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산업부, 北원추 문건 왜 만들었나..상부지시 or 과잉충성?

세종=박성우 기자 2021. 2. 2.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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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일 남북정상회담 5일 뒤, 산업부 北 원전 문건 작성
관가 "국장급 이하 공무원 3명 주도로 보고서 작성할 사안 아니야"
청와대 등 상부 지시 or 백운규 전 장관 등 과잉충성 가능성

산업통상자원부가 지난 1일 월성 1호기 조기 폐쇄 결정을 앞두고 폐기한 것으로 알려진 ‘북한지역 원전건설 추진방안(일명 북원추)’ 검토 자료 원문을 공개했지만, 이 문건이 어떤 배경에서 작성됐는지에 대한 의구심은 걷히지 않고 있다. 산업부는 "아이디어 차원에서 검토한 검토 자료이며, 추가적으로 진행된 것은 없다"는 입장이지만, 왜 이같은 검토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산업부가 북한 원전 관련 문건들을 만든 시기는 2018년 1차 남북정상회담(4월 27일)과 2차 남북정상회담(5월 26일) 사이다. 문건 작성 시기 중 가장 이른 것은 2018년 5월 2일로 4·27 판문점 회담 닷새 뒤였다. 국민의힘 등 야권에서는 문건 작성 시기 등을 감안할 때 당시 정부가 북한 원전 건설을 추진했을 개연성이 높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검찰이 지난해 11월 5일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수력원자력에 대한 압수수색을 진행했다. /연합뉴스

2일 사정당국과 산업통상자원부 안팎에 따르면, 산업부 공무원들이 삭제한 원전 관련 자료 530건 목록에는 청와대 협의·보고 문건이 다수 포함된 것으로 나타났다. 월성 원전 운영 주체인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 이사회의 원전 폐쇄 결정 전 청와대와 산업부가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은 정황도 구체적으로 확인됐다. 산업부의 전격적인 원본 자료 공개에도 불구하고, 북한 원전 건설 관련 자료가 청와대 등과 협의한 삭제 자료 중에 존재한다는 것에서 비롯된 의구심은 해소되지 않는 상황이다.

◇원전 건설, 남북정상회담 카드 됐나… "삭제는 납득안돼"

쟁점은 북한 원자력 지원 문건 작성에 청와대의 관여가 있었는지 여부다. 야권에서는 당시 남북, 미·북 간 연쇄 정상회담을 추진하던 문재인 정부가 북측에 비핵화를 설득하는 인센티브로 원전 건설을 제시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전력난에 시달리는 북한은 1994년 제네바 합의, 2000년대 6자회담 등 주요 비핵화 논의 때마다 비핵화의 대가로 경수로 원전 건설과 에너지 지원 등을 요구해왔기 때문이다.

삭제된 파일 가운데 ‘KEDO 관련 업무경험자 명단’ ‘경수로 백서’ 등이 포함된 것도 이 같은 분석을 뒷받침한다. KEDO(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는 제네바 합의 다음해인 1995년 함경남도 신포에 경수로 원전을 건설하기 위해 꾸렸던 국제기구다.

/산업부

또 검찰의 공소장에 적시된 북한 관련 삭제 파일은 모두 '60 pohjois'라는 상위 폴더 밑에 있었다. '뽀요이스(pohjois)'는 핀란드어로 '북쪽'이라는 뜻으로, 핀란드어까지 쓸 만큼 보안에 신경을 쓴 것으로 추정된다. 산업부측은 핀란드 유학을 다녀온 문서 작성자의 취향 때문이라고 해명하지만, 단순 검토 자료였으면 외부에서 알아채지 못하도록 할 이같은 설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삭제 파일을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북한 원전 추진방안'의 약자로 보이는 '북원추' 폴더에서 두 가지 버전의 '북한지역 원전 건설 추진방안' 파일이 삭제됐다. 다른 폴더에서도 '북한 전력 인프라 구축을 위한 단계적 협력과제', '북한 전력산업 현황과 독일 통합사례' 파일이 삭제됐다.

이러한 배경 탓에 북한 경수로 원전 건설 프로젝트를 부활시키거나 유사 계획을 추진하는 방안이 검토됐을 개연성이 높아보인다. 다만 해당 검토의 주체가 산업부 내부 차원인지, 청와대의 지시가 있었는지는 조사가 더 필요하다.

◇ "단순 아이디어인데 심야에 삭제한 것은 비정상"

문제는 문건의 삭제다. 남북관계 개선상황에서 만든 단순 검토 차원의 문서였다면 감사 과정에서 감사원에 노출돼도 크게 문제될 게 없다는 게 상식차원의 반응이다. 심야에 몰래 삭제해야 했던 이유는 단순 아이디어 이상의 구체안이 있었을 수도 있다는 의혹을 낳고 있다.

또 전략물자인 원전의 북한 건설과 관련된 내용을 전적으로 국장급 이하 공무원 3명의 판단으로 작성했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게 관가의 대체적인 판단이다. 최신형 한국형 원자로인 APR1400, 수출형 신규노형인 ‘APR+/SMART’ 등을 북한 지역에 설치하는 방안이 실무자들 사이에서 논의됐다는 것도 수긍할 수 없다는 반응도 있다.

한 경제부처 국장은 "문선의 삭제가 개인의 잘못을 은폐하려는 건지, 조직(산업부)과 윗선(청와대)의 연결고리를 은폐하려고 한건지는 알 수가 없지만, 윗선의 지시나 암시가 없이, 자신의 잘못을 없애기 위해 심야에 문서를 삭제했다는 것은 같은 공무원으로서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라고 했다.

백운규 전 산업부 장관(오른쪽) /조선DB

산업부는 자료 삭제에 대해서는 사과했지만, 직원 개인의 일탈이라며 선을 그었다. 파일을 지운 당사자들은 감사 전날 파일을 지운 것은 '우연'이라고 주장해왔다. A서기관은 "신내림을 받은 모양"이라면서 이같이 주장했다. 하지만 검찰이나 관가에서는 이들의 행위가 부처 최고위층 승인과 산업부의 조직적 개입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백운규 전 장관+원전 공무원 3인방 ‘과잉충성’... "삭제는 납득안돼"

문재인 정부의 초대 산업부 장관인 백운규 전 장관이 문건 작성에 얼마나 깊숙하게 개입됐는지도 주요 관건이다. 한양대 에너지공학과 교수 출신인 백 전 장관은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실행하는 임무를 부여받고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에 부임했다.

특히 그는 당시 정권 실세였던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과는 한양대 무기재료공학 동문으로, 백 장관이 82학번, 임 전 실장이 86학번이다. 지명도가 떨어지는 교수 출신인 백운규 전 장관의 산업부행(行)에 임 전 실장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게 당시 세종시 관가의 전반적인 정서였다. 검찰은 지난달 25일 백 전 장관을 소환해, 수사를 윗 선으로 확대하고 있다.

문건 삭제로 구속된 산업부의 A 국장등도 백 전 장관의 측근으로 불렸던 인물들이다. 산업부 등에 따르면 원전산업정책관 보직 부임을 주저하던 A국장을 직접 설득한 사람이 백 전 장관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A국장은 백 전 장관과 양재천 산책을 함께 다닐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고, 2018년 12월부터는 장관 정책보좌관을 지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남북정상회담 후 남북 경제협력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는 상황에서, 백운규 장관이 원전을 연결고리로 한 남북 협력 사업에 관심을 갖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야당 주장대로 청와대 등 상부 지시로 보고서를 작성했을 가능성도, 상부 과잉 충성하기 위해 백 장관이 적극적으로 보고서 작성을 요구했을 가능성도 모두 배제할 수 없다는 게 세종시 관가의 대체적인 관측이다. 담당 공무원 3명의 무리한 과잉 충성으로 문제가 커졌을 가능성도 있다는 분석도 있다.

경제부처 한 과장은 "검찰 조사결과를 봐야겠지만, 청와대 개입이나 지시가 없어도 남북정상회담 후 경협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진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부처 실무진에서 검토를 해봤을 수도 있다"면서 "백 전 장관의 무리한 밀어붙이기와 공무원들의 과잉충성이 문제를 키웠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다만 문건 삭제는 주변 공무원들 사이에서도 왜그랬는지 설명이 안되는 상황"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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