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기 대신 분노 넘치는 일본.. 혐한의 시작은 한일 힘의 역전 때문"
이명찬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
“더 이상 잘 나가던 일본이 아녔어요. ‘좀비 나라’ 같다고 할까.”
2019년 게이오대 방문연구원으로 일본에 머물렀던 이명찬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은 지난 30일 전화통화에서 당시 느꼈던 일본 사회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다. 1994년부터 10년간 일본에서 생활하며, 일본의 눈부신 발전상을 목격했던 터라 변화의 충격은 더했다. 경제는 수치만 나쁜 게 아녔다. “유명 관광지인데도 오후 5시 이후로는 문 연 커피숍이 거의 없더라고요. 도시가 활기를 잃은 거죠.” 생기를 대신한 건 분노였다. 한국을 향한 적개심, 혐한(嫌韓)이 방송과 신문, 잡지를 도배했다. 전직 주한일본대사까지 밑도 끝도 없이 “한국은 곧 망할 것”이라고 떠드는 지경이었다. 이 연구위원은 “90년대, 2000년대초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한국은 아예 관심 밖이었다. 일본 사회가 한국을 많이 언급하는 것 자체가 변화의 징조였다”고 말했다.
시발점은 무엇이었을까. 이 연구위원은 “일본보다 잘 나가는 한국에 대한 위기감이자 열등감의 발로”라고 진단한다. 그가 최근 출간한 ‘일본인들이 증언하는 한일역전’(서울셀렉션)은 한국과 일본 사이에 180도 달라지고 있는 힘의 관계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반일 감정에서 싹튼 ‘국뽕’에 취한 주장은 아닐까 하는 의심은 거두자. 이 연구위원의 분석과 궤를 같이 하는 일본 지식인들의 ‘증언’이 뼈대를 이룬다. 일본 내 한반도 문제 최고 전문가로 꼽히는 이즈미 하지메 도쿄국제대 교수는 “결국 한일 갈등은 달라진 힘의 관계에 양국 모두 익숙하지 않아 빚어졌다”며 한일 역전 현상을 에둘러 인정한다.
일본이 퇴행을 거듭하는 이유는 역시 정치다. 코로나19 대응은 총체적 실패였다. 도쿄올림픽 성공이란 정치적 노림수를 위해 팬데믹 초기 코로나 검사에 소극적이었던 정부, 병원과 의료 자원의 총동원을 가로막은 칸막이 관료 조직, 국가가 아니라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바쁜 후진적 민주주의 등 일본 국가 시스템의 민낯을 드러냈다는 평가다. 한일 격차가 비교적 선명했던 경제 또한 뒤집어질 조짐이다. 2017년 구매력평가지수(PPP) 기준 1인당 국내총생산(GDP)에서 한국이 일본을 추월했다. 이 연구위원은 물가 등을 감안하면 한국 국민의 생활 수준이 일본 국민보다 더 높아졌다는 걸 뜻한다면서, 재화와 서비스의 가치를 현재의 시장가격으로 계산하는 명목 GDP도 한국이 곧 일본을 뛰어넘을 거라 예상한다.
한일 역전의 시대, 한국은 어떤 전략으로 임해야 할까. 이 연구위원은 상당수 한국인들이 맹목적으로 믿고 있는 ‘일본은 언제나 옳고, 한국보다 우월하다’는 전제를 깨트리는 게 우선이라고 강조한다. “한일은 ‘무조건’ 협력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일본은 당분간 그럴 마음이 전혀 없다는 걸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그렇다고 우리도 일본처럼 ‘반일’을 외칠 순 없는 거 아닌가. 이 연구위원은 과거사 반성에서 일본이 스스로 변화하기까지, 한국은 ‘원칙’을 지키며 ‘명분’을 쌓아가면 된다고 했다.
더 이상 밀릴 거 없는 한국이 일본에게 ‘잘 지내자’고 지속적으로 유화 제스처를 보내자는 것. 일본은 “받아들일 가능성이 제로”이기 때문에, 공을 떠안은 일본의 정치적 압박은 커질 수 밖에 없다. 당장 한미일 공조를 강조하는 미국에게 '한국은 노력하는데 일본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점을 부각시킬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2015년 위안부 합의를 인정한다는 취지로 발언한 것은 전략적인 선택이었다는 분석이다.
“일본에서 강제징용과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한국의 대법원 판결을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는데, 우리가 먼저 그러자고 치고 나가야 합니다. 절대 질 수 없는 싸움이니까요. 더 이상 일본을 두려워하지 않고, 양보하지 않는 것이 한일관계의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가는 열쇠가 돼줄 것입니다.”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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