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은전 칼럼] 짐작과는 다른 일들

한겨레 2021. 2. 1.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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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전 칼럼]명애의 인생은 오직 야학을 만나던 마흔일곱에 시작되는 것이다. 그의 이야기엔 놀라운 생기와 빛깔이 부여되었다. "너무너무 좋았어요. 지금도 야학 이야기만 하면 소름이 돋을 정도로." 인생이 시작되었다는 건 일상이 열렸다는 뜻이고 그건 다름 아닌 기쁨과 슬픔을 느끼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는 더 이상 아름다운 풍경을 구경하러 가지 않는다.

홍은전

요즘 나는 장애인운동 활동가들을 인터뷰하고 있다. 최근에 만난 사람은 대구 질라라비 장애인야학의 교장 박명애이다. 근사한 은빛 머리에 아름다운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67살의 노장 활동가가 무대에서 연설하는 모습을 나는 정말 사랑한다. 중증장애인으로 살며 싸운다는 것에 대해 박명애처럼 잘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느 날 집회에서 그는 말했다. “우리는 밥을 많이 먹으면 화장실을 많이 갈까 봐 마음을 졸입니다. 서울에 투쟁하러 올 때면 며칠 전부터 물도 적게 먹고 밥도 적게 먹습니다. 그럴 때마다 어찌나 물도 더 먹고 싶고 밥도 더 먹고 싶어지는지요.”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조금 숙연해졌다. 다른 몸을 가진 동지들이 그런 투쟁을 하고 있다는 걸 짐작해본 적도 없었다.

명애는 학교에 가지 못하고 집 안에서만 생활했다. 47살에 장애인야학을 만나면서 세상 밖으로 처음 나왔고 53살에 세상과의 투쟁을 시작해 줄곧 이 운동의 맨 앞에서 싸워왔다. 어느 날 명애는 뜨거운 것을 삼키며 이렇게 외쳤다. “아버지는 딸이 다칠까, 남에게 폐를 끼칠까, 내가 누군가의 등에 업혀서 집 밖으로 나가는 걸 아주 싫어하셨습니다. 옷에 흙을 묻히더라도 세상 밖으로 기어 나오지 못하고 방 안에서만 보낸 세월이 한이 됩니다. 지난날의 저처럼 망설이는 분들에게 용기를 내라고, 기어서라도 나오면 이 세상은 반드시 바뀐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나는 궁금했다. 이렇게 생생한 감정과 커다란 용기를 가진 사람이 어떻게 47년 동안 방 안에서만 살 수 있었을까. 그건 대체 무슨 뜻일까.

짐작과 달리 명애는 그 시간에 대해 아주 덤덤하게 말했다. “나는 그냥 학교에 안 가는 건가 보다 했어요. 심심하다는 생각도 없었어요. 오히려 밖에 나가는 게 두려웠죠.” 집 안에서의 삶에도 생각보다 많은 일이 일어났다. 명애는 같은 종교를 가진 남편을 만나 서른살에 결혼했고 두 아이를 낳았다. 텔레비전만 보며 살았을 거라는 나의 짐작이 가장 결정적으로 빗나간 것은 그의 집 책장에 꽂힌 앨범을 열었을 때였다. 젊은 명애는 그 시대를 산 평범한 부부처럼 아이들을 데리고 제주도, 설악산, 해운대 같은 곳을 다녔고 남편은 그 특별한 날들을 빠짐없이 기록해 두었다. 장애인 편의시설이라곤 전무하던 시절이었으므로 그것은 명애에 대한 남편의 비범한 사랑의 증거처럼 보였다.

앨범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연신 호들갑스럽게 놀라는 나를 보며 명애가 말했다. “그건 남편의 의지였지, 내 의지가 아니었어요.” 너의 짐작처럼 그게 그렇게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는 듯한 투였다. 그러고 보니 사진 속 젊은 명애에겐 명애를 명애이게 하는 가장 중요한 무언가가 빠진 것 같았다. “너는 학교에 가지 말고 엄마랑 놀자” 하던 말을 그냥 받아들였던 것처럼, “나중에 아버지 죽을 때 너도 같이 가자” 하던 말에 왜 그래야 하는지 묻지 못했던 것처럼,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보러 가자” 했던 남편의 말도 어쩌면 명애에겐 그저 따라야 할 무엇이었는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그것은 명애가 말하는 본격적인 인생이 시작되기 전의 일이었다.

명애의 인생은 오직 야학을 만나던 마흔일곱에 시작되는 것이다. 그의 이야기엔 놀라운 생기와 빛깔이 부여되었다. “너무너무 좋았어요. 지금도 야학 이야기만 하면 소름이 돋을 정도로”라며 그가 ‘너무너무’를 남발했다. 스무살 남짓한 교사들이 서투른 솜씨로 매일 해주는 밥도 너무 맛있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줄 알았던 자신이 손이 불편한 누군가에게 밥을 떠먹여 줄 수 있다는 것도 너무 좋았다. 바람에 머리가 날리는 것도 너무 좋았고 비 오는 날 우산을 쓰고 나가는 것도 너무 좋았다. 인생이 시작되었다는 건 일상이 열렸다는 뜻이고 그건 다름 아닌 기쁨과 슬픔을 느끼는 일인지도 모른다. 억울한 것도 모르고 살았던 지난 삶이 얼마나 억울한지 명애가 가슴을 치며 증언할 때 무대 위의 그도 울고 무대 아래 사람들도 함께 울었다.

명애는 말했다. “그때가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습니다. 가슴 속에 있던 말을 할 수 있어서 투쟁장에 있는 하루하루가 행복했습니다.” 자기 고통의 주체가 되어야만 기쁨도 희열도 선명하게 움켜쥘 수 있다고 명애의 삶이 말하는 것 같다. 그는 더 이상 아름다운 풍경을 구경하러 가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더 많은 일상을 원한다”고 외치며 아스팔트 바닥을 맨몸으로 기어가는 투쟁을 벌이고 노숙을 하고 밥을 굶고 오줌을 참는다. 사람들의 삶은 언제나 짐작과 다르고 짐작보다 더 복잡하고 미묘해서 고유하게 근사하다.

작가·인권 동물권 기록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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