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럼] 한미관계, 누가 누구를 예인할 것인가
지난 1월 4일에 호르무즈 해협의 오만 인근 해역에서 이란 혁명수비대가 한국의 화학운반선을 나포했다. 일주일 만인 10일에 아락치 이란 외무차관은 "한국의 은행들이 미국 제재를 두려워해 불법적으로 이란 자금 자원(접근)을 막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의 은행에서 동결시킨 70억 달러를 코로나19 백신 구매자금으로 활용하려는 이란 정부는 미국의 요구에 굴복한 한국 정부가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치적 의지가 부족하다"고 말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1년 전에 솔레이마니 이란 혁명수비대 사령관을 드론으로 암살하였고, 가혹하게 이란에 경제제재를 가해왔다. 이에 대해 이란은 미국에 직접 보복하지 않고 그 대신 미국의 뒤를 따라가는 한국을 보복 상대로 설정한 셈이다.
이 사건은 한국에게는 동맹의 딜레마를 일깨우는 단면이다. 미국의 입장을 존중하는 한국 정부가 미국과 이란의 전략적 갈등에 끼어들게 되면 값비싼 비용을 지불하게 된다는 점, 그것이 바로 딜레마다. 어쩌면 이란의 선박 나포는 동맹의 적은 비용일 수 있다. 그러나 같은 맥락에서 미국과 중국의 지정학적 갈등에 한국이 끼어들게 될 경우 그 비용은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된다. 미국에 직접 보복할 수 없는 중국은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을 보복의 상대로 정하게 된다. 2016년에 미국의 사드 요격미사일이 한국에 배치되자 한국과 중국의 외교관계는 심각하게 손상되었고 관광산업과 문화교류에도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 이후 한때 중국에 무역의존도가 큰 한국의 대중 무역흑자가 36% 감소하기도 했다. 미국에 대해서는 별다른 조치를 하지 못한 중국 정부는 유독 한국에 대해서만 가혹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중국의 권위주의에 맞서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신봉하는 동아시아 국가들끼리의 연합과 협력을 강조하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가 트럼프의 일방주의를 개선하겠다면 한미관계 발전을 위해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켐벨 백악관 인도·태평양 조정관 스스로도 말했듯이 "아시아에는 두 개의 아시아가 있다." 첫 번째는 정치·안보 측면에서의 갈등의 아시아이고, 두 번째는 경제적으로 상호의존 관계에 있는 협력 차원의 아시아다. 아마도 전자가 전통적인 지정학의 아시아라면 후자는 복합 지정학, 또는 지경학(geoeconomics)의 아시아라고 할 것이다.
우리는 북한의 핵 능력이 성숙하여 이제는 강대국 지위를 넘보고 있다는 사실도 우려하며, 몸집이 커진 중국이 지정학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지역 강국이라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또한 그들의 모험주의는 한미동맹과 우방과의 협력을 통해 억지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단면에 불과한 것이고 아시아는 강대국 정치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공간'이라는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
바이든 정부는 중국과의 대결에 앞서 퇴행으로 가고 있는 국제질서를 협력적인 방향으로 회복시켜야 한다. 미국의 사정이 여의치 않다면 한국은 방역에 성공한 노하우를 전 세계와 공유하는 중견국가(Middle Power), 세계 경제위기 속에서도 경제를 건실하게 유지한 자유통상국가, 지정학적 갈등을 완화하는 평화 선도국가로서 자신을 재발견해야 한다. 더불어 동아시아에서 공동의 번영을 도모할 수 있는 협력의 규칙까지도 선제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역량 있는 국가여야 한다.
민주주의는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다양한 해법을 제공하는 터전이다. 민주주의는 권위주의 중국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형편없이 후퇴하였다. 한국은 세계의 리더십이 사라진 상황에서 호주, 독일, 일본 등의 중견국가들에게 협력의 '제3의 지대'를 제안할 필요가 있다. 투명한 정보공개와 범지구적인 재난에 대한 공동대응,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규칙 기반의(rule based) 국제질서를 지향하는 명확한 국가 비전을 정치와 외교의 중심으로 정립하는 것이다. 미국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고장 난 미국을 안전한 항구로 이끌 수 있는 예인선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한미 관계에서 한국의 주도성은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에도 관철돼야 한다. 한국은 한반도 평화의 중재자가 아니라 당사자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문제는 역량이다. 한미 관계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중견 평화국가로서의 역량을 발휘해 볼 일이다.
<원문=동아시아재단 정책논쟁 15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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