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굴기의 꽃산 꽃글]마지막 화전민의 굴피집 처마 밑을 보다가
[경향신문]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고서 골목이 없어졌다. 골목이란 호기심의 창고. 그것을 먹고 자라던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처마가 사라졌다. 처마란 하늘을 맞이하는 응접실. 그 아래에서 잠시 비를 긋던 사람들도 이젠 없다. 물론 빗소리도 함께.
지난주 밤늦게 본 다큐. ‘마지막 화전민, 사무곡의 겨울’의 한 장면이 길게 여운을 남겼다. 산에서 태어나 군대생활을 제외하고 팔십이 넘도록 산중 굴피집에서 살아가는 노인. 산이 터전인 노인의 몸에는 산이 그대로 들어앉은 듯하다. 굽은 어깨는 산의 능선을 빼닮았다. 밭 가운데 선친의 묘에 제사 지내고 혼자 앉아 음복할 때 뒷모습. 고단한 등이 두툼하게 솟았다. 휜 등에 작은 무덤이라도 숨기고 있으신가.
굴참나무 껍질을 기왓장처럼 지붕에 얹은 굴피집에서 단풍잎을 조각조각 기운 듯한 옷을 입은 노인. 혼자 살면 외롭기가 마치 흔들리는 나뭇가지 같다는 노인. 지난여름 땀 흘려 키운 땅콩을 팔려고 삼척시장에 외출했다 온 뒤 후유증을 앓는다. 산중생활을 이제 그만 정리하고 자식들 곁으로 내려오라는 압력도 받는 노인. 겨우 자리를 털고 일어난 뒤 울먹한 표정으로 굴피집의 처마 아래를 본다. 모종의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양지바른 툇마루에 엎드려 붓을 들고 이름을 쓴다. <호주 정상흥>. 작은 송판으로 문패를 만든 것이다. <戶主 鄭斗星>. 아버지의 문패 옆에 나란히 자신의 이름을 건다. 아무도 없는 산중이니 하늘한테 내세운 본인의 문패이겠다.
딱따구리가 나무를 두들기듯 굴피집 처마에 못을 박는 노인의 경쾌한 망치 소리를 듣는데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내 책장 한쪽에 걸린 백부의 나무문패. 언젠가 고향 갔다가 큰집 처마 아래에서 저 문패를 보았다. 큰형님께 말씀드리고 수습해 와서 모셔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제껏 나는 문패를 가진 적이 있었나. 솥단지 걸고 살림이라고 차린 이후 아파트를 벗어난 적이 없다. 나의 그것은 203호, 806호 등등을 거쳐 지금은 101동 1201호이지 않았겠나. 그러니 어느 병동이나 감옥의 호수 같은 나의 문패.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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