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 서양자기서 느껴지는 중국풍 동서양 소통의 핫아이템

강구열 2021. 2. 1.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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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일본실'·'세계도자실' 개관
검소함 특징 '와비 다도' 흔적
700년간 지배계급이던 무사들
茶문화 비롯 공연예술 흐름주도
16세기 조선의 막사발 들여오며
중국선 고가의 다구 공수해 향유
서구에 분 동양열풍
중국·일본문화의 열광적 소비 넘어
자신들 문화를 자기에 그려넣어
서양풍 중심문양에 동양문양 넣은
크락 자기 통해 동서양 조화 표현
그릇 중앙에 원형의 중심 문양을 배치하고, 주변에 구획을 나눠 그림을 새긴 ‘크락 자기’.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찻잔은 전남 신안의 바다에서 발굴되어 ‘신안선’이라 불리는 중국 원나라 무역선이 실어 나른 수많은 도자기 중 한 품목이었다. 신안선이 향하던 일본에서 ‘가라모노’라 불리는 도자기였다. 차문화의 변화에 따라 조선에서 건너간 ‘고라이모노’가 유행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조선 찻잔은 검소하고 단순한 당시의 차문화와 잘 어울렸다.

1752년 1월 중국 광저우를 출발해 네덜란드로 향하던 ‘헬데르말선호’가 남중국해에서 침몰했다. 기록에 따르면 이 배에는 차, 비단, 금 외에도 15만4000여 점의 도자기가 실려 있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중국 물품에 대한 애호가 크게 늘면서 ‘중국식’, ‘중국풍’을 의미하는 ‘시누아즈리’(Chinoiserie)가 유행했다.

싣고 있던 화물을 품고 가라앉은 침몰선은 도자기가 전근대 시대 “지역과 정치, 종교, 그리고 인종의 경계를 넘어 전 세계와 소통하던 중요한 아이템”이었음을 증언한다. 도자기는 단순한 물건을 넘어 삶의 방식을 바꾼 교류의 증거이기도 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2년여 작업 끝에 최근 문을 연 세계문화관의 ‘일본실’, ‘세계도자실’에서 읽을 수 있는 메시지 중 하나다.

◆조선, 중국의 도자기로 표현된 일본의 다도

박물관이 일본실에 재현해 놓은 다실(茶室)을 보면 당대 차문화에 드리운 미의식이 검소함, 평범함을 추구했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이런 문화를 이끌었던 센노 리큐(1522∼1591)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위해 조성한 다실 ‘다이안’은 겉치레를 없앤 3.64㎡의 작은 공간에 연기로 그을린 흙벽과 검은 기둥이 두드러진다.

‘고려다완’, 즉 고라이모노는 일본인들의 이런 감각에 잘 어울리는 도자기였다. 투박하지만 과감한 조형미와 유약의 대담한 변화를 특징으로 하는 고라이모노에 와비차를 즐기던 일본인들은 마음을 뺏겼다. 16세기에는 조선에서 만든 막사발이 건너갔고, 17∼18세기에는 부산 왜관에 직접 가마를 만들고, 조선 도공을 고용해 자신들의 취향에 맞는 찻잔을 주문, 제작했다.

이전까지의 차문화는 결이 완연히 달랐다. 가라모노는 중국에서 수입된 고가의 다구(茶具)로 가마쿠라 시대(1185∼1333) 말기부터 남북조 시대(1336∼1392)에 유행했다.

무사들은 이런 차문화의 든든한 배경이자 주체였다. 무로마치 막부가 기울자 일본 통일을 꿈꾸던 무장들은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로 고가의 다도용 도구를 수집했다. 리큐가 오다 노부나가, 히데요시에게 차를 가르친 선생이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는 최고 권력자인 이들을 모시며 검소함을 특징으로 하는 와비 다도를 완성했다. 가라모노, 고라이모노와는 차별화된 ‘라쿠다완’을 만들어 내는 데도 성공했다.

새로운 모습을 갖춘 일본실은 63건 198점의 유물을 전시 중이다. 전시 주제는 ‘무사’. 700년간 지배계급으로 군림하며 차문화를 비롯해 공연예술인 ‘노’(能), 정치적 권위 표현의 수단이기도 했던 회화 등 문화예술 후원자였던 무사들의 모습을 조명한다.

◆시누아즈리와 자포니즘, 서구에 분 동양 열풍

16세기 이탈리아의 예술가인 조반니 벨리니가 그린 ‘신들의 연회’에는 이색적인 조합이 등장한다. 그림은 주피터, 넵튠, 아폴로 등 로마의 신들과 요정들이 술과 음식을 함께 즐기는 장면을 묘사했는데, 일부가 중국 명나라의 도자기를 들고 있다. 이때쯤이면 유럽에 중국 도자기가 꽤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중국 도자기가 서구에 알려지기 시작한 건 15세기 즈음이다. 17∼18세기에 이르면 교역이 활발해지며 중국 열풍이 일어난다. 왕족, 귀족은 중국 물건으로 자신들의 성이나 방을 채워 권력을 과시했다. 이런 물건 중 대표적인 것이 도자기였다. 1673∼1715년 프랑스 왕실은 약 900점의 동양 자기를 갖고 있었다. 독일 샤를로텐부르크성에 있는 ‘자기의 방’은 지금도 중국 자기로 가득 채워진 방으로 유명하다.

일본 도자기는 중국이 해상 무역을 제한하고, 내부 문제로 혼란을 겪는 와중에 유럽으로 진출할 기회를 잡았다. 1659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요구한 5만6000여 점을 납품하는 데 성공한 것이 계기였다. 일본은 특유의 채색자기로 중국의 것과 차별화했다. 붉은색, 노란색, 녹색 등의 색상과 비대칭적인 도안 등 일본 디자인은 유럽인들의 지지를 받았고, 19세기 후반의 ‘자포니즘’(Japonism)을 낳는 단초가 됐다.

그러나 유럽 사회는 중국, 일본 문화의 열광적인 소비자로만 남지 않고, 자신들의 문화를 새겨넣었다. ‘크락 자기’가 대표적인 사례다. 그릇 중앙에 원형으로 중심 무늬를 넣고, 그 주위를 몇 개의 구획으로 나눠진 그림창을 배치하는 양식이다. 유럽의 주문이 활발해지면서 크락 자기의 중앙에는 유럽 가문의 문장이나 서양 인물, 신화 등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박물관은 “서양풍 중심 문양 둘레에 동양풍 문양이 함께 그려진 크락 자기야 말로 동서양 문화의 만남 과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화유산”이라고 소개했다.

박물관은 네덜란드 국립도자박물관, 흐로닝어르 박물관에서 빌려온 유물 113점을 포함해 243점의 전시품으로 동서 문화가 교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네덜란드 유물은 내년 11월까지 약 2년간 한국 관람객들과 만난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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