물로 인식·본인 삶 투영 잘못
위기가정 찾아내 지원.. 아동 안전 지켜야
“엄마가 아이에게 건네는 마지막 말이 ‘약 먹어라, 문 꼭 닫아라, 자자, 좋은 곳으로 같이 가자’가 되는 세상은 얼마나 비통하고 또 비통한가.” 울산지법 형사11부 박주영 부장판사는 자신의 자녀를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 ‘엄마’ A씨의 판결문에 이런 말을 남겼다. 30장 남짓의 판결문에는 “아이들에게 출생의 자유가 없다고 죽음마저 그러하다 말할 수 없다. 행복이 담보되지 않은 삶이라도, 불행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인생이더라도, 이들의 미래와 생명은 그 누구도 좌우할 수 없다”는 말도 함께 적혔다.
 
아이는 자폐성 발달장애가 있었다. A씨는 딸의 상태를 나아지게 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지만, 끝이 없는 터널 속을 달리는 것만 같았다. 그는 범행 후 “내 생활이 없을 정도로 아이에게 올인했지만 아이의 상태는 늘 제자리였다”고 진술했다. 삶에 지친 A씨는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결심을 했다. 자신이 떠난 뒤 아이를 돌볼 사람이 없을 것을 걱정한 그는 먼저 아이의 숨을 거뒀고, 자신도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으나 살아남았다. 징역 4년을 선고받은 그는 고개를 숙였지만 딸은 영영 돌아올 수 없다.

자녀를 죽인 뒤 자신도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는 범죄가 끊이지 않는다. 가해자인 부모들은 대부분 ‘자녀만 두고 갈 수 없다’는 생각에 ‘함께 가려 했다’고 말하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힘없는 아이들은 그저 살해당할 뿐이다.

◆지표도 없는 ‘자녀 살해 후 자살’… 20년간 최소 247건

1일 한국형사정책연구원에 따르면 2000년부터 2019년 10월까지 가족을 살해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거나 미수에 그친 사례는 총 426건이다. 이 중 피해자가 자녀만이거나 배우자와 자녀인 경우가 247건으로 절반이 넘는 58%를 차지했다. 이는 언론에 보도된 사건에 한정된 최소치에 불과하다. 가해자 본인도 숨진 경우는 사건이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돼 별도의 범죄 통계에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아동권리 보장 단체인 세이브더칠드런도 “아동학대 주요통계에 ‘자녀 살해 후 자살’을 지표화하고 공표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분석 결과 가해자의 주된 범행 동기는 생활고(33.1%)와 처지 비관(30.5%)이었다. 2019년 겨울, 10살이었던 B양과 동생(6)은 엄마 아빠로부터 ‘몸속의 벌레를 잡는 약’을 받았다. 그러나 남매가 삼킨 것은 수면제였다. 당시 B양의 아빠는 여러 차례 수술을 받는 등 건강이 좋지 않았고 엄마는 공황장애에 시달리고 있었다. B양의 부모는 아이들을 재운 후 다 함께 목숨을 끊으려고 했으나 B양과 엄마는 살아남았다. 엄마는 ‘희망이 없다’는 생각에 아이들에게 약을 건넸다고 진술했다.
같은 해 10월 7살 C군은 동생(5), 아빠와 함께 세상을 떠났다. C군의 부모는 사업 실패 후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렸다고 한다. 채권자들이 직장까지 찾아와 행패를 부리는 등 상황이 나빠지자 그들은 ‘잘못된 선택’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결국 아이들은 부모의 손에 숨졌고, 부부도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
◆‘동반자살’ 아닌 ‘살해’일 뿐

이들 부모는 왜 자신의 삶을 마감할 때 자녀의 인생까지 함께 끝내려고 했던 것일까. 이웅혁 건국대 교수(경찰학)는 “자신(부모)이 없는 아이의 삶이 어려울 것이라 생각해서 일종의 해결 방법으로 자녀를 숨지게 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자식을 부모의 소유물로 보고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왜곡된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범죄의 원인이 대체로 경제적 이유 등 사회적 문제라는 점에서 일각에서는 이 같은 범죄를 온정주의적 시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동반자살’이라는 표현도 그 예다. 그러나 범죄 원인은 대부분 부모가 느끼는 고통일 뿐, 아이와는 상관이 없고 당연히 아이의 의사도 반영되지 않는다. 부모는 죽음을 ‘선택’하지만 아이는 살해당할 뿐이다. 아동단체 등에서 동반자살이란 표현을 쓰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A씨 사건 재판을 맡은 박 부장판사도 “동반자살은 가해 부모의 언어”라며 “아이의 언어로 말한다면 이는 피살이고, 법의 언어로 말하더라도 명백한 살인”이라고 지적했다. 배상훈 서울디지털대 교수(경찰학)는 “여전히 가족 중심의 사고가 남아 있기 때문에 ‘오죽했으면 그랬겠냐’는 반응이 나오는 것”이라며 “가해자들이 자신의 삶을 아이에게 투영해 아이가 불행해질까 봐 함께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엄연한 살인”이라고 했다.

자녀 살해를 막기 위해서는 사회가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가해 부모 대부분이 극단에 몰린 상황에서 극단적 선택을 하는 만큼, 외부에 도움을 청하기 어려운 위기 가정을 찾아내는 것이 먼저라는 것이다. 고위험 부모를 대상으로 한 아동학대 방지 교육이나 양육 스트레스를 다루기 위한 프로그램 운영 등이 필요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김정진 나사렛대 교수(사회복지학)는 “고립된 위험 가정을 발견해 자살예방시스템과 연결되도록 해야 한다”면서 “이웃이나 친지가 가까이 있는 사람의 위험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민감성이 높아져야 한다. ‘주변에 이런 도움을 줘야 한다’는 식의 교육과 홍보가 필요하다”고 했다.

세이브더칠드런은 지난해 서울 양천구에서 자녀 살해 후 자살 범죄가 발생했을 때 복지사각지대 발굴시스템 등 현재 시스템을 활용해 위기 가정을 촘촘히 찾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단체는 “가정의 위기가 감지됐을 때 아동 살해 의도가 있는지 추가로 파악할 수 있는 상담 등 실질적 서비스가 마련돼야 한다”며 “위험이 발견됐을 때 국가의 공적 체계는 아동 안전 확보 등 아동의 이익을 최우선에 두고 작동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美, 극단 선택 시도한 부모 ‘고위험군’ 분류해 관리

선진국에서는 평상시 자녀 살해 후 자살, 넓게는 가족살인범죄 고위험군을 찾아내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관리한다. 가족살인범죄에 대한 정확한 통계를 만들고, 관련 사건이 발생하면 철저한 분석을 통해 재발을 막는다. 가족 살해 후 자살 사건과 관련해 공식 통계나 별도의 대책이 없는 우리나라와 대조적이다.

1일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의 연구보고서 ‘살인범죄의 실태와 유형별 특성: 가족살인범죄를 중심으로’에 따르면 상당수 선진국은 가족 살해 예방을 위해 ‘협력적 대처를 통한 개입’ 전략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형사사법기관과 사회복지기관 간 관련 정보를 공유하고, 공통된 평가 도구를 사용해 위험요인을 찾아내는 일이다. 예컨대 자살시도 경험이 있거나 자살 실행계획을 세운 경험이 있는 부모들을 자녀 살해 고위험군으로 분류해 치료를 받도록 하고, 피해자들을 지역 프로그램에 연결해 주는 것이다.

미국은 모든 가족살인사건에 대한 위험요인과 사건 관련 자료가 포함된 정부 웹사이트를 구축했다. 이러한 데이터베이스는 가족 살해의 추이나 특정 인구통계학적 요소와 관련된 위험요인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한다.

또 미국은 가족 살해를 예방하기 위해 1990년부터 ‘가정폭력 사망 검토위원회’를 만들었다. 위원회에서는 자녀 살해와 같은 가족 살해가 발생하면 해당 지역의 형사사법기관을 중심으로 사건을 심층 분석한다. 위험요소는 무엇이었고 어떻게 관리됐는지, 위험을 막을 수 있던 기관들은 제대로 역할을 했는지 등을 검토하고 비슷한 사건이 벌어지지 않기 위해 개선돼야 할 부분을 찾는다.

뉴질랜드, 영국, 캐나다, 호주 등도 이와 유사한 위원회를 운영하고 있다. 호주의 위원회는 데이터 수집과 분석, 사례 검토 등을 바탕으로 경찰, 교정 서비스와 사법기관, 정책 부서 등 관련 기관을 대상으로 예방 중심의 권고안을 작성한다. 이렇게 마련된 권고안의 진행 상황과 결과를 모니터링하는 것도 위원회의 역할이다.

유지혜·이종민 기자 keep@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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