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어디에 있든 네트에 연결되어 있다
눈은 마음을 드러내는 창이다. 대화할 때는 눈을 보라고 말하곤 한다. 우리는 1년간 마음의 창만을 서로 보며 지냈다. 하지만 창만으로는 건물을 만들 수 없다.
“반 아이를 동네 식당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담임인 나를 알아보지 못해 당황했다. 마스크를 쓰고 지내다보니 알기 힘들었다고 말하는 그 녀석이 못내 섭섭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한 학기 내내 아이들과 마스크를 쓰고 만났던 것이다.”(김현수, <코로나로 아이들이 잃은 것들>에 나오는 선생님 목소리)
인간의 인지력은 대단하다. 마스크를 써서 눈만 나온 얼굴을 보고도 알아본다. 하지만 처음 만난 사람이 마스크를 벗으면 생각했던 얼굴과 달라 당황스럽다. 눈을 보고도 얼굴을 알아보는 상황이 코로나19 학교의 1학기였다면, 이제 얼굴 전체를 보면 누군지를 모르는 상황이 2학기다.
많은 사람이 온라인수업의 질을 걱정했다. “그렇게 해서 수업이 되겠느냐.” “수업의 질이 낮다.” “왜 빨리 진도가 안 나가느냐.” 진짜 문제는 또 있었다.
2020년 1년간, 새로운 학교 친구가 생기지 않았다. 아이들은 애타게 절벽에서 “친구야 보고 싶다”를 외쳤다. 큰소리를 낼 수 없기에 그 소리는 삼켜졌다. 외로움이 뭔지 모르는 아이들이 외로움이란 감정을 알게 되었다. 친구들과 나누었어야 할 시간에 스마트폰을 더 들여다봤다. 그 외로움이 온라인으로 쉽게 달래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겨레21>은 ‘네이티브 온라인’ 인간인 아이들의 온라인 친밀도와 친구관계를 조사했다. 초등 5학년(2009년생)부터 고3(2002년생) 학생 10명을 전화 인터뷰했고, 온라인 생활에 대해 온라인 설문조사를 했다(총 203명 응답)._편집자주
중학생인 아들은 휴대전화를 끼고 산다. 뭘 하는지 몰라도 온종일 휴대전화를 본다. 밥 먹으러 식탁에 와서도 다른 가족은 쳐다도 안 본다. 밥을 입으로 가져가는지 코로 가져가는지 모를 정도로 휴대전화만 본다. 카톡 소리도 쉼 없이 울리고 다른 사람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본다고 여념이 없다. 급기야 엄마가 소리를 질렀다. “너는 엄마랑 핸드폰이랑 물에 빠지면 누굴 먼저 구할 거야?” 놀랍게도 아들은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엮인 존재를 연결된 존재로
성인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어디에 있든 네트에 연결되어 있다. ‘연결’이라는 말에서 즉각 카톡이나 SNS를 떠올리겠지만, 사람뿐만이 아니라 콘텐츠도 그렇다. 유튜브는 ‘추천’의 형태로 끊임없이 나를 어딘가로 연결한다. ‘강압’이 아니다. 내가 거부하면 바로 또 다른 추천을 띄운다. 그러다보면 어느샌가 내가 혹할 만한 호기심 끄는 것이 뜨면 다시 연결될 수 있다.
내가 무엇과 연결됐다는 감각은 사람에게 존재론적 안정감을 준다. 그 안정감은 오프라인과는 달리 ‘압박감’이 없다. 재난 이후 많이 하는 말이 “우리 모두는 연결된 존재입니다”이다. 이 말은 코로나19 같은 재난을 당하면서 혼자 안전할 수 없고 모두가 안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다. 같이 살아가는 한 서로에 대한 책임과 윤리를 다해야 나도 안전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사실 이 말의 진실은 “우리 모두가 연결된 존재”가 아니라 “우리 모두는 엮인 존재”에 가깝다는 데 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는 누군가와 엮여 있다. 식탁에서 카톡으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눌 때 나는 ‘연결된’ 존재이지만 밥을 같이 먹는 식구들과는 ‘엮인’ 존재다. 엮인 존재로서 나는 하기 싫은 것도 해야 한다. 식탁에서 부모님이 묻는 말에 답해야 한다. 관계에 따른 규범이 있고 나는 거기에 맞춰 연기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가 있다. 엮인 존재는 무엇보다 지겹고 지긋지긋하다.
온라인 소통의 특징 중 하나는 이 지긋지긋한 ‘엮인 존재’인 인간을 ‘연결된 존재’로 해방시켰다는 점이다. 카톡에 대답하고, 읽은 글에 ‘좋아요’를 누르고, 더 나아가 댓글을 달아야 하는 의무가 존재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이 즉각적일 필요는 없다. 식탁에서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묻는 부모에게는 즉각 대답해야 하지만, 카톡은 읽지 않고 기다리다가 대답하고 싶을 때 읽고 답하면 된다. 내용은 이미 알림창에 떠 있기 때문에 내가 읽었다는 표시를 내지 않고도 알 수 있다. ‘좋아요’도 하루 지나 달아도 된다. 늦게 달린 댓글이 오히려 더 반가울 때도 있다. 이처럼 온라인 관계망에서 사람의 자유도는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지향성 있는 결속 커뮤니티
자유의 증가와 함께 좀더 과감하게 행동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겼다. 온라인에서는 내가 원하지 않는 사람과 엮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사람, 나랑 생각이나 취향 등 지향이 같은 사람과 연결될 가능성과 방법을 비약적으로 증가시켰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온라인 커뮤니티는 지향성이 있는 결속이다. 과거라면 내가 사는 곳에서 도저히 만나지 못할 사람들과 말이다.
이것이 인간 결속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과거라면 ‘고립’됐을 지향이 지금은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될 수 있고 그 안에서 ‘활동’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이다. 과거에 소수자들은 자신이 살고 활동하는 장소에서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성소수자가 대표적이다. 나 혼자만 그런 존재인 것 같다는 생각에 이들을 지배하던 것은 지독한 외로움과 고립감이었다. 이 때문에 성소수자들은 기를 쓰고 자기와 같은 사람들이 있는 대도시로 나가려고 했다. 엮인 존재들 사이에서 느낀 고립감을 타파할 유일한 방법은 다른 사람과 연결될 수 있는 ‘장소’로 가는 것뿐이었다.
온라인은 이 상황을 드라마틱하게 바꾸었다. 논리적으로 본다면 어디에 있든지 간에 누구와도 연결될 수 있다. 적어도 나와 같은 사람과 연결되고 소통하고 뭔가를 할 수 있게 했다. 내가 있는 장소 근처에 사람이 없어도 데이팅 앱을 켜면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과 넋두리라도 할 수 있다. 실제 내가 아는 한 사람은 인도네시아 밀림에 있는 소도시에서 데이팅 앱을 켰다가 ‘마침’ 그때 고향 방문을 온 미국에 사는 성소수자와 연결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연결을 통한 커뮤니티의 경험은 사람에게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에서 ‘사건’이다. 사람의 존재론적 안정감과 실존적 의미에서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내가 혼자가 아니며 내가 가진 지향이 이상하거나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 사람은 비로소 생기를 가지고 활력 있게 살아갈 수 있다. 연결과 커뮤니티를 통해 존재함의 ‘정당성’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연결을 통해 지향성에 대한 정당성을 획득하면 그 사람들 사이에서 뭔가를 모색하고 도모하려고 한다. 커뮤니티는 사람에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의미 있는 것을 추구하고 새로운 것을 탄생시키며 인정하고 인정받는 활동적 삶의 출발점이 된다. 당연히 이런 커뮤니티의 경험에 사람들은 몰입하고 열중하게 된다. 거기 인간의 존재가치인 활동으로서의 내 삶이 있기 때문이다.
비판받을 의견이 소수의 지지를 받을 때
‘광활한 네트’에서 나와 같은 지향성을 가진 사람을 만나 강력하게 결속하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의 활동적 삶에 ‘충심’을 다하는 것. 이 경향이 강해질수록 커뮤니티는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식으로 말한다면 부족주의적으로 변모한다. 지향성을 가진 자유로운 시민들의 결속이 아니라 ‘동질성’으로 똘똘 뭉쳐 이견을 용납하지 않고 외부와 적대하며 전쟁을 수행하는 폐쇄적인 부족주의적 부족으로 변모한다. 광활한 네트에서 가장 폐쇄적인 부족이 발생하는 셈이다.
한편에서는 고립된 사람들에게 활동적 삶을 돌려주지만 다른 한편에서 그 활동적 삶은 반인도주의적이고 반사회적인 지향에서도 일어난다. 분명히 고립되거나 혹독하게 비판됐어야 할 의견이나 성향이 지구 어디엔가 있는 누군가와 연결되며 어떤 지향성이든 상관없이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연결돼 서로를 승인하는 이들은 세계를 경멸하고 적대시하고 타인을 도구화하고 파괴하는 자신의 욕망을 절대적으로 정당화한다.
많이 문제가 되는 가짜뉴스 또한 강력한 커뮤니티적 경험이지 개인으로서 개별 소비자의 경험이 아니다. 과거에 종이 신문을 읽는 것처럼 서재에 홀로 앉아 세계를 만나는 것으로서의 뉴스 읽기가 아니다. 그 뉴스 읽기는 개인을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 네트에서 가짜뉴스는 커뮤니티를 통해서 전파되고 있다. 나아가 명시적으로 어디 소속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가짜뉴스를 ‘읽는 것’ 자체가 ‘접속’이고 ‘연결’이며 커뮤니티 경험이며 운동이다. 이것은 읽는 이에게 사회와 역사에 대한 강력한 주체감을 부여한다.
이들이 활동적이 될수록 타인의 삶은 위험해지고 세계는 파괴된다. 특히 이 범죄적 존재들은 자기들끼리 충성 경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연결된’ 사람들을 ‘엮어’ 제물로 바치고 돈벌이하거나 사회에 대한 공격이라는 ‘범죄’를 감행한다. 우리는 이미 한국의 인터넷에서, 그리고 미국 극우 음모론자들의 국회의사당 공격에서 이 모습을 반복적으로 적나라하게 보았다.
네트는 사람을, 소수자를 고립에서 해방시키는 역할을 했다. 억압적 ‘엮임’에서 능동적 ‘연결’로 흐를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들이 어렵게 얻은 연결을 통해 정당성을 획득한 경향들 일부는 네트를 통해 고립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네트 내에서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부족주의적 부족으로 ‘유폐’한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이쪽’에 있는 사회에서 고립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유폐하며 ‘저쪽’에 있는 커뮤니티에 몰두한다. 앞에서 말한 반사회적/반인류적 지향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온라인, 오프라인 문제가 아니다
이처럼 자신의 정당성을 승인하는 커뮤니티에 유폐될 때가 가장 위험하다. 온라인이 그 가능성을 비약적으로 올렸지만 이것은 온라인이냐 오프라인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핵심은 사람에게 정당성 승인은 그리 쉽게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고립’돼 있던 소수자들은 이 이상한 존재인 “나는 존재할 권리가 있는가?”라는 고통스러운 질문을 반복해서 던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자신의 정당성에 대한 질문이 소수자로 하여금 사회의 타자로서 자신의 타자성을 끊임없이 대면하게 했다. 그것이 소수자의 고통이자 윤리적 ‘특권’이었다. (물론 이것으로 소수자의 고통을 낭만화/미학화해서는 안 된다.)
반면 주류/다수의 가장 큰 문제는 너무 쉽게 아무런 어려움 없이 자기 존재를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정당성을 절대적으로 승인할수록 타자와 세계는 시야에서 사라진다. 타자의 타자성만이 사람에게 자신의 존재가 정당한지를 묻기 때문이다. 너무 쉬운 정당성의 승인은 그것이 타자이건 자기 자신의 타자성이건 타자성에 대한 윤리적 폭력이다.
연결의 능동성은 사람에게 희열을 준다. 삶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은 주체감과 존재감을 한없이 고양한다. 이 희열에 넘치는 자신에 대한 정당성. 이것이 윤리적 관점에서 본다면 재난이다. 연결에 대한 선호가 강할수록 동일성만 추구하며 타자를 배척하기 때문이다. 에마뉘엘 레비나스가 말한 것처럼 “참된 인간의 삶은 타자로 인해 깨어나는 삶”(<윤리와 무한>)이다. 자신의 정당성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다면 타자도, 나도, 세계도 위험해진다. 자신의 정당성 대신 타자의 정당성을 묻고 심판하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온라인이건 오프라인이건 악마는 거기서 탄생한다.
엄기호 사회학자
*표지이야기 - 네이티브 온라인 인간의 고독
http://h21.hani.co.kr/arti/SERIES/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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