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는 민족개조론자 아닌 민족혁명가였다"

나윤석 기자 2021. 2. 1.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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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는 '민족개조론자'가 아닌 '민족혁명가'였다."

도산 안창호의 생애를 '민족 혁명'의 관점에서 접근한 평전이 나왔다.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가 쓴 '민족독립혁명가-도산 안창호 평전'(지식산업사)은 "도산을 '민족개조론'의 스승으로 규정하는 것은 춘원 이광수 등이 정립한 '반쪽 상(像)'에 불과하다"며 "도산의 생애는 독립운동 노선이 필요한 시기에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장벽을 돌파하는 혁명성으로 점철됐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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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하 ‘도산 안창호 평전’

“도산 안창호는 ‘민족개조론자’가 아닌 ‘민족혁명가’였다.”

도산 안창호의 생애를 ‘민족 혁명’의 관점에서 접근한 평전이 나왔다.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가 쓴 ‘민족독립혁명가-도산 안창호 평전’(지식산업사)은 “도산을 ‘민족개조론’의 스승으로 규정하는 것은 춘원 이광수 등이 정립한 ‘반쪽 상(像)’에 불과하다”며 “도산의 생애는 독립운동 노선이 필요한 시기에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장벽을 돌파하는 혁명성으로 점철됐다”고 말한다.

독립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다 교육자의 길을 걷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 도산은 1905년 한인 공립협회를 창립했는데, 이 단체는 재미 한국인의 자치단체이자 훗날 항일운동의 배후가 됐다. 해외에서 중국과 영국의 비밀결사를 연구한 도산은 1907년 귀국 후 항일비밀결사 조직 신민회를 창립하며 “한국 최초로 민주공화국 건설을 목적으로 전면적 투쟁을 전개한 한국 민중의 ‘시민혁명당’”임을 강조했다.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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