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사회적 거리 두기의 유효 기간
[경향신문]
거리 두기에 관한 여러 가지 사회적 입장이 점점 서로 거리를 두고 있다. 일각의 비판이 비등하면, 이내 지침이 바뀐다. 그러자 다른 쪽에서 억울하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감염병 유행 자체가 공정함과는 거리가 먼 상황이건만, 모두 ‘공정성’을 따지며 지침 완화를 청하는 형국이다.
이래서는 될 일도 안 된다. 대중 방역 메시지는 간결하고, 분명하고, 일관되어야 한다. 지금은 어떤가? 다섯 단계, 여섯 시기, 열네 개의 수칙, 마흔여덟 종의 시설에 대해 세세한 지침을 제시하고 있다. 지침서 분량만 총 223쪽에 달한다.
예를 들어 마스크 착용 지침만 해도 그렇다. 마스크 미착용 시 과태료가 부과되는 아홉 장소를 제시하고 있는데, 지자체별로 달라질 수 있단다. 열한 개의 예외 상황도 제시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는 ‘세수’다. 도대체 이런 지침이 무슨 쓸모인가? 지침이 아니라면, 세수 중인 시민에게 과태료를 물렸을 것인가?
지난해 3월22일, 정부는 15일간의 사회적 거리 두기 대책을 발표했다. 사실 2월 중순까지는 강 건너 불구경이었다. 그러다 상황이 급변했다. 1차 대유행이다. 당시에는 병의 정체도 잘 몰랐고, 심지어 제대로 된 이름도 없었다. 정부도 ‘우한 폐렴’이라 불렀고, 심지어 언론은 ‘괴질’이라고도 했다. 괴질의 사전적 뜻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상한 병’이니,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다.
사람들은 공황에 빠졌다. 정체 모를 유행병에 엄청난 불안을 느꼈다. 때마침 발표한 15일간의 거리 두기 대책을 ‘정말 열심히’ 지켰다. 지침은 간결했다. 손을 잘 씻고, 기침 예절을 지키고, 환기를 잘해라. 심지어 마스크를 꼭 쓰라 하지도 않았다. 간결한 지침과 집단적 불안이 방역을 일궈낸 일등 공신이었다. 일일 확진자는 2명까지 줄어들었다(그나마도 해외유입 사례였다). 성공이 눈앞에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불안과 공포라는 장작은 오래 타지 못한다. 감정은 금세 밋밋해진다. 인간성의 본질이다. 심지어 전쟁이 나도 그렇다. 처음엔 두려움에 덜덜 떨지만, 곧 무뎌진다. 한국전쟁 중에도 학교에 가고, 회사에 가고, 술집도 갔다. 백일잔치도 하고, 졸업 파티도 하고, 환갑잔치도 했다. 코로나19는 엄청난 재난이지만, 한국전쟁보다는 분명 덜하다. 불안 수준은 예전으로 돌아가고 있다. 물론 행동도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다. 코로나19가 지속되든 혹은 종식되든 상관없이 말이다.
유럽, 미주의 집단적 방역 조치 위반은 그들의 민족성 때문일까? 그러나 그들의 과거 모습은, 우리의 지금 모습이다. 국내의 위반 사례는 일부 개인의 몰지각한 시민의식 때문일까? 바이러스가 전파되듯, 소위 ‘몰지각한 의식’도 전파되고 있다. 이미 징조가 완연하다. 방역 지침의 부당성을 따지는 이가 점점 많아진다. 지침이 불완전해서 그러는 게 아니다. 223쪽의 지침을 2233쪽의 지침으로 만들어도 소용없다. 이제 너무 지친 것이다.
알베르 카뮈는 <페스트>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염병이 확산되면 윤리의식도 느슨해질 것이다. 우리는 무덤 근처에서 벌어지던 밀라노의 사투르누스 축제를 다시 보게 될 것이다.” 사투르누스 축제란, 동지 무렵 방탕하게 술 마시고 즐기던 로마의 축제다.
첫사랑과 결혼했다고, 평생 뜨겁게 사랑하지는 않는다. 물론 연애 행동도 점점 시들해진다. 비유가 적절한 지 모르겠지만, 첫 공포와 첫 불안의 뜨거운 감정도 마찬가지다. 우리 사회의 집단적 위생 추구 행동은 그 유효기간이 거의 다하고 있다.
방법은 단 하나다. 거리 두기 전략은 수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인류는 감염병 전쟁에서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다. 피해를 줄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백신이 등장한 후에야 겨우 작은 승리를 얻기 시작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모두 완전히 지치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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