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덕의 新줌마병법] 살아보니 人生, 무승부더라

김윤덕 주말뉴스부장 2021. 2. 2.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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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1939년생 독거 할머니입니다. 선대로부터 조선일보 독자였고, 팔십줄 접어든 지금도 신문은 저의 가장 좋은 친구요 가족입니다.

보잘것없는 소포로 번거롭게 해드렸습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아 이것저것 정리하던 중 장롱 속에서 이 꾸러미를 발견했습니다. 문학소녀 시절 당대의 작가들께 습작을 보내고 받은 편지인데, 버리자니 아까워, 애독하는 조선일보에 무턱대고 보낸 것입니다.

/일러스트=이철원

저 살아온 얘기는 뭣 하시게. 초라한 여인의 일생이지요. 경남 밀양, 요즘 젊은이들이 제일 싫어하는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났어요. 떵떵거리고 살았냐고요. 웬걸요. 해방 후 토지 개혁으로 땅은 죄다 빼앗기고요, 소작농들이 은행원 아버지를 북으로 끌고 가려 해서 집안이 풍비박산 났지요.

한차례 회오리 지난 뒤 아버지는 읍내에 작은 정미소를 차렸어요. 병으로 세상 떠난 엄마 대신 대가족 건사할 새어머니 맞은 것도 그 무렵이지요. 새어머니는 열세 식구 아침밥을 다 해 먹이고 설거지까지 해야만 막내인 저를 학교에 보냈어요. 문학에 빠져든 게 그때부터예요. 책 읽고 글 쓸 땐 외롭지 않았으니. 시골에 살지만 이 생에 작은 발자국 하나 남겨야겠다, 다짐도 했지요.

마침 이복동생들이 학업 위해 부산으로 나가면서 저도 새어머니 굴레를 벗어났어요. 동생들 밥 해주는 틈틈이 이태준의 ‘소설작법'이 너덜너덜해지도록 공부했지요. 이호철·송병수 등 서울 작가들께 습작 한번 봐달라며 편지를 썼으니 참 당돌하지요? 그걸 휴지통에 안 버리고 일일이 답을 주셨으니 얼마나 큰 은덕인지요. 김정한 작가는 “이 실력으론 안 된다. 결혼해 착한 어머니 되는 게 상책이다” 면박을 주시면서도 “진주에서 박경리가 나왔으면 밀양에선 아무개가 나와야지” 하며 격려해 주셨지요. 그 가르침을 지상명령으로 여기고 열심을 다했던 시절입니다.

그러나 필력은 나아지지 않고 한 해, 한 해 나이만 먹었어요. 안 되겠다 싶어 서울로 올라와 한남동 직업학교에서 자수 기술자격 2급을 땄지요. 작은 수예점도 내고 어찌어찌 앞가림하며 살아가는데 동네 들락이던 ‘미제 장사 아줌마’가 중매를 섭니다. 아내와 사별한 남자가 있는데 알부자이니 고생은 안 할 거라며.

막상 시집을 가보니 알부자 아니고 빚 부자입니다. 아이들은 넷이나 되고요. 게다가 남편은 결혼하자마자 퇴직을 해서 제가 생활전선에 나서야 했지요. 눈앞이 캄캄했지만, 살아봐야지 어쩌겠어요. 구멍가게 차리면 본전은 안 까먹는대서 있는 돈 없는 돈 끌어모아 개포동에 열었는데, 글재주보단 돈 버는 재주가 있었는지 20년을 억척으로 꾸려서 네 아이 모두 대학에 보냈어요. 고생이야 말도 못 하죠. 허리가 다 망가졌는걸요. 장사 잘되니 가게를 빼라는 건물주와도 맹렬히 싸웠어요. 우리 식구 밥숟갈이 다 여기 붙었다, 송장 되기 전엔 못 나간다 버텼지요.

친엄마 잃은 설움 누구보다 잘 아니 아이들에겐 말 한마디, 표정 하나 함부로 짓지 않았어요. 어디서도 주눅들지 않게 따뜻이 입히고 먹이고요. 지금은 저마다 일가를 이뤄 명절 되면 감귤 한 상자씩 들고 찾아와요. 전화 목소리 시원찮으면 반백이 다 된 아들이 놀라서 “엄마~” 부르며 달려오고요. 참, 고맙지요.

남편 떠난 뒤 작은 셋집으로 이사했어요. 소파며 침대는 구청에 보내고, 밥솥이랑 옷가방만 들고 나왔어요. 가끔 지팡이 짚고 동네 공원을 산책하는데, 앙상한 나무들 보고 있자니 옛일이 떠올라 혼자 웃어요. 시골 처녀가 겁도 없이 기차를 타고 광화문 신문사로 습작을 내러도 갔고요. 언양 산다는 오영수 선생 댁도 물어물어 찾아가고요. 무례하다 안 하시고 “아내가 장에 가 점심도 못 차려줬다”며 단편집 ‘고개’에 사인해 건네시던 모습이 잊히질 않아요. 그 책도 동봉합니다.

이호철 선생은 “이 탁한 서울을 동경하지 마십시오. 문학은 외로워야 하고, 행복보다는 불행의 산물입니다”라고 편지에 쓰셨지요. 행복은 무엇이고 불행은 무엇일까요?

살아보니 인생은 무승부. 부자나 가난한 이나 향할 곳은 오직 한 군데이고,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이더군요. 비록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죽기 전 남편이 “당신이 내 구세주였소” 한 말로 큰 상(賞) 받았다 치려고요. 저 하늘에 가면 울 엄마도 ‘잘했다’ 쓰다듬어주실까요.

늙은이 넋두리가 길었습니다. 환란을 많이 겪은 세대라 말이 많아요, 호호! 경제가 잘돼야 하는데 위정자들 세상 보는 안목이 못 배운 우리 할머니들보다 짧아서 큰일이지요. 걸핏하면 친일, 친일. 그런 논리면 왜정시대 수돗물 먹고 전기 쓰고 기차 탄 사람은 다 친일이게요. 또 딴소리…. 모쪼록 이 편지가 새 주인 만나 귀히 쓰이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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