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금된 아웅산 수치 누구..'민주화 상징'·'소수민족 탄압' 두 얼굴

사정원 2021. 2. 1.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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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의 실권자인 아웅산 수치 국가 고문이 군에 의해 구금된 것으로 전해지면서, 지구촌의 이목이 미얀마와 수치 고문에게 쏠리고 있다.

집권 민주주의 민족동맹(NLD)의 묘 뉜 대변인은 "수치 국가 고문과 윈민 대통령이 수도인 네피도에서 군에 의해 구금됐다고 들었다"고 AFP통신에 말했다.

이번 구금 사태는 지난 해 11월 총선에서 민주주의 민족동맹이 압승을 거둔 이후 미얀마 군부가 쿠데타 등 군사행동을 시사한 직후에 이뤄진 일이라 더욱 관심을 모으고 있다.


■ 수치 고문은 누구.

수치 고문은 ‘미얀마 민주화’의 상징으로 추앙받지만, 반대로 ‘소수민족 탄압자’라는 오명도 함께 받고 있다.

수치 고문은 1945년 6월 19일 미얀마 독립의 영웅인 아버지 아웅산과 복지부 장관 등 고위직을 지낸 어머니 킨치 사이에서 태어났다. 특히 그의 아버지 아웅산 장군은 1886년부터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얀마를 독립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해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은 인물이다.

영국에서 생활하던 수치 고문은 1988년 어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병간호를 위해 귀국했다가, 전 국가적 민주화 운동을 무참히 진압하는 군부의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그해 8월 26일 양곤의 쉐다곤 사원 인근 공원에서 50여만 명의 시위 군중이 모인 가운데
‘공포로부터의 자유’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해 민주화 투사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아울러 미얀마를 일당 통치하던 사회주의계획당에 다원적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고, 미얀마 민중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야당세력을 망라한 민주주의 민족동맹(NLD)을 창설했다.

그러나 당초 공정한 선거를 치르기로 약속한 미얀마 군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철권통치를 이어갔으며, 군사정부의 탄압으로 수치 고문은 1989년 첫 가택연금 조치를 당했다.

이후 1990년 5월 미얀마의 군사정부는 서방의 압력에 의해 총선을 실시하였다. 총선 당시 그녀는 피선거권을 박탈당한 상태였음에도 불구, 총선 결과는 수치 고문이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이 82%의 지지를 얻어 압승했다.

그러나 군사 정부는 선거결과를 무효화하고 오히려 지도부 등 당원 수백 명을 투옥하고, 탄압을 가했다.

노벨위원회는 그녀의 이런 민주화 운동 공적을 인정해 1991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결정했다. 그렇지만 수치는 여전히 가택연금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에 그녀의 두 아들과 남편이 그녀의 전면 사진을 들고 대신 시상식에 참석했다. 이후 1995년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그녀는 가택연금에서 6년 만에 풀려났지만, 1999년 남편이 영국에서 암으로 사망하였을 때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우려해 출국을 포기했다.

■ 15년 만에 가택연금 석방

전 세계적으로 그녀의 석방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2002년 5월 미얀마 군사정부를 이끄는 국가평화발전협의회(SPDC)는 그녀를 가택연금에서 해제했다.

하지만 2003년 5월 미얀마 군정은 그녀가 이끄는 NLD 지지자와 친 군정 지지자들 사이에 유혈 충돌이 발생하자, 그를 다시 구금시켰다. 이에 그는 1989년 이후 몇 년의 휴지기를 포함해 2010년 석방에 이르기까지 총 15년을 가택연금 상태로 지내왔다.

이후 2015년에 열린 총선에서 NLD가 승리를 거뒀으나, 그녀는 자녀와 남편이 영국 국적자인 이유로 대통령에 오르지 못했다. 그러나 국가자문역 겸 외교부 장관으로 임명돼 실권자가 되었다.


■ 소수민족 탄압자

수치 고문은 노벨평화상 수상 등으로 국제적으로 큰 신망을 얻었지만, 소수민족을 탄압하며 변호하고 나서자 국제 사회는 그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2017년 미얀마 서부 라카인주(州)에서 종교적 탄압 등에 반발한 이슬람계 소수 민족인 로힝야족 일부가 경찰 초소를 공격한 이후 미얀마군이 대대적인 토벌에 나서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이 과정에 집단 성폭행, 학살, 방화가 곳곳에서 벌어져 로힝야족 마을들이 초토화되고 수천 명이 사망했다. 또 70만 명이 넘는 로힝야족 난민이 발생했지만, 수치 고문은 침묵하거나 군부를 두둔하는 태도를 보여 인권단체들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됐다.


특히 그녀는 2019년 12월 11일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ICJ)에서 열린 '로힝야 집단 학살' 재판에 참석해 "당시 충돌 과정에 국제인도법 위반이 있었다 하더라도 집단학살 수준까지는 이르지 않았다"며 사건 기각을 촉구해 국제사회로부터 거센 후폭풍을 맞았다.

인권상을 받으며 명예를 얻었던 그녀가 막상 정치적 실권을 쥐자 인권적 가치에 나 몰라라 하는 뜻밖의 행동을 하는 데 대한 실망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국제앰네스티는 2009년 그녀에게 수여했던 최고 권위의 인권상인 ‘양심대사상’을 박탈했다. 캐나다 의회는 명예 시민권을 박탈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박탈해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 제기됐지만, 노벨위원회는 노벨상 규정에 따라 수상 철회가 허용되지 않는다고 밝혔지만, 논란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사정원 기자 (jwsa@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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