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파일러의 세계] 여자는 왜 학대하는 남자를 떠나지 못했나
<12> 송파 데이트폭력 사건
사회 교류 문제 없던 평범한 여성
연애 처음부터 심한 폭행에 공포
학대 지속되며 심리 지배 당해
'매맞는 여성증후군'과 유사 밝혀
편집자주
범죄 드라마나 영화에서 '초능력자'처럼 등장해 범죄자의 감정선을 무너뜨리는 프로파일러. 그러나 실제 프로파일러는 끊임없이 범죄자 심리나 행동패턴을 분석해 범행의 이유를 찾는 나침반 역할을 합니다. 한국일보는 격주 월요일마다 범죄 현장 뒤에서 치열한 두뇌싸움을 벌이는 프로파일러의 세계를 조명합니다.
경찰관 앞에 선 두 남녀의 말이 완전히 엇갈렸다. 남자 A(33)씨는 합의 하에 관계를 맺었다고 말했지만, 여자 B(28)씨는 성적 학대를 당했다고 호소했다.
은밀한 연인 관계에서 발생한 학대 의혹 사건이었다. 목격자도 폐쇄회로(CC)TV도 없어, 피해 상황은 오로지 여자 진술에 의존해야 했다. 경찰은 누구의 말을 신뢰하고, 어느 쪽의 말을 의심하며, 어떤 경로를 따라 진실에 이르러야 했을까.
사귀자마자 돌변한 남자
둘의 관계는 2019년 여름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앱)을 통해 시작됐다. 앱에서 대화할 때까진 아무런 이상 조짐이 보이지 않았고, 둘은 이내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
그러나 교제 일주일 만에 A씨의 심한 폭언과 폭행이 시작됐다는 게 B씨의 주장이었다. 모욕적인 욕설은 기본. 남자는 여자에게 나체 동영상을 요구했고 강압적인 성관계를 계속했다고 한다. 동영상을 빌미로 협박해 돈을 뜯는 짓까지 서슴지 않았다.
성폭행 사건 이후에도, 둘은 관계를 지속했다. 학대 당하면서도 연인 관계를 계속한다고? 언뜻 봐서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는 이 지점을, 남자는 파고 들었다. A씨는 경찰 조사에서 성폭행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정황상 성폭행까지 당하는 상황에서 계속 사귈 사람이 어디 있냐는 것이 A씨의 논리였다.
B씨는 왜 이 위험한 연애를 지속했던 것일까. 선뜻 풀리지 않는 숙제 앞에서, 사건을 수사하던 서울 송파경찰서는 서울경찰청 과학수사과 범죄분석팀에 지원을 요청했다. 프로파일링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세 명의 프로파일러가 송파서로 향했다.
프로파일러 앞에선 고분고분한 남자
송파서로 달려간 김성혜(40)·이상경(38) 경위와 박준희(36) 경장은 가해자 A씨를 만났다. 프로파일러들의 눈에 A씨는 여느 30대 남성과 다를 바가 없었다고 한다. "길에서 항상 볼 수 있을 정도로 평범한 사람"이었다. 가학적인 폭력을 행사한 사람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프로파일러 앞에 선 A씨는 고분고분했다. 프로파일러들은 A씨가 좋은 사람으로 비춰지기 위해 의도적으로 '인상 관리'를 하고 있다고 봤다. 인상 관리는 다른 사람이 느끼는 자신의 이미지에 영향을 끼치려는 개인의 의식적·무의식적 행동을 의미한다. 아부를 한다거나 동정을 구하고, 거래를 시도한다거나 변명을 하는 것 등이 대표적이다.
A씨는 성폭행을 제외한 범죄사실(폭행, 협박, 강요, 공갈)은 대부분 시인했다. 그러나 행위 자체에 대해서만 인정할 뿐 행위의 책임을 피해자였던 B씨에게 떠넘겼다. B씨의 거짓말 때문에 폭행을 시작했다, 여자의 거짓말이 반복되다보니 강도가 점점 세졌다, B씨가 동영상을 전송하고 돈을 보낸 것은 나와 헤어지고 싶지 않아서다, 이런 식의 진술이 이어졌다. B씨가 느꼈을 고통과 두려움에 대해 공감하기는커녕 자기 합리화를 하기 바빴다.
여자는 왜 남자에게 '지배' 당했나
고분고분한 가해자와 달리 피해자 B씨는 처음부터 잔뜩 위축돼 있었다. 말할 때도 작은 목소리였고, 시선은 주로 바닥을 향했다. 외견상 그렇게 평범해 보이는 A씨를, B씨는 진심으로 두려워했다. A씨는 B씨에게 "나는 집안이 좋아 네가 신고해 봤자 풀려난다"는 말을 반복해, B씨가 신고를 해도 소용 없다는 생각을 심어주려 했다고 한다. B씨는 이미 한 차례 고소를 취하한 적이 있었고, 프로파일러들은 B씨가 위축되지 않고 진실을 말할 수 있도록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했다.
B씨는 원래 이렇게 소극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A씨와의 관계만 아니라면 평소 대인관계가 원만했고,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는 것을 두려워하는 편도 아니었다고 한다. 과거 연애에서도 특별한 문제를 겪은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유독 A씨에게만은 한 마디도 대꾸하거나 저항할 수 없었다. 처음에 "안 그러겠지"하고 넘어가다보니 점점 더 강도가 세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사회적 교류에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이 특정인에게만 유독 기를 펴지 못하는 상태. 프로파일러들은 신체적, 성적 학대가 지속되면서 B씨가 A씨에게 심리적으로 지배 당한 상태라고 봤다. 이상경 경위는 "평범한 여성이었는데 심각한 가해를 당하다보니까 굉장히 많이 위축되고 소극적이게 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B씨가 A씨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것도, A씨의 요구에 응한 것 역시나, '두려움'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해 보니 퍼즐이 풀렸다. 김성혜 경위는 "피해자가 처음부터 폭행을 심하게 당해 공포감이 컸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무자비한 폭행과 폭언, 성적 학대에 두려움을 느낀 피해자가 자발적으로 A씨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복종했다는 것이다. 프로파일러들은 "B씨의 모습은 지속적으로 폭력에 노출돼 나타날 수 있는 '매맞는 여성 증후군'의 특성과 유사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매맞는 여성 증후군은 데이트폭력, 가정폭력 등 상습 폭력에 노출된 피해자가 '긴장→구타→화해'가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가해자와 계속 관계를 유지하는 모습을 말한다. 피해자가 폭력을 당하면서도 가해자를 떠나지 않고 계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개념이다.
피해자 심리 분석, 법적 증거로
프로파일러들의 이런 설명은 '지속된 가해 상황에서도 이어진 연인 관계'의 궁금증을 풀어 줄 수 있었다. 피해자 심리 분석이 담긴 보고서는 A씨의 1심 재판에서 유죄를 입증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A씨는 법정에서 "B씨와 보통의 연인과 다를 바 없이 메신저 대화를 주고받았고, 경찰 신고가 이뤄지지 않았다"며 성폭행 혐의를 부인했다. 그러나 분석 보고서를 증거로 채택한 1심 재판부는 프로파일러들과 마찬가지로 B씨가 두려움으로 인해 A씨의 요구대로 행동했고, 가학 행위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1심 재판부는 "피고인이 피해자의 나체 사진이나 동영상 등을 보관해 피해자로서는 피고인의 폭행이나 보복, 나체 사진 등의 유포가 두려워서 도망을 가거나 신고할 생각을 쉽사리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며 "같은 이유로 일반 연인관계에서 쓸 법한 표현을 일부 사용해 메신저 대화에 응했다"고 판단했다. 1심은 A씨에게 징역 7년을 선고했다.
더 나아가 2심 재판부는 판결문에 피해자 심리 분석 내용의 일부를 적시하기도 했다. 프로파일러들이 B씨의 모습을 '매맞는 여성 증후군'과 비슷하다고 분석한 부분이 재판부 판단의 중요 논거로 쓰인 것이다. 2심은 징역 8년을 선고했다.
피해자는 피고인으로부터 신체적, 언어적 폭력을 당해 두려움을 느끼게 됐고, 이로인해 피해자는 자발적으로 피고인의 비위를 맞추고 복종을 해 주종관계가 형성됐다.
B씨 심리분석 결과 일부
A씨는 "교제하는 동안 남자가 비속어를 사용했음에도 B씨가 이를 수용하고 교제를 지속했다"며 "협박에도 고의가 없었다"고 항변했으나 2심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2심 재판부는 피해자 진술과 프로파일러 분석 결과를 종합해 "B씨는 A씨로부터 폭행 또는 협박을 당해 두려움에 빠져 있는 상태에서 비위를 맞추기 위해 동영상을 전송한 것이지, B씨가 폭력적인 성향을 수용했다거나 A씨의 언동이 공포심을 일으킬 만한 것이 아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짚었다.
프로파일링 보고서가 재판부의 유죄 판단 근거 중 하나로 활용되는 것은 드문 일이다. 프로파일러들은 이번 사건에서처럼 심리 분석 결과가 수사나 판결에 도움이 될 때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김성혜 경위는 "판결문에 언급될 때나 형사들이 사건에 도움이 된다고 피드백을 줄 때 뿌듯하다"고 말했다.
학대로 인한 심리적 지배 극복 방법
① 폭행에는 처벌이 따라야 한다는 점을 인식한다 ② '이러다 말겠지'라는 생각을 버린다 ③ 경미한 폭행이 시작했을 때 신고한다 ④ 가족, 친구, 이웃 등 주변에 도움을 요청한다 ⑤ 주변에서도 이상 징후를 감지해 경찰 등에 신고한다
윤한슬 기자 1seu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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