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 못놓는 엄마께 말했다… 네 일부라도 살게하자고”[히어로콘텐츠/환생]

히어로콘텐츠팀 2021. 2. 1.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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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 삶을 나눈 사람들]<1> 생명 나눠주고 떠난 동생
현수막 설치하다 6m 아래로 추락… 미동없는 얼굴, 새카만 뇌 CT사진
“나중에 날 못알아보면 우짜노”… 어머니 말씀에 각막은 손 안대
폐 이식수술 100건 한 의사였지만 수술실 밖 가족들 눈물 이제 알아
손현승 씨(가운데)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누운 아들과 마지막 면회를 하고 있다. 가족들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현승 씨의 심장과 신장을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삶을 위해 기증했다. 부산=곽도영 기자 now@donga.com
‘손현승, M(남성), 39y(39세).’

침대에 누운 이 앞에 걸린 카드 속 이름이 낯설었다. “혈압이 안 잡혀요!” 의료진의 날카로운 외침. 내 동생 현승이가 맞나.

“지금 두개골 하부가 골절돼 지혈이 안 돼요. 혈관이 완전히 망가져서 출혈 지점을 찾는 게 어려울 정도예요. 뇌부종도 너무 심해요.”

의료진이 지혈을 하기 위해 분투했지만 터질 듯 부어오른 뇌의 압력이 너무 높았다. 경동맥 위, 현승이의 머리 쪽은 피가 전혀 통하지 않고 있었다. 끝도 없는 출혈에 수혈제제는 바닥나 갔다. 그날 밤, 눈물범벅이 된 채 앰뷸런스를 타고 수동식 인공호흡기를 쥐어짜며 우리는 부산대병원 외상센터로 달렸다.

두 살 터울인 하나뿐인 동생. 현승이는 부모님께 딸 같은 아들이었다. 집안 살림은 넉넉지 않았다. 아버지는 술만 드시면 우리 둘을 앉혀 놓고 “공무원이 되라”고 하셨다. 나는 악바리처럼 공부해 결국 흉부외과 의사가 됐다. 음악과 영화를 좋아했던 현승이는 작은 현수막 제작업체에 들어갔다.

돌이켜보면 난 장남이지만 막상 집에선 늘 ‘부재중’이었다. 학생 땐 공부한다고, 재수 때는 기숙학원에서 지낸다고. 의대에 가선 수련, 의사가 된 뒤론 수술과 외래진료. 현승이는 그런 형을 대신해 묵묵히 대소사를 챙겼다. 고생하는 어머니를 위해 밥이며 빨래며 뭐든 알아서 했다. 속 깊은 둘째 아들이었다.

내가 가정을 꾸린 뒤에도 현승이는 맞벌이인 우리 부부를 대신해 제 자식처럼 조카들을 돌봤다. 늦은 밤 퇴근해 아이들을 데리러 가면 잠든 아이를 업고 내려온 현승이가 말했다. “자는 아를 뭐할라꼬 데꼬 가노. 기냥 두고 가지.”

동생은 회사에서 디자인을 한다고 했다. 단 한 번도 현승이가 위험한 일을 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동생이 아침에 현관에서 신발을 신을 때마다 어머니는 등을 두드렸다. “우리 아들! 잘될 끼데이!” 현승이는 쑥스럽게 미소 지었다.

동생이 무슨 일을 했는지는 사고 뒤에야 알았다. 중소 규모의 현수막 업체들은 제작만 해선 보수가 변변치 않다 보니 설치까지 해주고 일종의 수고비를 받는 모양이었다. 사고가 벌어진 그날, 동생은 롯데 시그니엘 부산 호텔의 4층 연회장에 가로 7m짜리 현수막을 걸러 나갔다.

“호텔에 가니까, 직원이 ‘저기 3층 엘리베이터 옆에 있는 리프트 쓰시면 돼요’ 하고는 가뿌리는 기라예. 우째 쓰라는 설명도 없고. 테이블 땜에 안전장비 세울 데도 없는데 우짜라는 말도 없고. 그래도 우짭니꺼. 일감 받고 갔는데 일은 해야 안 되겠능교.” 함께 나갔던 동료가 말했다.

동생은 안전모 하나 제공받지 못한 채 위태롭게 세워진 리프트 위로 올랐다. 어렵사리 일이 끝나간다 했던 순간. 쓰러진 6m 높이의 리프트에서 동생은 머리부터 바닥으로 떨어졌다.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아들을 보며 어머니는 가슴을 치고 또 쳤다.

“이기 무슨 엄마라꼬…. 자식새끼 뭔 일을 하는지도 모리고, 아침마다 ‘잘될 끼데이’ 캤으니. 한 번도 힘들다 칸 적이 없었는데, 말이라도 했으면….”

보호자 대기실의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밤을 지새운 어머니는 오전 10시 반 면회시간만 되면 넋 나간 사람처럼 중환자실로 뛰어갔다. 맨발에 슬리퍼 차림으로.

푸른빛 호스들이 달린 동생의 손. 어머니는 그 손을 부여잡고 얼굴을 비볐다. 발을 주무르며 통곡했다. 좋아하던 노래를 틀어 귀에 대줬다. 하지만 현승이 얼굴은 고요했다. 어떤 미동도 없었다.

24시간 넘도록 피가 통하지 못한 뇌. 컴퓨터단층촬영(CT) 화면에서 현승이 머릿속은 새카맸다. 하얗게 보여야 할 뇌실도, 주름도 없었다. 그저 암흑뿐인 공간. 나는 알고 있었다. 현승이는, 하나뿐인 내 동생은 뇌사였다.

뇌사는 식물인간과 다르다. 흔히 영화나 드라마에서 혼용해 쓰는 탓에 오해가 많다. 식물인간은 의식은 없지만 호흡이나 소화, 심박을 담당하는 뇌의 중심은 살아 있다. 가끔 기적처럼 깨어나기도 한다.

손현승 씨의 뇌 컴퓨터단층촬영(CT) 사진. 하얗게 보여야 할 뇌실과 주름이 전혀 없고 모든 부분이 검게 변해 있다. 부산=곽도영 기자 now@donga.com
하지만 뇌사는 아니다. 뇌의 모든 부분이 완전히 죽은 상태다. 어떤 것도 느낄 수 없다. 불수의근(의식으로 조절할 수 없는 근육)인 심장만 뛸 뿐, 인공호흡기가 없으면 호흡도 할 수 없다. 회복 가능성 또한 제로다.

뇌사 상태에선 두 가지 선택지가 앞에 놓인다. 하나는 그 상태로 짧으면 일주일, 길면 3주. 서서히 심장을 비롯한 장기가 꺼져 가는 걸 지켜보다 이별을 맞는 것. 다른 하나는 뇌는 죽었지만 아직 살아 있는 장기로 다른 사람을 살리는 것. 장기 기증이다.

나는 명색이 흉부외과 의사이자 폐 이식 전문의였다. 전국 곳곳에서 이식을 기다리는 환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식을 받지 못해 생을 마감하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도.

의대 동기인 외상센터 신경외과 이정환 교수를 만났다.

“정환아, 니가 내 동생… 뇌파 검사 좀 해줄래.”

“… 알겠다.”

그게 뭘 뜻하는지 서로가 알고 있었다. 현승이가 다시 눈을 뜨지 못한다는, 장기 기증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겠다는 뜻이라는 걸.

뇌사 추정 환자가 장기 기증을 하려면 절차를 밟아야 한다. 먼저 1, 2차 뇌파 검사에서 아무 반응이 없음을 확인한다. 그 후 뇌사판정위원회가 뇌사를 인정한다. 그 순간, 환자의 심장이 뛰어도 법적으론 사망이다.

하지만 그날 다시 이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뇌파 검사, 조금만 기다려 도.” 사고 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빨리 동생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의사로선 알고 있었다. 회복 불가가 명백했다. 하지만 형이기도 했다. 기적이 일어나길. 도저히 마지막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현승이는 갈수록 멀어져 갔다. 꺼져 가는 몸속에서 균이 번식해 폐렴까지 왔다. 폐렴균을 잡으려 독성이 심한 항생제를 썼다. 신장과 간 기능이 떨어져 온몸이 부어올랐다. 이대로는 욕창이 생길 수도 있었다.

“아부지…. 우리 현승이 장기 기증하면 어떻겠습니까. 일부나마 어딘가에서 살아가면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평생 조선소 밥을 먹은 아버지. 대형 크레인이 얽히고설킨 곳에서 살아온 당신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도 추락사고 당한 사람 중에 옳게 돌아온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다른 사람 살리는 게 맞겠제?”

어머니는 펄펄 뛰었다.

“일주일도 안 됐는데 무슨 소리고? 이래 혈색 있고 가슴도 오르락내리락하는데. 내 아들 멀쩡히 살아 있는데 무슨 소리고?”

하지만 갈수록 변해가는 현승이의 모습에 어머니도 무너졌다. 이제는 보내줘야 했다. 결정을 한 뒤에도 어머니는 자꾸만 자꾸만 되물었다.

“봉수야, 니 동생 좀만 더 있다 가면 안 되나. 인공 뇌가 있다 카던데…. 이리 보내면 이제 사진밖에 못 보는데….”

11월 11일. 흰 가운 위에 푸른색 비닐 방역복을 입은 의료진이 중환자실로 들어와 뇌사 판정 검사를 시작했다. 양쪽 눈꺼풀을 차례로 벌려 동공에 작은 불빛을 비췄다. 활짝 열린 눈동자는 반응이 없었다.

다음으로 귀 쪽에 가느다란 관을 갖다 대고 차가운 물을 쏘았다. 뇌파는 일직선에서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여섯 가지 검사에도 30분 넘게 평평한 뇌파. 차트에 ‘뇌사 확인’이란 네 글자가 적혔다.

그새 폐와 간, 췌장은 상태가 나빠져 기증 불가 판정이 났다. 가능한 건 심장과 신장 두 개였다. 각막은 가능했지만 제외했다. “우리 현승이가 나중에 날 못 알아보면 우짜노.” 어머니의 반대였다. 장기 기증을 위한 적출 수술이 다음 날 오후 5시로 잡혔다.

수술 직전, 가족에겐 잠깐의 시간이 주어진다.

“현승아, 현승아… 얼른 신발 신고 가자. 엄마 눈물 좀 닦아 도… 엄마는 못 견딜 것 같다. 엄마 데리러 온나….”

어머니는 오열했다. 아무 말 없던 아버지의 두 눈에선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침대시트로 번져갔다. 아들의 발을 어루만지고 반쯤 뜬 눈을 감겨준 건 아버지였다.

“… 너무 빨리 갔다. 우짜면 좋노.”

한참 동안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미안하다, 현승아. 형이 미안하다. 못해 준 게 너무 많다. 지금도 현승이를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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