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호의 비즈 & 클래식 34] '게임체인저' 사이먼 래틀의 독일행
독일 뮌헨을 거점으로 하는 명문악단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BRSO)은 1월 11일 “2023년부터 사이먼 래틀 런던 심포니(LSO) 음악감독이 수석 지휘자를 맡는다”고 발표했다. 2019년 급사한 마리스 얀손스의 후임으로 래틀을 지목한 것이다. 래틀은 2022~2023시즌까지 런던 심포니에서 음악감독으로 일하고, 2023~2024시즌부터 5년간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을 맡게 된다. 그는 2018년 베를린 필 음악감독 자리를 떠났지만, 5년 만에 독일 악단으로 다시 돌아오게 됐다. 뮌헨 언론은 래틀 입성에 일제히 환영의 뜻을 표했다.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계약 이후 들려온 래틀의 독일 시민권 신청 소식은 영국 음악계에 큰 충격을 줬다. 래틀이 ‘영국이 낳은 21세기 거장’으로 꼽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래틀은 영국 리버풀에서 태어나 리버풀 대학을 졸업한 뒤 1980년부터 18년간 버밍엄시립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로 오케스트라를 이끈 인물이다. 영국 왕실은 1994년 30대인 래틀에게 기사 작위와 ‘경’(Sir) 칭호를 하사했고, 언론과 공연계에서는 경칭을 표기하면서 예우해왔다. 그는 2012년 런던올림픽 개막식의 지휘를 맡기기도 했다.
래틀은 독일 언론과 인터뷰에서 이중국적을 취득하는 이유에 대해 “내 집이 베를린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올해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가 발효된 후 일터인 런던과 자택인 베를린을 오가기가 어려워진 탓에 내린 결정이라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그가 2023년부터 일하게 될 뮌헨은 베를린과 기차로 네 시간 거리지만 이동은 자유롭다. 래틀은 독일 시민권 취득을 두고 영국 여권 소지 시 독일 이동에 불편을 겪는 점을 이유로 들었지만, 음악계에서는 다양한 해석이 나왔다. 그간 래틀이 음악계의 목소리를 영국 정치권에 전달했으나, 공허한 반응만 얻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잇따랐다. 래틀은 런던 심포니 감독 부임 전부터 영국 정부에 여러 차례 전용홀 건립을 요청했지만 정부 응답은 미온적이었다. 데이비드 캐머런 내각 시절, 조지 오스본 당시 재무장관이 사업안을 승인했지만, 브렉시트 국면이 거듭되고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콘서트홀 건립 사업은 우선순위에서 밀려 좌초 위기다.
물론 래틀의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선택은 무엇보다 ‘예술적인 동인’이 가장 크다. 래틀에게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수석 지휘자직은 예술적으로 최상의 선택이고,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에도 래틀은 기존 객원 지휘자군 가운데 최고의 카드다.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에는 한국인 바이올린 단원 이지혜를 비롯한 테크니션들이 주요 부문에 포진해 있고, 비교적 짧은 리허설에도 기민하게 객원 지휘자의 특성을 포착한다. 래틀은 청년 시절엔 리허설 시간을 길게 가져가면서 사운드를 숙련했지만, 베를린 필, 런던 심포니를 거치면서 연습 기간이 짧아도 합을 맞추는 노하우를 쌓았다.
래틀이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에서 받은 최고의 선물은 합창단이다. 독일권 최고 기량의 바이에른 방송합창단은 래틀이 심혈을 기하는 오페라와 성악 부수 관현악곡 연주에 든든한 원군이다. 래틀은 대규모 인원이 음악을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인간성이 드러나고 그것이 음악의 에토스인 점을 강조해왔다. 인성(人聲)이 매개된 종교곡에서 영국 역사주의 연주단체, 계몽시대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에서 래틀이 남긴 업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의 래틀 임명은 창단부터 귀재 마에스트로를 뽑아온 전통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다. 오이겐 요훔, 라파엘 쿠벨릭, 콜린 데이비스, 로린 마젤에서 얀손스에 이르기까지 음악을 만드는 개개인을 존중하면서 중층적으로 대화할 줄 아는 인물들이 악단 역사를 일궜다. 얀손스 시절에도 야닉 네제 세갱, 다니엘 하딩, 구스타보 두다멜, 라하브 샤니에 이르기까지 1970~80년대생 젊은 지휘자들과도 진취적으로 교류하면서 미래 감독군을 육성했다.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은 긴 호흡으로 거시적 관점을 유지하는 데 익숙하다.
래틀과 계약을 체결한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행정감독 울리히 빌헬름은 “얀손스가 남긴 정신을 이어받을 음악가”로 래틀을 들기도 했다. 악단 경영자 입장에서 보면, 관객이 래틀의 음악을 들으면서 얀손스 시대를 떠올리고 계속해서 티켓을 구매하는 패턴이 이상적이다.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은 정기 연주회와 해외 투어에서 관현악곡만 연주하는 데 그치지 않고, 래틀의 능력과 기호를 다방면으로 포용하고자 한다. 래틀은 뮌헨 현대음악 축제에 즉시 투입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과 래틀 둘 다 오페라에 관심이 있어서 모두에게 긍정적이다. 마침 오페라를 다루는 잘츠부르크 부활절 축제가 크리스티안 틸레만 현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SKD) 음악감독과 사사건건 부딪쳐 왔다. 래틀과 베를린 필이 바덴바덴 페스티벌하우스에서 이룬 상업적 성과를 기준하면,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도 래틀의 이름값을 재정 건전에 유용히 쓸 것이다.
래틀은 얀손스의 숙원사업을 자신의 손으로 완성할 전망이다. 얀손스는 앞서 2000년대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을 맡을 때 계약 조건으로 악단의 숙원인 전용 콘서트홀 건립을 내세웠다. 얀손스는 지역 유력지에 직접 기고를 하고 정치권과 끊임없이 투쟁하면서 전용홀 건립 결정을 끌어냈지만 결국 준공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전용홀 건립 음악회 지휘봉은 래틀 지명자가 잡을 가능성이 크다. 음악가는 역사 뒤로 사라져도 콘서트홀은 영원히 시민에게 남는다는 점을 얀손스와 래틀은 오래전부터 공감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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