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재판개입 법관의 형사처벌과 탄핵 / 류영재

한겨레 2021. 1. 31.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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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류영재 ㅣ 대구지방법원 판사

판사들도 인사평가를 받는다. 인사평가가 좋을수록 원하는 보직에 선발될 가능성이 높다. 판사들의 인사평가는 법원장이 하되, 수석부장판사가 보좌한다. 판사의 보직 인사는 대법원장이 하되 법원행정처가 보좌한다. 이러한 인사제도가 살아 있는 법원에서 판사들은 재판을 한다.

가상의 예를 들어보자. 당신은 재판을 받고 있다. 무죄를 주장한다. 당신은 법정에서 본 판사들이 당신에 대한 재판을 오롯이 담당할 것이라 믿을 것이다. 당신의 의견이 그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까봐 노심초사하며 법정에도 나가고 탄원서도 쓸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당신의 재판에 관여하는 판사들이 당신이 본 판사들만이 아니라면 어떨까. 법원에는 당신의 재판을 담당하는 판사들에 대한 인사를 좌우하는 법원장, 수석부장판사, 법원행정처 소속 판사들이 있다. 소위 ‘인사권자’들이다. 인사권자가 당신의 재판을 담당하는 판사들에게 갑자기 전화하거나 메일을 보내 이런 ‘조언’을 내린다. “그 재판, 무죄가 맞겠어요? 내가 검토해봤을 때 무죄는 무리인데.” “그 재판, 집행유예가 맞겠어요? 실형 선고해서 엄벌 의지를 보여야 하는 것 아닌가?” 우연인지 필연인지, 재판부는 무죄를 주장하는 당신에게 유죄와 함께 실형을 선고한다. 그 후 인사권자의 ‘조언’이 공개된다. 당신은 그 판결이 오롯이 당신이 법정에서 본 판사들에 의해 내려진 판결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당신은 인사권자에게 전화하지 않고 탄원서를 제출하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인사권자가 한 전화나 메일은 과연 ‘조언’일까. 당신의 직장 생활을 떠올려보자. 당신은, 당신의 인사권자가 당신이 조언을 구하지도 않았는데 굳이 당신에게 찾아와 당신의 업무에 관해서 “이렇게 하는 게 좋겠다”고 말한다면 그것을 단순히 선배의 ‘조언’이라고 생각하며 따라도 그만, 안 따라도 그만이라고 여길 수 있는가.

위 예시와 같은 재판개입이 이루어진다면, 재판에 개입한 인사권자는 어떤 책임을 지게 될까.

일단 현재로서는 형사처벌을 받지 않는다. 판사가 다른 판사의 재판에 개입할 경우 이를 처벌할 법이 없기 때문이다. 공무원의 직무상 범죄를 처벌하는 법은 직권남용죄다. 그런데 현재 법원은 월권(권한이 없는 행위를 한 것)과 직권남용(권한이 주어진 행위를 하되 이를 남용한 것)을 엄격히 구분하여, 월권 행위에 대해서는 직권남용죄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해석하고 있다. 대한민국헌법은 명시적으로 재판의 독립을 보장한다. 따라서 다른 판사의 독립된 재판에 개입할 권한을 가진 판사는 없다. 법원장, 수석부장판사, 법원행정처 소속 판사도 마찬가지다. 개입 권한이 없는데도 다른 판사의 재판에 개입한다면 이는 월권이다. 현재 법원의 해석이 유지되는 한 월권 행위는 직권남용죄로 처벌되지 않는다. 공무원의 월권을 처벌하는 형법 규정은 없다. 즉, 인사권자가 다른 판사의 재판에 개입해서 헌법상 재판독립 원칙을 위반하고 재판 당사자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해도 이는 범죄가 되지 않는다.

그럼 징계는 어떨까. 판사는 정직 1년을 초과하는 징계를 받지 않는다. 대신 대한민국헌법은 판사의 탄핵을 규정하고 있다. 판사가 직무상 헌법을 위반하였을 때 탄핵 대상이 된다. 탄핵은 형사처벌과 다른 성격을 가진다. 헌법이 규정한 징계에 해당한다. 따라서 형사재판과는 별개로 진행될 수 있고, 범죄가 아닌 위헌적 행위에 대해서도 탄핵은 가능하다. 다른 판사의 재판에 개입한 행위가 현행 법원의 해석상 범죄 행위로 성립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재판독립 원칙 및 당사자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침해 행위로서 탄핵 대상은 될 수 있단 얘기다.

재판개입이 실제로 발생했을 때에는 진상규명 및 책임조치를 신속하고도 엄정히 취하는 것이 중요하다. 재판개입 시도를 당한 판사는 이를 감찰기관에 신고하여 밝히고, 진상이 규명되면 국회와 법원은 헌법 및 법률상 예정된 징계 절차를 진행해야 한다. 인사권자의 조언을 빙자한 재판개입이 횡행할 수 없도록 시스템이 가동되어야 한다. 재판개입은 심각한 위헌임이 명백히 선언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재판 당사자들이 ‘담당 재판부에게 조언 좀 해달라’며 법원장, 수석부장판사, 법원행정처 소속 판사들에게 탄원서를 제출하거나 말을 전달해줄 전관 출신 변호사를 물색하는 불행한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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