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쓴다는 것은 어둠을 향한 돌팔매
제31화 역대 칼럼니스트 2편
“그는 내가 1년 전 도쿄에 들렀을 때 숙소까지 안내해 준 재일동포 대학원생이었다. 한국 생활이 어땠느냐고 묻자 그는 ‘제가 한국인이랑 똑같지 않아 너무 슬펐어요’라고 말했다.” 2006년 4월, 한정숙의 ‘세상읽기’ 칼럼이다.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표현할 길 없는 감정이 치밀었다. 미안함이었을까? 안타까움 혹은 슬픔이었을까?” 지난 33년 동안 <한겨레>에 실린, 마음을 흔드는 칼럼을 두번째로 추려 보았다. 해설 김태권
“눈보라에서 혼자 아늑해도 될까?”
서경식의 글에 병역거부로
수감 중인 어떤 젊은이가 답했다
용산참사 때 황현산은 썼다
“우리가 용산참사를 잊는다면
다들 부끄러움을 모르게 될 것”
“서경식의 글은 섬세하고 유려하며 잔잔하지만 언제나 깊은 곳에서 슬픔을 자아낸다. 그러나 그 묵직한 슬픔에는 … 강력한 힘이 있다.” 2006년 1월, 한승동의 평가다. 한승동은 서경식의 칼럼을 여러 해 동안 번역했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서경식은 일본어로 글을 쓰기 때문이다.
2006년 4월의 칼럼을 읽으며 나는 울었다. “소학교(초등학교) 시절 어느 재일조선인 아동이 두들겨 맞고 있는 현장을 우연히 목격한 적이 있다. 일본인 악동들이 ‘조센, 조센’이라 욕하면서 때리고 있었다. … 나는 아이가 낼 수 있는 최대의 용기를 발휘해 ‘폭력은 그만둬’ ‘약자에게 해코지하지 마’라고 외치며 말리고 나섰다.” 얼핏 ‘의롭고 용감한 어린이’의 자랑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일은 수습이 됐지만 내게는 꺼림칙한 생각이 남았다. 내게는 기껏 ‘폭력은 그만둬’라는 일반적인 도덕률을 휘두를 용기밖에 없었고 ‘나도 조선인이야’라고 선언할 용기는 없었다. 자신도 두들겨 맞을 각오까지는 할 수 있었지만 굳이 일상적인 차별을 받는 처지까지를 감내할 각오는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조선인 아이는 그 자리를 떠날 때 힐끗 나를 쳐다봤는데 그것은 도와준 데 대해 감사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자신을 때린 일본인을 보는 것과 같은 눈빛이었다. 당연했을 것이다. 그가 보기에 나는 아무리 정의파처럼 처신해도 자신을 처벌하고 때린 또래들의 한명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마지막 구절은 가슴이 먹먹하다. “그때부터 나는 ‘일본인’만은 되지 않겠다고 계속 다짐해왔다. 그랬던 내가 드디어 자기 민족의 나라에서 생활을 시작했는데 가는 데마다 ‘외국인입니까?’ ‘일본인입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있는 것이다.”
2009년 겨울에는 <한겨레> 지면을 통해 ‘편지’를 주고받았다. 서경식은 11월에 일본에서 눈보라에 휘말렸다가 무사히 돌아온 다음 썼다. “‘거짓말 같아.’ 바로 전까지의 일이 허구고 이 따뜻한 거실이 진실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내가 따뜻한 곳에서 느긋하게 앉아 있는 게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다.” 눈보라 치는 세상에서 나 혼자 아늑해도 될까, 서경식은 묻는다. “나는 항상 지금의 내 생활이 어쩐지 모조품 같고 그 바깥에 위험으로 가득 찬 진실이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칼럼의 제목은 ‘눈보라처럼 진실이 몰아치다’였다.
이 칼럼을 읽고 독자가 편지를 보냈다. “저는 양심적 병역거부로 수감 중인 젊은이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은국이라고 밝혔다. “지금 저는 모조품과 같은 평온하고 안전한 삶을 거부하고 위험으로 가득 찬 ‘바깥’에 있다는 사실이 만족스럽습니다. … 저에게 이 감옥은 진실의 세계입니다.” 같은 해 12월에 ‘한겨레를 읽고’ 지면에 실렸다. 며칠 후 서경식은 ‘답장’을 썼다. 앞서의 ‘조선인 아이’ 이야기를 다시 꺼내며 부끄러워했다. “나는 … 안전지대에 있었고 그 안전지대에서 뛰쳐나가지도 못한 채 이 나이가 되도록 살아왔다. 그런 내 글에서 은국님이 격려를 받았다는 건 어딘가 잘못돼 있다. 나야말로 그한테서 격려받은 것이며, 그 앞에서 부끄러워해야 한다.”
2009년 1월에 용산참사가 일어났다. 황현산은 12월에 칼럼을 썼다. “이제 1년이 다 되어가니 혹시라도 잊은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가 용산참사를 잊는다면 “그때부터 사람들은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다.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사람이 불타면, 사람이 어이없이 죽으면, 사람들은 자기가 그 사람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만 여길 것이다. 그러고는 내일이라도 자신이 그 사람이 될까봐 저마다 몸서리치며 잠자리에 누울 것이다. 그것을 정의라고, 평화라고 부르는 세상이 올 것이다.” 칼럼의 제목은 ‘그 세상의 이름은 무엇일까’였다.
그해 2월에 김선주는 용산참사를 떠올리며 이렇게 썼다. “글쓰기가 이처럼 힘든 시대는 내 생전에 없었던 것 같다. 평생 글 쓰는 것을 업으로 삼아왔는데도 글쓰기가 몸이 오그라들 정도로 힘이 든다. 몇 년 전에 글이 세상을 한 뼘도 바꾸지 못하는데 글은 왜 쓰는가라는 탄식을 한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새파란 후배가 글이 언제 세상을 바꾼 적이 있나요, 그저 위안을 줄 뿐이지요, 시들하게 답했다. 당시에도 아연했지만 그때의 탄식이 사치로 느껴질 만큼 지금은 글쓰기의 무력함을 절감한다.”
김선주는 외부 필진 출신이 아니다. 언론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 해직됐고 한겨레신문 창간에 참여했다. “창간호가 나가자마자 … 찬사와 격려, 비난 등이 전화와 편지를 통해 쏟아져 들어왔다.” 창간 직후인 1988년 5월에 쓴 기사다. 옛날 신문에 익숙하던 “40대 후반의 독자층”은 한겨레가 읽기 불편하다고 했다. 그때까지 “우리나라에 한글 가로짜기로 된 일간신문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조적으로 80살이 넘었다는 한 독자가 ‘나이 먹은 사람이라 읽기가 어렵다. 그러나 파고다공원 근처에서 젊은 사람들이 한겨레신문을 열심히 읽는 것을 보고 참 잘한 일이라고 느꼈다’라는 전화를 주었을 때 한글 가로쓰기는 올바른 선택이었다는 확신을 얻었다”고 썼다.
33년이 지났다. 1988년의 젊은 독자가 지금의 40대, 50대다. 2009년에 서경식은 썼다. “글을 쓴다는 것은 빈 병에 편지를 넣어 바다에 띄워 보내는 것과 같은, 또는 어둠을 향해 돌을 던지는 것과 같은 행위다. 누군가에게 과연 가닿을지, 반향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채 그냥 알지 못하는 독자를 향해 말하기를 계속하는 것이다.” 2021년의 젊은 사람은 종이 신문을 잘 읽지 않는다고 한다. 오늘날 글은 세상을 바꿀 수 있나.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한겨레 아카이브 프로젝트] 시간의 극장 - 제29화 한겨레 역대 칼럼니스트 1편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79350.html
▶ 해설자인 김태권 작가는 만화가입니다. 글도 쓰고 일러스트도 그립니다. 개그도 연구합니다. 요즘은 주로 관악산 자락에서 두 아이를 떠메고 다니며 시간을 보냅니다.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와 <히틀러의 성공시대> 등의 만화책을 그렸고, <불편한 미술관>과 <에라스뮈스와 친구들> <먹히는 자에 대한 예의> 등을 썼습니다.
▶ 팩트스토리는 전문직·실화 소재 웹소설·웹툰 및 르포 논픽션 기획사입니다. 저널리즘 바깥으로 확장하는 실화를 추구합니다.
<한겨레>가 지령 1만호를 맞아 ‘시간의 극장-한겨레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선보입니다. 33년 사진, 기사, 지면 이미지 등의 아카이브를 활용하여, 중요 사건과 인물을 현대사 콘텐츠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입니다. 해당 주제를 잘 아는 해설자가 관련 한겨레 사진과 기사를 선정하고 독자에게 해설합니다. 소개된 적 없는 비컷(B-cut) 사진도 발굴하여 공개합니다. 르포, 전문직 소재 웹소설 기획사 팩트스토리가 기획하고 한겨레와 공동으로 제작합니다. 시즌3인 25~36화는 주로 기업·기업인 이야기로 꾸몄습니다. 주간 연재.
[알림] 한겨레 칼럼니스트를 공모합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78326.html
리영희, 정운영, 조영래, 박완서…. 더는 만날 수 없지만 영영 헤어질 수 없는 지성의 이름입니다. 시대의 죽비가 되고, 웃음이, 눈물이 되었던 <한겨레> 칼럼 필자들입니다. 오늘은 또 다른 필자들이 그 자리를 이고 집니다. 이제 <한겨레>는 언론 사상 처음으로 칼럼니스트를 공모합니다. 더 다양한 통찰과 감성을 발굴해 독자와 연결짓길 희망합니다. 희망이 절망에게, 슬픔이 기쁨에게, 과거가 현재에게, 꿈이 꿈에게, 그래서 우리가 우리에게 말을 겁니다. ‘한칼’, 시작합니다. 함께해주세요.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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