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규칼럼] 정치권의 혼탁한 말

박완규 2021. 2. 1.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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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 진영논리 날로 확산
보선 앞두고 정치인 막말 줄이어
지지세력 결집·지명도 제고 노려
말을 매개로 하는 정치 위상 실추

말은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역할을 한다. 플라톤의 대화편 ‘크라튈로스’에서 소크라테스는 “말은 모든 것을 표현하고, 모든 것이 언제나 순환하고 돌게 만든다”고 했다. 말은 사물의 본질을 드러낼 뿐 아니라 소통의 도구가 된다는 뜻이다. 지금은 말이 제 기능을 잃어가고 있다. 말에 여유나 절제가 없다. 말로 사달이 나곤 하는데도 상황은 악화일로다. SNS에서 오가는 말은 진영 논리가 더욱 뚜렷해진다. 내 편과 네 편을 가른 뒤 자기 편 주장만 일방적으로 두둔하고 상대방을 감정 섞인 어투로 신랄하게 비난한다. 고매한 학자들까지 가세한다. 이런 편가르기가 문제를 키우기만 한다는 것을 잘 알 텐데도 그런다.

4월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정당마다 예비후보들 간 경쟁이 달아오르면서 정치인의 말이 거칠어지고 있다. 막말이 자기 진영 지지자들을 결집하고 정치인의 지명도까지 높이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부산을 지역구로 둔 여당 재선 의원은 “우리 부산에 계신 분들은 조·중·동, TV조선, 채널A를 너무 많이 봐서 나라 걱정만 하고 계시는지 한심스럽다”고 했다가 거센 반발이 일자 부산 시민들에게 사과했다. 야당 초선 의원은 여당 여성 의원을 겨냥해 작년 총선 당시 정권 차원의 지원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조선시대 후궁이 왕자를 낳았어도 이런 대우는 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가 파문이 커지자 사과했다. 야당의 서울시장 예비후보는 자신의 지역구와 관련해 “양꼬치 거리에 조선족 귀화한 분들 몇 만명이 산다”며 “90% 이상 친 더불어민주당 성향”이라고 말해 집중포화를 받았다. 야당 원내대표가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 “전직 대통령이 되면 사면 대상이 될지 모른다”고 하자 여당 3선 의원이 “공업용 미싱을 선물로 보낸다”고 맞받은 것도 볼썽사납다.
박완규 논설실장
여당 서울시장 예비후보들의 친문세력 구애 경쟁은 점입가경이다. 장관을 지낸 4선 중진 의원이 페이스북 글에서 문 대통령 생일을 축하하면서 “대한민국은 문재인 보유국”이라고 했고, 다른 4선 중진은 “지금껏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던 대한민국과 대통령”이라고 했다. ‘문비어천가’로 세를 불리려는 의도는 천박하기 이를 데 없다.

우리 정치권에서 언제부터인가 유머가 사라졌다. 비유가 살벌해지는 이유다. 미국 정치권을 보자. 조 바이든 대통령 취임식에 모자 달린 점퍼에 알록달록한 털장갑을 끼고 참석한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은 “(지역구인) 버몬트에서는 따뜻하게 입는다. 우리는 추위가 어떤 건지 알고 있다”고 했다. 우리 정치권은 웃어넘길 일조차 정쟁 대상으로 삼는다. 정치가 강퍅해지니 여야 대화가 실종되는 것 아닌가. 정치인의 말에서 품격이 사라짐에 따라 정치 혐오 현상이 확산된다. 가뜩이나 취약한 정치를 악순환으로 몰아넣는다.

모든 정치 행위는 근본적으로 말을 매개로 이뤄진다는 점에서 우려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정치인의 막말은 정치의 기반을 허물고 정치 불신을 낳는다. 오죽하면 문학평론가 유종호는 ‘시란 무엇인가’에서 “정치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정치현실 오독(誤讀)의 첩경”이라며 “적정 수준의 불신기술의 획득과 구사야말로 정치현실을 바로 읽는 시민적 지각의 일부”라고 했겠는가.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검찰의 재단 계좌 열람 의혹’을 제기했다가 “사실이 아니었다고 판단한다”며 사과하면서 “과도한 정서적 적대감에 사로잡혔고 논리적 확증편향에 빠졌다”고 했다. 사과의 진정성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자신의 신념·판단에 부합하는 정보에만 주목하는 확증편향이야말로 많은 이들이 헤어나지 못하는 수렁임을 보여준다.

우리 사회에서 오가는 말에 독단과 독선이 넘쳐나는 세태에 정치인들이 휘말려들면 안 된다. 품격을 내팽개치고 어떻게 해서든 표만 챙기려고 하면 민주주의가 바로 설 수 없다. 정치는 언어적 행위임을 정치인들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산문집 ‘사소한 부탁’에서 “말을 말로 대접하여 말하는 사람은 저 자신과도 소통한다. 그것이 말의 힘”이라고 했다.

박완규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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