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업 '산업보국' 몸소 실천.. 한강의 기적 일군 '리틀 정주영'
60년 외길.. 55년간 흑자 달성
현장경영 통해 30개 공장 구축
정주영 주축 재계서열 1위 이뤄
車·중공업 등 산업전반으로 확대
'산업보국'
향년 84세로 30일 생을 마친 고 정상영 KCC 명예회장의 삶을 아우르는 한 마디다.
한국경제의 중흥을 이끈 현대가(家) 창업 1세대의 공통분모이기도 하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를 비롯한 '영'자 항렬의 창업 1세대는 그렇게 이 땅에 부와 명예를 일궜다.
고 정 명예회장의 별세로 이 '영'자 항렬의 현대가 창업 1세대 모두가 이제 역사가 됐다.
◇나라 부흥을 함께한 '산업보국' 정신 실천 = 정 명예회장이 자신의 사업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힌 것은 22살때의 일이다.
막냇동생인 정 명예회장과 스물한 살 터울이 지는 큰형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는 아버지 자리를 대신하는 집안 어른이었다. 큰형은 기질 면에서 자신을 가장 많이 닮은 막내를 늘 애틋하게 여겼다.
큰형이 어렵사리 일으킨 사업 현대건설은 이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혼인을 앞두고 생업수단이 절실해진 동생 하나 거두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고 정상영 명예회장은 큰형의 품에서 벗어나 스스로 일가를 이루고 싶어 했다.
큰형은 "뜻이 정 그렇다면 네 사업을 해봐라. 기왕이면 국가와 사회에 보탬이 되는 사업이 좋겠다"고 응원했다. 고 정주영 창업자는 막내가 하려는 회사의 이름을 '금강(金剛)'이라고 지었다. 가장 단단한 보석인 금강석을 뜻하기도 하고, 고향에 있는 금강산이기도 했다.
정 명예회장은 이후 몇 달의 준비를 거쳐 1958년 8월 12일 '금강스레트공업주식회사'를 출범했다. KCC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정 명예회장이 지난 60여년 동안 KCC에 심어놓은 창업의 뜻은 크게 두 가지다. 안으로는 튼튼한 회사를 키우고 밖으로는 큰 형의 유지인 '산업보국'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정 명예회장은 튼튼한 회사가 곧 '산업보국'의 길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 결과 KCC는 창업 초기 몇 년을 제외하고 55년 연속 흑자경영을 실현했다.
정 명예회장은 평생 국내 20개, 국외 10개 등 총 30개의 공장을 지었다. 대부분 직접 현장에 나와 공장 터를 살펴보고 직접 지었다. 사내외 전문가들의 의견을 두루 구하고 귀를 기울였다. 지금도 그의 집무실 테이블 위에는 연필로 이리저리 그은 줄이며 색색으로 표시된 도면이 있다.
KCC는 정 명예회장의 뜻에 따라 안정과 변화를 양 축으로 삼고, 매 시기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사업 확장을 이룩했다. 여기에 더해 공유가치경영(CSV)·지속가능경영을 추구하며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고 있다.
◇우리 제조업의 자존심 = 현대가 창업 1세대는 우리나라 제조업의 자존심이다. 그들의 산업보국의 정신은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등 우리 제조업의 굵직굵직한 글로벌 기업들을 일궜고, 바로 우리 경제의 자립, '한강의 기적'으로 이어졌다. 이런 현대가의 신화는 장남인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로부터 시작했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명언을 남긴 정주영 명예회장은 맨손으로 일어나 1946년 현대자동차 등 계열사들을 설립하면서 현대를 국내 재계 서열 1위로 끌어올린 한국 근대화의 일등공신이었다. 199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낙선한 정주영 명예회장은 1998년 직접 소 떼를 몰고 판문점을 통과해 방북하는 등 금강산 관광 사업과 개성공단 사업에도 주력했다.
이후 창업 1세대는 대한민국 산업 전반으로 사업을 펼쳐나갔다. 바로 아래 동생인 고 정인영 한라그룹 명예회장은 1953년 현대건설에 입사해 큰형과 함께 현대를 일궜고, 이후 1977년 한라의 전신인 현대양행으로 독립했다.
3남인 고 정순영 성우그룹 명예회장은 1969년 독립한 현대시멘트를 이끌었다. '포니정'으로 불린 4남 고 정세영 HDC 명예회장은 1957년 현대건설로 입사한 뒤 1967년 초대 현대차 사장에 취임해 32년간 자동차 외길 인생을 걸으며 자동차 수출 신화를 이뤄냈다.
그는 1999년 장조카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에게 자동차 부문 경영권을 넘기고 당시 현대차 부회장이었던 아들 정몽규 HDC 회장과 함께 현대산업개발로 자리를 옮겼다.
5남 정신영씨는 30대 초반인 1962년 독일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났고, 유일한 여동생이자 고 김영주 한국프랜지공업 명예회장(2010년 별세)의 부인인 정희영 여사는 2015년 별세했다.
박정일기자 comja77@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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