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여기까지만 하시죠”

김은중 기자 2021. 2. 1.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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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용 외교부 장관 후보자가 지난 1월 2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 인근 사무실로 출근하며 기자들 질문을 받고있다. /뉴시스

지난 28일 출근길의 정의용 외교부 장관 후보자가 카메라 앞에 섰다.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그의 메시지를 듣고 싶다는 기자단의 항의(?)에 따라 준비된 자리. 정 후보자는 “한미동맹이 우리 외교 관계의 근간”이라며 여섯 문장을 읊고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폭설을 맞으며 기다리던 기자들이 준비한 질문들은 그렇게 묵살됐다. 내정 직후였던 1주일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질문이 쇄도했지만 “여기까지만 하자”는 수행 직원의 답변에 가로막혔다. 조 바이든 행정부 출범 후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안보 지형이 격변하고 있는데 국민들은 외교 수장의 비책(祕策)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K방역 홍보를 위한 외신 인터뷰에는 열심이었던 강경화 장관도 비슷하다. 코로나 확산의 여파이기는 하지만, 지난해 7월 이후 기자 간담회를 열지 않았다.

정 후보자 출근 몇 시간 전, 그의 카운터파트인 토니 블링컨 미 신임 국무장관은 부임 후 첫 기자회견을 주재했다. 모두 발언을 자청하더니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사실은 나도 기자 출신이었다”며 “우리가 하는 일을 미국인들과 전 세계에 알리는 여러분의 직업(profession)을 깊게 존중한다”고 입을 뗐다. 이어 “까다로운 질문을 던지는 당신들 때문에 책임감을 느끼고, 더 잘하자고 스스로를 다잡는 계기가 된다”고 했다. 블링컨은 이날 20분 동안 10개의 질문을 받아 대답했다.

“기자회견만이 국민 소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대통령 때문일까. 이번 정부 들어 유독 ‘날것 그대로의 질문’에 대한 회피가 두드러지는 모습이다. 기자는 작년 6월부터 외교부에 출입하면서 단 한 번도 장관에게 직접 질문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기회 박탈에 그치면 다행이다. 질문자를 쏘아붙이거나 공격하는 일도 잦다. 공당의 대표가 기자의 질문에 “버릇 없다”고 하거나, 대변인이 “이러니 기레기 소리를 듣는 것”이라며 훈계한다.

언론이 질문하는 건 사리사욕을 채우거나 상대를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다. 민주주의 나라에서 국민들이 투표로 선출한 지도자들의 생각을 속속들이 알아야 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조차도 언쟁을 벌일지언정 질문을 회피하지는 않았다. 자화자찬만 가득한 보도자료나 치밀하게 짜인 각본이 있는 현장 방문보다는 지도자들의 ‘진짜 본심’이 더 궁금하다.

버락 오바마 백악관의 대변인으로 ‘역대 최고’라는 칭송을 들었던 조니 어니스트는 고별사에서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결코 우리를 살살 다루지 않았고, 그것이 오바마를 더 나은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여러분들의 일에 대한 열정이야말로 민주주의 구심점이다.” 물론 언론도 잘못이 있다면 비판받아야 한다. 하지만 기자의 신상을 털어 이른바 ‘양념’을 유도하거나, 징벌적 손해배상법 같은 재갈을 물리는 게 정권 성공의 지름길이라고 믿는 이들이 한 번쯤은 곱씹어볼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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