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아 칼럼]장혜영의 질문 "왜 여성 존중에 실패하나"

김민아 토요판팀 선임기자 2021. 2. 1.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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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기자는 참여자가 아니다. 거리를 둬야 한다. 오랫동안 그렇게 훈련받았다. 실패하는 순간이 있다. 대표적 사안이 성폭력이다. ‘드물게 운 좋은’ 여성 노동자로 살아왔지만, 트라우마가 없는 건 아니다. 30년 전 수습 시절, 허벅지에 손을 얹곤 실수였다며 느물거리던 형사계장 얼굴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김민아 토요판팀 선임기자

장혜영 정의당 의원(이하 호칭 생략)은 트라우마를 일깨웠으되, 동시에 치유했다. 장혜영은 피해자의 ‘새로운’ 목소리를 들려줬다. 스스로 선택한 방식으로 일상을 회복하겠다는 주체적 결단을 했다. 과거 권력형 성폭력 사건과 전혀 다른 풍경을 만들어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속한 공동체(정의당) 내에서 가해자의 사실 인정과 사죄, 문책(제명) 조치가 이뤄졌다. 지난해 박원순 사건과 비교해보라. 가해자는 사실을 인정하고 사죄하는 대신 죽음을 택했다. 더불어민주당과 서울시 관계자들은 피해자의 신뢰성을 깎아내리거나 사안을 축소하는 데 바빴다.

가해자를 둘러싼 서사도 사라졌다. 서지현 검사를 성추행한 안태근에겐 ‘(사건 당시) 술에 취했다’는 ‘음주 서사’가 뒤따랐다. 비서 김지은에게 성폭력을 가한 안희정에겐 ‘(사건 이후) 컨테이너 건물에서 은둔 중’이라는 ‘반성 서사’가 따라붙었다. 가해자 서사는 음모론을 양산하며 2차 가해로 이어졌다. ‘김종철 성추행 사건’엔 가해자의 이름만 남았다.

장혜영은 선택하고 결단했다. 정의당은 절차에 따라 뒷받침했다. 박원순 사건 피해자 A씨는 김종철 사건 처리 과정을 보며 “나도 초기에 이렇게 조사받고 인정받고, (가해자가) 사과하고 사퇴한다든지 책임을 통감하는 결과를 바랐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KBS 인터뷰).

상찬해도 부족할 판에 일부에선 ‘친고죄 규정이 폐지됐는데 왜 형사고소를 안 하느냐’며 압박을 가한다. 2개 단체는 경찰에 직접 고발장을 냈다.

성범죄를 친고죄에서 제외한 것은, 가해자가 이 규정을 악용해 피해자를 협박하거나 회유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최대한 존중하자는 게 친고죄 폐지의 취지다. 지금 장혜영에게 고소를 압박하는 건 이 같은 취지에 정면으로 반한다. 합의를 강요할 수 없는 이치와 마찬가지로, 고소 또한 강요할 수 없다. 지금 가해자가 범죄를 부인하거나, 소속 집단이 축소·은폐를 시도하는 상황도 아니지 않은가.

장혜영은 지난달 30일 KBS에 출연해 고소하지 않는 이유를 분명히 밝혔다. “쏟아질 2차 가해, 제가 당한 피해들을 소명해야 되는 절차들, 그 지난한 재판 과정에서 겪어야 되는 고통을 겪고 싶지 않다.” 이런 설명을 듣고도 고소에 집착하는 이유는 뭔가. ‘관음증’이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나.

관음증이 아니라면, 공익을 위한다면 장혜영이 지난달 25일 공개한 입장문을 찬찬히 읽어보길 권한다. “그토록 그럴듯한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남성들조차 왜 번번이 눈앞의 여성을 자신과 동등하게 존엄한 존재로 대하는 것에 이토록 처참히 실패하는가?”

김종철 한 사람을 재판에 넘기고 유죄 판결을 받아내는 일보다, 이 질문에 답하는 일이 훨씬 중하고 시급하다. 고소를 압박해온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은 소속 정당 내부 문제부터 돌아보기 바란다. 국민의힘에선 최근 김병욱 의원이 성폭행 의혹에 휘말려 탈당하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으로 추천했던 정진경 변호사도 성추행 의혹으로 사퇴한 바 있다.

민주당도 다르지 않다. 최인호 수석대변인은 김종철 사건에 대해 “충격을 넘어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이다. 무관용 원칙으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논평해 ‘유체이탈’이란 비판을 받았다. 같은 당 권인숙 의원이 “남이 겪은 문제인 듯 타자화하는 태도가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다”며 대신 사과할 정도였다.

성폭력은 법을 만들고 양형을 강화한다고 근절되지 않는다. 법과 제도는 중요하지만 ‘인프라’일 뿐이다. 보다 근본적인 과제는 각자 서 있는 자리에서 장혜영의 질문에 진지하게 답하는 일이다. 성차별 구조가 실재함을 인정하고, 성폭력이 극소수 악한들만의 문제가 아님을 받아들이며, 소속 집단의 체질과 문화를 개선하는 데 나서야 한다. 지금 시선을 둘 곳은 고소 여부가 아니라 장혜영이 던진 질문이다. 더 이상 장혜영에게 묻지도, 요구하지도 말라. 당신들 스스로에게 묻고, 당신들이 속한 공동체부터 점검하라.

수백 번 쓰고 싶지만, 지면 제한으로 한 번만 쓴다. 장혜영이 옳다.

김민아 토요판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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