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사업 축소" "이사 바꿔라".. ESG 잣대에 떠는 에너지공룡들

김승범 기자 2021. 2. 1.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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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ose-up] 에너지 기업 'ESG 리스크'

미국의 행동주의 헤지펀드 ‘엔진넘버원’은 지난해 12월 7일 세계 최대 석유기업 엑손모빌에 서한을 보냈다. 전직 풍력 기업 CEO 등 엔진넘버원이 추천한 재생에너지 관련 인사 4명을 신규 사외이사로 선임하라는 내용이었다. 석유 중심의 사업구조와 기존 이사회 멤버로는 에너지 시장 격변기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엔진넘버원은 미국 2위 연기금 캘리포니아 교직원 연금과 영국성공회 펀드 등 우군을 확보하며 압박 수위를 높였다. 엑손모빌 지분 5%를 보유한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과의 접촉에도 나섰다. 블랙록은 작년 초 “투자 결정 때 기후변화 대응을 핵심 평가 지표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지난해 2월 5일(현지 시각) 국제 환경보호단체 그린피스가 영국 런던에 있는 BP(브리티시페트롤리엄) 본사 앞을 점거하고 있다. 버나드루니 BP CEO는 취임 후 첫 출근날이었지만 회사에 제대로 들어가지도 못했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에 소홀하다는 이유로 투자 회사가 등을 돌리고 경영권 공격까지 받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글로벌 에너지 업계가 긴장하고 있다. /AFP

압박에 밀린 엑손모빌은 작년 12월 14일 “석유 생산 때 발생하는 온실가스 배출을 2025년까지 15~20% 낮추겠다”고 발표했다. 1월 27일에는 “엔진넘버원이 추천한 이사 후보에 대한 평가를 진행할 것”이라며 “후속 기후변화 대응 조치도 내놓겠다”고 밝혔다. 미 CNBC는 “코로나로 실적이 나빴던 엑손모빌은 엔진넘버원 주장에 다른 주주들이 동조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며 “엑손모빌로서는 다급한 상황”이라고 전했다.

글로벌 에너지 업계가 ‘ESG(환경·사회·지배구조) 리스크’에 긴장하고 있다. ESG에 소홀하다는 이유로 대형 투자자가 등을 돌리고 경영권 공격까지 받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에너지 공룡’들도 ESG를 외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ESG 리스크에 떠는 에너지 공룡들

작년 12월 7개 국제 환경단체와 1만7000여명의 네덜란드 국민이 로열더치셸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의 첫 번째 심리가 셸 본사가 있는 네덜란드 헤이그의 지방법원에서 열렸다. 원고인 환경단체 측은 “셸이 2019년 발표한 탄소 배출량 저감 목표(2035년까지 30% 감축)는 충분하지 않다”며 2030년까지 45% 감축할 것을 요구했다. 셸은 판결에 따라 강제로 경영 계획을 바꿔야 할 수 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셸이 지면 다른 거대 석유회사들도 줄줄이 소송에 직면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친환경 투자자 단체인 ‘팔로디스’는 2019년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 주주총회 때 BP가 석유·가스 사업을 줄이고 저탄소 사업 투자를 늘릴 것을 촉구하는 내용의 주주제안을 했다. 부결되기는 했지만 주주들 표가 10% 가까이 몰리자 BP도 적지 않게 신경을 쓴 것으로 알려졌다. BP는 지난해 3월 “탄소 중립 목표 실현과 관련해 팔로디스와 협력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지배구조도 표적이 되고 있다. 작년 12월 사우디아라비아 국영 석유기업 아람코가 구글과 제휴해 사우디 클라우드 컴퓨팅 사업에 진출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국제 인권단체들은 “사우디 왕실에 비판적인 사람들을 감시하는 데 악용될 수 있다”고 반발했다.

하버드비즈니스리뷰는 최근호에서 “지금까지 행동주의 펀드는 단기 차익을 얻고 빠지는 게 주요 목적이었다”며 “하지만 최근에는 환경·사회 같은 문제가 기업 실적에 큰 영향을 미치고 주주들 관심도 끌고 있다는 판단에서 기업의 중장기 이슈에 집중하는 펀드가 늘고 있다”고 했다. 작년 ESG 관련 글로벌 투자 규모는 45조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 500곳이 넘는 기관투자자가 참여하는 모임 ‘기후대응 100+’는 주요 기업들에 탄소배출 감축 목표를 설정하고 이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ESG에 소홀한 기업으로 낙인찍혔다가는 투자 유치 실패와 주가 하락 등 불이익을 당할 수 있는 상황이다.

◇한국도 ESG 리스크 현실화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전력이 인도네시아·베트남 등 석탄화력발전소 프로젝트에 연관됐다는 이유로 네덜란드공적연금이 작년 2월 6000만유로의 한전 지분을 매각하고 투자를 회수했다. 블랙록은 지난해 4월 한전을 향해 “석탄 투자는 기후변화에 역행하는 계획”이라며 지분 매각 가능성을 경고했다. 한전이 베트남에서 진행 중인 석탄발전소 사업에 참여한 삼성물산은 영국 최대 기업연금 운용사 리걸앤드제너럴 그룹 등 해외 기관투자자들로부터 “석탄사업 투자를 중단하라”는 압박을 받자 작년 10월 기존 사업만 끝내고 신규 석탄 투자·사업은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전광우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은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단기 효율성보다는 지속 가능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세계 경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며 “기업들이 ESG 전략을 제대로 세우지 못할 경우 변혁기에 큰 위기를 맞을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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