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천하'로 끝난 미얀마 민주주의 실험.. 또 군부 쿠데타

진달래 2021. 2. 1.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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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 "부정선거 탓, 1년간 비상사태 선포"
아웅산 수치 총선 압승에 커진 군부 위기감
민족·종교 갈등 심화, 결국 민주화 걸림돌로
1일 군부 쿠데타가 발생한 미얀마 최대 도시 양곤 시청 안에 군용차가 주차돼 있다. 양곤=로이터 연합뉴스

반세기 만에 어렵사리 민주주의를 쟁취했던 미얀마가 불과 5년 만에 군부 독재로 회귀할 위기에 놓였다. 지난해 11월 총선에서 압승한 집권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의 부상에 위협을 느낀 군부는 1일 기어이 무력으로 정권 탈취를 선언했다. 미얀마 자유의 상징 아웅산 수치도 다시 갇힌 신세가 됐다. 미얀마 역사학자 탄트 미우는 “지난 10년간 민주주의를 향한 진보는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는 말로 조국의 취약한 민주화 토대를 개탄했다.


5년 만에 인내심 잃은 軍 "1년간 비상사태"

미얀마군 TV는 이날 오전 “군은 1년간 비상 사태를 선포했다”며 “권력이 민 아웅 흘라잉 군 최고사령관에게 이양됐다”고 발표했다. 앞서 수치 국가고문과 윈 민 대통령 등 NLD 고위인사들도 구금됐다.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은 군 출신의 민 쉐 부통령은 성명에서 “선거관리위원회가 지난해 11월 8일 총선 유권자 명단 비리를 해결하는 데 실패했고, 다른 정당 조직들이 국가의 안정을 해치고 있다”며 ‘부정 선거’를 쿠데타 사유로 제시했다. 총선에서 NLD는 선출의석 476석 가운데 396석(83.2%)을 획득, 단독정부 구성에 성공했고 이날 ‘문민정부 2기’ 출범을 앞둔 상황이었다.

미얀마 사회는 즉시 고립됐다. 군의 언론 통제 탓에 주요 도시의 이동통신망과 인터넷이 차단되는 등 외부로의 정보 유출은 사실상 막혔다. 최대 도시 양곤 국제공항이 폐쇄돼 물리적 이동도 금지됐고, 수도 네피도와 양곤 주요 거리에는 군 병력이 대거 배치됐다. 불안감을 느낀 시민들이 은행과 현금자동입출금기(ATM)로 몰려 모든 금융 서비스가 중단되기도 했다.

쿠데타 조짐은 총선 전후 일찌감치 감지됐다. 군부는 유권자 명부가 실제와 860만명가량 차이가 난다며 조작 의혹을 꾸준히 제기했다. 정부가 소수민족 거주지인 서부 라카인주(州) 대부분 지역에서 선거를 취소해 유권자 100만명 이상의 투표를 불허허고, 이슬람교를 믿는 로힝야족 60만명에게는 투표권을 주지 않은 것도 군부에 빌미를 줬다. 최근 “특정 상황에서 헌법이 폐지될 수 있다”는 민 아웅 흘라잉 최고사령관의 발언은 쿠데타를 예견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국제사회의 의심 어린 눈초리에 이틀 전(30일) “헌법을 준수하겠다”던 군부의 유화 제스처는 철저한 기만술이었다.

선거 부정을 쿠데타 명분으로 내세운 군부의 주장을 그대로 믿는 이는 없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수치 고문의 인기와 여당의 압승에 장군들은 자신들이 설계한 민간 통치 체계에 인내심을 잃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온갖 비난에 껍데기 민주주의를 허락하긴 했으나, 민간 권력이 군을 점점 옥죄어오자 태도를 바꿨다는 설명이다. 영국 BBC방송도 “쿠데타 시점이 (모든 것을) 말해 준다”면서 “이번 주에 예정됐던 차기 정부 승인 절차는 없던 일이 됐다”고 꼬집었다.

1일 쿠데타가 일어난 미얀마 최대 도시 양곤에 군인들이 속속 배치되고 있다. 양곤=EPA 연합뉴스

종족·종교·사회 갈등 중첩, 예견됐던 쿠데타

지난했던 미얀마의 민주화 여정을 떠올리면 이번 쿠데타는 허탈감마저 든다.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미얀마는 14년 만인 1962년 네윈 육군총사령관이 역시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뒤 53년간 군사독재에 신음했다. 시민 3,000여명이 총에 맞아 숨지며 민주화 투쟁의 서막을 연 1988년, 이른바 ‘88항쟁’ 이후에도 군부는 꿈쩍하지 않았다. 쿠데타도 한 번 더 있었고, 수만명이 희생된 끝에 2015년 수치 고문과 NLD는 겉으로나마 권력을 넘겨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난 5년 동안 군과 정부의 긴장 수위는 고조되기만 했다. 더 많은 권력을 가져오려는 민간 정부와 더 내주지 않으려는 군의 줄다리기는 팽팽했다. 급기야 지난해 총선에서 NLD가 2015년보다 훨씬 선전하면서 군부는 결국 칼을 빼 들었다.

다수 버마족과 소수민족의 정치적 갈등, 불교와 소수종교의 불화, 물가폭등과 부정부패 등 문민정부 출범 뒤에도 계속된 미얀마 사회의 적폐는 군부가 언제든 힘으로 민주주의를 제압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됐다. 양곤의 정책 싱크탱크 책임자 우힌 자우 윈은 NYT에 “총선 이후 정부와 군의 협상도 지지부진했다”면서 “(쿠데타는) 시간 문제였다”고 말했다. 어쩌면 피할 수 있는 쿠데타였다는 것이다. 수치 고문은 이날 성명을 통해 “군부 쿠데타에 대항해 시위를 하라”고 촉구했다. 1980년대로 퇴행한 미얀마 민주주의의 슬픈 현주소다.

쿠데타로 얼룩진 미얀마 현대사. 그래픽=김대훈 기자

진달래 기자 aza@hankookilbo.com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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