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의 월가 단죄할것" 개미들 '게임스톱 반란' 왜?
최근 미국 온라인 커뮤니티 레딧의 ‘월스트리트베츠’ 게시판에 올라온 글이다. 이번 ‘개미들의 반란’ 핵심 진원지인 미 게임유통업체 ‘게임스톱’ 주식을 샀다는 필자는 자신의 투자 결정이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때 자신과 주변 사람이 받았던 경제적 고통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나는 금융위기 때 10대 초반이었고 월가가 우리 삶에 미친 충격을 생생히 기억한다”면서 “멜빈캐피탈 당신은 내가 당시 혐오하던 모든 걸 상징한다”고 썼다. 멜빈캐피탈은 게임스톱의 주가가 떨어질 것으로 보고 공매도에 나섰다가 개미들의 표적으로 찍혀 백기를 든 대표적인 월가 금융회사다. 개미들은 게임스톱 주식을 집중 매수해 주가를 급등시켜 이 회사에 엄청난 손실을 입혔다. 이 필자는 공개서한에서 “나는 월세 자금까지 쏟아 부어 게임스톱 주식을 샀다. 나는 끝까지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고 결의를 밝혔다.
개미들이 똘똘 뭉쳐 월가의 금융회사들을 물리친 이번 ‘게임스톱 사태’는 최근 길어지고 있는 미국의 경제난과 이로 인한 개인투자자들의 상대적 박탈감에서 비롯됐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팬데믹에 따른 경기침체와 실업난으로 일반 시민들은 큰 고통을 겪는 데 반해 대형 금융사 트레이더로 대표되는 고소득층은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사태가 2011년 뉴욕 맨해튼 주코티 파크에서 진행됐던 ‘월가 점령 시위’의 2탄이라는 분석도 있다.
● ‘개미 반란’은 경제난과 상대적 박탈감의 표출
미국 언론들은 이번 사건을 충격을 넘어 혁명적인 일이자 금융시장 역사의 분기점이 될 것이라는 표현까지 쓰며 그 배경을 연일 대서특필하고 있다. 그 중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게 ‘가진 자에 대한 분노’다.
AP통신은 30일 “금융위기와 경기침체를 겪은 이들이 이번엔 팬데믹으로 인한 실업난과 강제퇴거 위기에 맞닥뜨렸다”며 “그런 가운데 부자는 더 많은 돈을 벌고 있는 현실을 보게 되자 이들의 ’복수의 시간‘이 왔다”고 분석했다. 10여 년 간 누적된 소득불평등과 빈부격차의 부메랑이 증시에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런 현실은 통계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구호단체 옥스팜에 따르면 지난해 3월 팬데믹이 시작된 이후 2000만 명이 넘는 미국인들이 직장을 잃었지만 같은 기간 세계 10대 부호들은 오히려 재산이 5000억 달러나 늘었다. 또 상위 10%의 미국인이 전체 주식가액의 85%를 소유하고 있고 상위 1% 부자의 세전 소득도 20%에 육박할 정도다.
개미 반란의 중심이 20, 30대 젊은층이라는 점도 ‘월가 점령 시위’가 벌어졌던 2011년 때와 비슷하다. 당시 청년실업과 경제난에 시달린 유럽과 미국 등 세계 각국에서 청년들의 시위와 폭력사태가 잇달았다. 온라인 커뮤니티 레딧에 글을 쓰는 개미들 중에도 10년 전 분노를 느꼈던 밀레니얼 세대들이 많다는 추정이 나온다. 월가의 공매도 세력에 맞서 개미들이 매수하는 종목들은 게임 가게(게임스톱)이나 오프라인 극장(AMC) 등 대체로 이들 세대가 향수를 느끼는 기업이라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번에 한달 월세를 털어 게임스톱 5주를 샀다는 자크 위어 씨(27)는 “거대 금융기업에 맞서서 내가 10대 때 금요일 밤마다 가던 게임 가게를 지키기 위해 투자를 했다”고 AP통신에 말했다.
이들의 불만이 주식투자를 통해 발현된 것은 전반적으로 투자 환경이 크게 개선되고 디지털 기기에 익숙한 세대가 출현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과거엔 주식거래를 위해 5% 이상의 수수료를 내야 했지만 지금은 언제 어디서나 무료로 주식을 사고팔 수 있는 환경이 됐다”며 “많은 사람들이 소액을 모아 큰 돈을 만들어 ‘집단적 광란’을 일으킬 수 있게 됐다”고 보도했다. 최근 팬데믹에 따라 정부가 나눠준 재난지원금이 이들이 하는 주식 투자의 종잣돈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풀이도 나오고 있다.
● 美 당국, 정치권도 개미들 지지
월가에 맞선 개인투자자들의 집단행동은 한동안 이어질 전망이다. 29일(현지 시간) 뉴욕 증시에서 다우지수는 2% 가량 급락하면서 이번 사태로 촉발된 시장의 불안감을 반영했다. 그러나 게임스톱의 주가는 67.9% 폭등하면서 전날 하락세(―44.3%)를 가뿐히 만회했다. 이 주식을 높은 가격에 사서 들고 있는 개미들이 손쉽게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미 금융당국이 최근 로빈후드 개미들의 손을 들어준 것도 이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대목이다. 증권거래위원회(SEC)는 29일 “특정 주식 거래를 억제하는 기관의 조치를 면밀히 점검할 것”이라고 밝혔다. 로빈후드 등 증권거래 서비스업체가 전날 시장 불안 등의 이유로 게임스톱 등의 주식 거래를 제한하겠다고 발표한 것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두고 헤지펀드는 주식을 자유롭게 거래하도록 놔두면서 개인 투자자들의 발목만 잡는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정치권에서도 여야 할 것 없이 개미들을 지지하고 나섰다. 엘리자베스 워런 민주당 상원의원은 성명에서 “수년 동안 헤지펀드와 사모펀드들은 주식 시장을 자신들의 개인 카지노처럼 다뤘고 다른 사람들은 희생양이 됐다”고 비난했다.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민주당 하원의원과 테드 크루즈 공화당 상원의원 역시 투자자들의 게임스톱 거래를 제한한 로빈후드를 향해 비판을 쏟아냈다. 이밖에도 개인투자자를 옹호하고 로빈후드에 대한 조사를 촉구한 제프 던컨 하원의원 등의 초당적 성명이 주말까지 이어졌다.
● 월가 거물들 줄줄이 백기
이런 개미들의 갑작스런 반란에 월가의 거물들은 줄줄이 백기를 들고 있다.
월가의 유명한 공매도 투자자인 시트론 리서치의 앤드루 레프트 대표는 29일 유튜브 동영상과 트위터를 통해 “시트론은 공매도 리포트 발행을 중단한다”고 밝혔다.
레프트 대표는 “20년 전 나는 월가와 각종 사기로부터 개인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해 시트론을 시작했다”면서 “처음엔 기득권에 저항하기 위해 시트론을 시작했지만, 어느새 우리가 기득권에 돼 버렸다”고 말했다.
레프트 대표는 최근 게임유통업체인 ‘게임스톱’에 공매도를 선언했다가 개미들의 표적이 됐다. 공매도는 주식을 빌려 시장에 내다판 뒤 주가가 떨어지면 낮은 가격에 주식을 사서 되갚는 투자 기법이다. 레프트 대표를 비롯한 공매도 투자자들은 자신이 공매도한 기업의 약점을 부각한 리포트를 발행해 주가를 떨어뜨려 수익을 얻는다는 의혹을 받았다.
레프트 대표는 지난주 자신에 대한 개미들의 비판이 커지자 이들을 “성난 군중”이라고 비하하며 게임스톱의 주가가 20달러까지 추락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가운데 미국 프로야구 뉴욕 메츠의 구단주인 스티브 코언 역시 자신의 공매도 관련 투자가 논란이 되자 트위터 계정을 중단했다.
코언이 운영하는 자산관리회사 포인트72는 최근 게임스톱에 공매도를 걸었다가 큰 손실을 본 멜빈캐피탈에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다. 코언은 30일 메츠 구단을 통해 밝힌 성명에서 “나는 메츠 팬들과 트위터로 소통하는 것을 즐겼는데, 우리 가족에 대한 협박으로까지 이어진 거짓정보가 엄습했다”고 말했다.
뉴욕=유재동 특파원 jarret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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