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 고경태

고경태 2021. 2. 1.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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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2004년 타계한 스웨덴 작가 스티그 라르손의 소설 <밀레니엄> 시리즈를 원작으로 한 미국 영화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2012년 개봉)의 한 장면. 올댓시네마 제공

고경태 ㅣ 오피니언 부국장

<밀레니엄>이라는 소설이 있다. 월간지 <밀레니엄> 발행인이자 탐사보도 전문기자 미카엘 블롬크비스트와 천재 해커 리스베트 살란데르의 거대한 모험을 그렸다. 한 소녀의 실종사건을 계기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인종차별과 나치즘이 얽힌 역사적 범죄사건의 진실을 찾다가 연쇄살인과 맞닥뜨린다. 비밀의 문이 하나씩 열리고 추리게임이 시작된다.

이 소설은 한번 손에 잡으면 놓기 싫을 만큼 스릴 넘치고 흥미진진하다. 한국을 비롯한 52개국에서 1억권 넘게 팔렸다고 한다. 스웨덴 기자 출신 작가 스티그 라르손은 2004년 이 소설의 원고를 넘기고 1권이 출간되기 직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나는 추리소설의 중독성보다 정작 다른 지점에서 놀라움을 느꼈다. 여성들이 당하는 모든 형태의 고통과 차별이 남김없이 묘사되는데, 그 작가가 여성이 아닌 남성이라니. ‘페미니즘 추리 스릴러’라 할 만한 작품이다. 이는 1권 제목에 압축되어 있다.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리스베트 살란데르는 신비하고 매력적인 캐릭터다. 작가는 ‘삐삐가 성인이 되면 어떤 모습일까’를 상상하다가 이 여성 주인공을 창조했다. 스웨덴 소설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그 ‘말괄량이 삐삐’ 말이다. 리스베트는 살인과 강간의 위험에 노출되지만, 과거의 전력을 빌미로 오히려 이상한 여자 취급을 당한다. 남자들은 공모해 리스베트를 파멸로 이끈다. 리스베트는 머리에 총을 맞은 채 생매장을 당하고도 터미네이터처럼 부활한다. 삐삐처럼 씩씩하게 복수에 나선다.

증오의 대상이 된 현실 속의 한 여자를 생각한다. 증오를 발산하는 남자들을 생각한다. <밀레니엄> 제3권의 제목은 ‘벌집을 발로 찬 소녀’다. 지난해 7월, 여자는 벌집을 발로 찬 소녀처럼 되었다. 피해를 알렸지만 온갖 의심과 억측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본인이 상대를 유혹한 증거인 양 어떤 동영상과 손편지가 유포됐다. 그것들은 여자가 피해자스럽지 않을 뿐 아니라 실제 피해자가 아닐 수 있다는 주장의 입증 자료로 돌고 돌았다. 어느 유명한 만화가는 순진무구한 표정의 사내아이를 등장시켜 이런 말풍선을 넣었다. “아빠, 4년간 성추행당했다는데 이 편지는 뭐야?” 만화가의 뜻과 관계없이, 이 그림은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의 행태를 상징하는 대표 이미지로 오래 남을 것 같다.

그렇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 사건 피해자 이야기다. 한국 사회에서 심각한 성폭력은 ‘희롱’처럼 가볍게 인식되기도 한다. 성희롱과 성추행을 인정받는 과정 자체가 지난하기도 하다. 현실은 소설 <밀레니엄>의 허구를 능가한다. 그래도 최근 한달간 여러 의미 있는 판단이 나왔다. “고 박원순 전 시장이 세상을 뜨기 직전 성추행 의혹을 시인하는 취지의 발언을 했고”(검찰, 지난해 12월30일), “피해자가 성추행으로 상당한 정신적 고통을 받았으며”(법원, 1월14일), “박 전 시장이 피해자에게 행한 성적 언동은 성희롱에 해당하며”(국가인권위원회, 1월15일), “‘피해호소인’이 아닌 ‘피해자’로 인정하고 당이 공식 사과한다”(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 1월27일)는 내용들이다.

다음 차례는 누구인가. 또 사과를 검토해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여자를 혐오한 남자들’이 아닐까. 박원순 전 시장에 대한 존경과 연민에 기대어 피해자를 말과 글로 공격한 이들 말이다. 나는 소설 속에서 리스베트를 저주하던 남자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여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죄의식은 없다. 무감각하다. 현실 속의 남자(물론 남자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들도 ‘2차 가해’ 할 의사는 없었다고 한다. 그들 역시 무감각하다. 당당하다. 사과할 생각은 없다.

말괄량이 삐삐는 모험이 끝났을 때 이렇게 말한다. “어른이 되면, 난 반드시 해적이 될 거야.” 리스베트는 해적이 되지 않았지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행동한다. 해를 가한 자들의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해 자신의 몸에 문신을 새긴다. 작가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이런 말도 한다. “세상에는 이런 자들이 깔렸지. 나도 숱하게 겪었다네. 충고 하나 하자면, 이런 자들이 떠들 땐 그냥 내버려두게. 잘 기억해뒀다가 나중에 기회가 있을 때 빚을 갚아주면 되니까.”

현실의 피해자에게 문신을 권하지는 않는다. 잊지 말아야 할 이름들을 기억의 문신에 새겨두기 바란다.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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