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노력해도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장재진 2021. 2. 1.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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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소통의 의미에 대해 질문하는 창작극 '비프'
연극 '비프'는 교사 정동우(주석태·맨 왼쪽)와 학생 진세희(유유진·가운데), 유진(김아석) 등의 대화 및 행동을 통해 진정한 소통의 가능성에 대해 의문하는 작품이다. 주다컬처 제공

소통에 관한 은연한 편견은 '소통을 하면 남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일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이 이해의 부족에서 시작된다고 전제할 때 소통은 갈등을 예방하는 백신이자 치료제가 된다. 하지만 부단한 소통에도 커져가는 관계의 균열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지난 12월 5일 초연된 창작극 '비프(Beep)'는 그 물음을 던지는 작품이다.

이야기는 도시 외곽에 있는 어느 고등학교에서 이뤄진다. 방학을 틈 타 영어 연극 공연을 준비하는 학생들과 연극반 지도교사 정동우, 문학 선생님 윤영준이 극을 끌어간다. 공교롭게도 이들이 무대에 올리려는 연극은 '리처드 맥비프'라는 제목의 작품이다.

얼핏 극 제목과 비슷한, '리처드 맥비프'라는 연극은 실화에서 비롯됐다. 2007년 미국 사회를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버지니아 공대 총기난사 사건의 가해자 조승희가 대학생 시절 쓴 극본 '리처드 맥비프'가 바로 그것. 살인자의 연극은 현실에서도 영화, 연극으로 제작되며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연극 '비프'에서 선생님과 학생들은 진심을 다해 대화에 나서지만 끝내 상대를 완전히 이해하는 데 실패한다. 주다컬처 제공

'리처드 맥비프'가 극으로 소환된 이유는 작가 개인의 경험과 관계가 깊다. '비프'를 쓴 신승원 작가는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프랑스에 머물던 2015년 파리 테러 사건을 접했는데, 그때의 경험이 테러와 총기사고, 가해자의 범죄 동기에 대해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극에는 조승희의 범죄를 연상케 만드는 연출들이 나오지만, 그렇다고 '비프'가 조승희 사건 자체를 언급하기 위해 쓰인 것은 아니다. 조승희의 '리처드 맥비프'는 소통 문제를 다루는 하나의 극적 장치로 볼 수 있다.

'비프'에서 연극반 소속 모범생 진세희는 어느 순간 "(살인자인) 조승희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며 혼란스러워 한다. 동우는 그런 세희의 고민을 진심으로 경청하고, 담임인 영준도 학생을 보듬지만 세희의 속내를 전적으로 이해하는 데는 실패한다. 세희의 친구인 지수나 유진도 마찬가지다. 신 작가는 "각자 최선을 다해 대화에 나서지만 결국 엇나가고 마는데, 이를 통해 '진짜 소통이라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고 했다.

극중 인물들은 위기에 놓여 도움이 필요할 때 연극의 제목을 줄인 '맥비프'라는 암호를 외치기로 약속한다. 암호를 들은 이가 도움의 손길을 건네 주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세희가 신호를 보냈을 때 선생님은 그것을 포착하지 못한다. 신 작가는 "우리 모두는 이해할 수 없는 분노의 시발점을 갖고 있고, 각자의 ‘맥비프’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가 쓴 극의 원제목은 '왓 이즈 유어 맥비프(What is your McBeef)'였다.

분명 소통이 이뤄지고 있지만 불안감이 맴도는 상황들마다 핸드폰 벨소리나 알람, 기숙사 초인종 소리 등 다양한 효과음이 귀를 때린다. 일상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소음들인데 긴장감을 자아내는 것은 이 소리들이 일종의 위험신호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연극 제목인 '비프'는 영어로 '삐~'하는 경보음을 뜻한다.

극중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의 문양에는 저울 옆으로 '소통·평등·존중'을 뜻하는 라틴어 '코무니카티움''에쿠움' '프레티움'이 라틴어로 쓰여 있다. 주다컬처 제공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의 문양에는 양팔저울과 함께 교훈을 의미하는 3개의 라틴어 '에쿠움(평등)' '프레티움(존중)' '코무니카티움(소통)'이 쓰여 있다. 이 중 '소통'은 극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와 맞닿아 있다. 동성애자인 동우와 영준의 비밀 연애를 통해 차별과 평등의 문제를, 선생님을 함부로 대하는 학생 유진을 보면서 타인에 대한 존중의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

약속한 시간에 나타나지 않는 세희와 단발의 총소리. 불현듯 도출되는 결말은 다양한 상상의 여지를 남긴다. 객석을 떠난 뒤에도 여운은 쉬이 가시지 않는다. 극의 곳곳에 비유와 상징이 넘치는 탓에 곱씹을 거리가 많은 탓이다. 초연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비프'를 여러 차례 관람한 이가 적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묵직하고, 보는 이에 따라 난해한 이 극의 당초 소구 대상은 의외로 10대였다. 신 작가는 "그 누구보다 소통의 문제를 뼛속 깊이 느끼는 세대"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실제로 '비프'는 14세 이상 관람가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되면서 개막 이틀 만에 5주간 강제 휴식에 들어갔던 '비프'는 최근 연장 공연을 결정했다. 다음달 21일까지 서울 동숭동 드림아트센터.

장재진 기자 blan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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