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권남용과 제 식구 감싸기 사이..재판 개입 혐의 두 법관의 "후회" ["존경하는 재판장님" 사법농단, 법정의 기록 (34)]
[경향신문]
이민걸 전 기획조정실장 “타성”
이규진 전 양형위 상임위원 “교만”
최후진술서 반성적 태도 보여
1심서 각각 징역 2년6개월 구형
더불어민주당이 사법농단에 연루된 법관 탄핵 추진을 공식화한 지난달 28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 508호 법정에서는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과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에 대한 1심 마지막 재판이 열렸다. 2019년 3월 검찰이 공소를 제기한 지 1년11개월 만이다.
두 사람 모두 사법농단 사건이 불거진 뒤 정직 6개월 징계를 받았다. 이후 이들은 30년간 입었던 법복을 벗게 됐다. 일선 법원의 재판에 개입한 혐의 등에 관해 내내 무죄를 주장해왔는데, 최후진술의 기회를 얻은 둘의 입에선 ‘오만’ ‘교만’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저에게 주어진 역할과 임무를 제대로 행하지 못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만한 마음과 타성에 젖어 놓쳐 버렸던 일들이 후회스럽고 마음이 아팠습니다.”(이 전 실장) “검찰 조사보다 재판 과정이 더 힘겨웠고 제 인생에서 가장 부끄러웠던 시간이었습니다. (…) 개인적으로 법관으로 봉직하는 30년 동안 제가 얼마나 교만했는지 새삼 깨닫는 기회가 됐습니다.”(이 전 상임위원)
앞선 4건의 사법농단 관련 사건은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지난달 29일 서울고등법원 형사8부(재판장 이균용)는 신광렬 판사 등의 2심에서도 무죄를 선고했다. 법관들의 성찰과 반성으로 형사처벌에 대한 면제를 정당화할 수 있을까. 2심 재판부는 “형사처벌과는 별개로 법원 모두가 반성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전 실장과 이 전 상임위원에 대한 법원 판단은 오는 18일 나온다.
■법원 감싸기냐, 과잉 형사범죄화냐
사법농단 4건 1심 무죄 이어
신광렬 판사 무죄 준 2심 재판부
“처벌 별개로 법원 모두가 반성”
형사재판은 피고인 행위가 형법에 정해진 범죄 성립요건에 맞아떨어지는지를 세세하게 따지는 과정이자 국가가 어떤 행위를 범죄로 처벌할 것인지의 경계를 정하는 일이다. 그간 이뤄진 공판 40여회, 변론 수백시간을 이날 결심 절차 6시간에 압축한 검찰과 피고인들이 근본적으로 부딪친 대목도 그 부분이었다. 물건을 훔쳤을 때 절도죄로 처벌하고, 사람을 죽였을 때 살인죄로 처벌하는 데에는 이론이 없지만 사법행정권자의 법관 독립 침해를 과연 국가가 범죄(사법농단 사건에서는 직권남용죄)로 처벌할 것인지에 관해서는 전례가 없다. 검찰은 처벌하지 않는다면 법원이 법원을 스스로 감싸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피고인들은 처벌하면 향후 검찰 등 정부 권력기관에 의해 악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최근 직권남용죄는 질식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지금 공권력의 무법 활보를 통제할 대응 수단을 잃어가고 있습니다.”(남철우 검사) 검찰은 최종 의견 진술에서 사법농단 수사 이후 법원이 갑자기 직권남용죄를 엄격히 따지면서 잇따라 무죄를 선고한다고 지적했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국민주권주의에 따라 법관도 성역일 수 없다면서, 직권남용 범죄에 관대한 법원의 태도를 ‘또 하나의 사법농단’ ‘법 파괴’라고 표현했다. “구체적 사건을 통해 법을 발견하고 법의 존재이유를 고찰해 법을 살아 있게 만들어야 할 법관의 헌법적 책무를 방기한 것”이라고 했다.
피고인 측은 과잉 형사범죄화를 우려했다. 피고인들 행위에 일부 부적절한 부분이 있다고 할지라도 직권남용죄를 적용해 처벌하기 시작하면, 권력에 의해 직권남용죄가 남용될 위험이 있다는 논리다. 법관도 잘못에 책임은 져야 하지만 모든 것을 직권남용죄로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국민주권주의에 대한 국민의 열망은 공직자에 대해 공무의 적절한 수행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변호인으로서는 의문이 생깁니다. 공무의 적정한 수행의 감독자가 수사기관, 기소기관인 검찰이 담당하는 게 맞을까요? 검찰이 담당하지 말라는 것은 아닌데, 검찰이 사실상 독점하는 것이 온당할까 하는 깊은 우려를 가지고 있습니다.”(이 전 실장 측 민병훈 변호사)
사법농단 사건은 법원 내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증인의 법정 증언 신빙성이란 문제도 낳았다. 피고인도 증인도 모두 전·현직 법관이기 때문이다. 일부 증인들은 검찰에서 한 진술을 법정에서 바꿨다. 검찰에서 수사 압박을 받던 상황에서 사실관계를 오인해 진술했다거나 검찰의 진술조서에 자신이 말한 뉘앙스대로 기재되지 않았다고 했다. 상당수의 질문에 기억나지 않는다는 태도로 일관한 증인도 여럿 있다.
검찰은 검찰 진술에 신빙성이 높다고 했다. 검찰은 “조서 열람 시간이 조사 시간과 맞먹을 정도였고, 검사들이 ‘첨삭 지도’를 받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피조사자가 요구한) 수정사항을 다 반영했다”며 법률 전문가인 증인들이 검찰에서 허투루 진술했을 리 없다고 했다. 반면 검찰은 법정 증언에 대해서는 “증인들 대부분이 피고인들과 함께 근무하던 동료 관계”라며 “동료와 시비하기보다는 모호한 뉘앙스로 일관했고, 단정적인 표현은 주저했다”고 했다. 이어 “법관 내부사회의 평판과 낙인을 우려해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법관 증인들도 있었다”며 “법정 증언이라고 해서 반드시 검찰 진술보다 신빙성이 높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피고인 측은 법정 증언에 신빙성이 있다고 했다. 민 변호사는 “수십명의 법관이 기소도, 불기소도 아닌 상태로 2년여간 지속되고 있다면 그 사람들의 진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느냐”고 따졌다. 검찰이 증인인 법관들을 형사처분할지 명확히 결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증인이 검찰에 유리한 증언을 하지 않으면 기소될 수 있다는 걱정에 휩싸여 제대로 증언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배당 논란 법원장 “배당, 수석부장 권한”
심상철 전 법원장 피고인 신문에선
통진당 사건 배당 개입 관련
“이규진 상임위원이 요청” 주장
심 전 법원장은 징역 1년 구형
결심 절차에 앞서 이날 재판에서는 심상철 전 서울고등법원장에 대한 피고인신문이 이뤄졌다. 심 전 원장은 2015년 통합진보당 관련 행정소송을 특정 재판부에 배당하기 위해 원칙에 어긋나게 사건번호를 수집하고, 부여하도록 지시한 혐의(직권남용)를 받고 있다.
당초 검찰은 심 전 원장이 법원행정처 요청을 받고 사건 배당에 개입했다면서도 ‘누가’ 요청했는지는 공소장에 적시하지 않았다. 심 전 원장은 피고인신문에서 그 사람이 이 전 상임위원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법원행정처 요청 사실은 이종석 당시 서울고등법원 수석부장(현 헌법재판관)도 알고 있던 내용이라고 했다. 이 전 상임위원과 이 재판관은 자신들은 그런 기억이 없다는 입장이라 심 전 원장 말과 배치된다.
“2015년 12월 초순 법원행정처 관계자, 정확히는 이규진으로부터 ‘법원행정처에서 통진당 국회의원 행정소송 사건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으니 해당 사건이 올라오면 김광태 재판부에 배당해달라’는 요구를 받은 사실이 있습니까?”(김경완 검사)
“(이 전 상임위원에게) 그런 취지의 요청을 받은 사실이 있습니다.”(심 전 원장)
(…) “법원행정처 관계자로부터 요구받고 다음날 즈음 이종석이 찾아와 관련된 이야기를 했다고 말씀하시는데, 어디까지 논의를 했다는 것인가요?”(김 검사)
“저는 수석부장에게 이야기한 일이 없는데, 수석부장이 제 방에 와서 먼저 통진당 사건 배당 문제를 이야기했습니다. 결론을 낸 것은 아니지만 (저는) ‘나도 그런 요청을 받아서 알고 있다, 두고 봅시다’ 식으로 말했습니다. 특례배당으로 간다는 점에 대해 사실상 암묵적인 협의가 이뤄졌다고 인식했습니다.”(심 전 원장)
특례배당은 어느 재판부에서 심리할지 추첨으로 결정하는 자동배당과 달리 특정 재판부를 지정하는 방식이다. 2009년 신영철 전 대법관의 촛불집회 사건 몰아주기 배당 논란 이후 예규가 개정돼 특례배당을 축소하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자동배당하도록 했지만 심 전 원장은 예규 개정을 “몰랐다”고 했다. 심 전 원장은 법원행정처 요청이 부적절하다고 생각은 했다면서도 ‘신속하게 사건을 처리하는 재판부를 원하나보다’ 정도로만 이해했다고 했다.
심 전 원장은 사건 배당 권한은 법원장이 아니라 수석부장의 것이라고도 주장했다. 예규에 법원장 권한으로 돼 있더라도 실질적으로 수석부장이 배당 업무를 담당하고, 법원장 사무실 내 컴퓨터에는 배당 프로그램이 깔려 있지도 않다고 했다. 심 전 원장은 최후진술에서 “평생 법관이라는 자긍심을 갖고 살아온 제가 배당 개입을 한 사실이 없다는 것을 밝혀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린다”고 재판부에 호소했다.
검찰은 이규진 전 상임위원과 이민걸 전 기획조정실장에게는 각각 징역 2년6개월, 심 전 원장에게는 징역 1년을 구형했다. 앞서 무죄가 선고된 사건들은 피고인들이 법원행정처 근무자가 아니었지만 이 전 상임위원은 양형위 소속으로 법원행정처 업무를 처리했고, 이 전 실장은 법원행정처 소속이었다. 대법원장의 사법행정권 행사에 있어서 법원행정처의 역할과 한계가 무엇인지, 형사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법원 판단이 이 사건에서 나오게 된다.
법관 독립 침해가 문제돼 열린 이 재판에서 이 전 실장은 마지막으로 법관 독립을 명시한 헌법 제103조를 말했다. “이 사건에 대해 헌법과 법률에 의해서 양심에 따라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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