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한 장면 속 오래된 질문 '나는 누구인가'

한겨레 2021. 1. 30.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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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원의 영화감별사][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포제서>
난도질 영화 즐기는 영화광 아니라면
단단히 각오해야 할 잔혹한 장면 다수
암살 위해 두뇌에 침투하는 전문회사
침투한 자아-침투된 자아 뒤섞여 혼란
'공각기동대' '인셉션' 떠오르는 설정
인체라는 껍데기 품은 철학적 물음
타인의 몸을 이용해 암살을 일삼는 전문조직 ‘포제서.’ 주인공은 그 안에서 결국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혼란에 빠진다. 조이앤시네마 제공

우선 잔혹·끔찍한 장면들을 좋아하지 않는 분들께서는 <포제서> 관람 전 단단히 각오를 해두시는 것이 좋겠다. 뭐, 하긴 그렇다. 우리는 시지(CG) 덕분에 지금까지 별의별 기발하고도 독창적인 해체절단형 정육점적 장면들(예컨대 땅콩 쪼개듯 인체를 반분하던 <킹스맨>의 그 장면 등등)을 수없이 보아왔다. 그리고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하지만 <포제서>의 시각·특수효과 장면의 대부분은 시지가 아닌 ‘재래식 기법’들로 만들어져 있다. 거기에 아주 실감 나는 효과음까지 가세되어 있어 그 실물감은 단연 남다르다. 더구나 이 영화의 잔혹 장면들은 대단히 아파 보이는 도구들(고기 전용 네모식칼부터 벽난로용 부젓가락까지를 망라하는)과 대단히 아파 보이는 방식들(…아니다, 이건 구체적으로 얘기하지 않는 게 좋겠다)을 채용하고 있는지라, 평소 난도질·피칠갑 영화들을 자주 접해온 관객들이 아니라면 역지사지에 입각한 간접통증 및 스트레스를 느끼실 가능성 매우 높겠다.

잔혹함 뒤 감춰진 것

아, 물론, 이는 사실 이 영화가 파고든 포인트 중 하나, 즉 ①인체라는 껍데기의 파괴 및 체액(혈액)으로 상징되는 정신의 뒤섞임을 상징하는 것이긴 하다. 더불어 이는 에이아이(AI)의 사료산업인 ②데이터마이닝 산업과 그것의 사생활 침해에 대한 적대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우리의 영화감별적 관심은 <포제서>가 그러한 스트레스를 보상할 만큼 충분한 영양가를 함유하고 있는가에 자연스럽게 맞춰진다.

영화는 누군가 자신의 정수리를 더듬다가 정수리 부근 두피에 탐침을 꽂는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시작된다. 두피에서 배어나오는 흥건한 피. 이어, 손은 탐침에 연결된 조그만 기계의 다이얼을 돌리고, 손의 주인인 젊은 흑인 여성의 표정은 그에 따라 변한다.(웃는 듯 울먹거린다.)

이어 그 여성이 향한 곳은 한 펜트하우스 바. 여성은 <시계태엽 오렌지>(1971)의 밀크 바를 다분히 떠올리게 하는 그 바의 끝까지 걸어간 뒤, 그곳에 서 있는 뚱뚱한 남자의 경동맥에 주저없이 나이프를 꽂아 넣는다. 그리고 그 밖의 여러 부위에도 불필요하게 많이 강하게. 권총 자살을 하려던 여인은 결국 자살 대신 출동한 경찰을 향해 권총을 쳐들어 사살된다. 그리고 장면은 곧바로 전선이 잔뜩 연결되어 있는 헤드셋을 벗으며 고통스러워하는 주인공 ‘타샤 보스’(앤드리아 라이즈버러)의 모습으로 연결된다. 수술복풍의 흰옷을 입은 그녀를 둘러싼 ‘스태프’들은 ‘숙주’의 뇌사가 확인되었으며, 아무런 ‘연결’의 흔적도 남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그렇다. 사살된 살인자는 그녀의 두뇌에 침투한 누군가에게 조종당한 숙주였던 것이다. 그리고 타샤 보스는 그런 식의 암살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회사의 에이스 조종자(‘포제서’)다.

보셨듯 <포제서>는 ③‘사이버펑크’의 고전적인 테마, 즉 기술이 극단적으로 발달한 정보사회에서, 인간의 ‘자아’를 둘러싸고 생겨나는 질문들이라는 테마를 그대로 취하고 있다. <공각기동대>(1995)의 세트장에서 그대로 들고 나온 듯한 디자인의 헤드셋만 보더라도 알 수 있듯, 누군가의 뇌에 침투해 그(녀)를 조종한다는 설정은 <공각기동대> ‘고스트 해킹’의 설정 그대로다.

그 임무 뒤 ‘보스’는 곧바로 거대 데이터마이닝 회사의 최고경영자(CEO)인 ‘존 파스’(숀 빈)와 그의 딸 ‘에이바’(터펜스 미들턴)를, 에이바의 애인 ‘콜린 테이트’(크리스토퍼 애벗)의 몸을 빌려 살해하고 테이트도 자살하도록 기획된 청부살인 임무를 맡게 된다. 일견 <인셉션>을 떠올리게 하는 이 전개에서 <포제서>는 <인셉션>과는 전혀 다른 노선을 취하며 또 다른 포인트를 드러내는바, 그것은 다름 아닌 ④남성의 몸에 들어간 여성의 정신(또는 영혼)에 대한 이슈다.

자신의 성기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테이트(사실은 ‘보스’)를 보여주는 장면에서 우리는 자연스레 <너의 이름은>이나 <체인지> 같은 로맨틱코미디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웃음기 함량 제로의 <포제서>가 이 설정을 코미디 찬스로 쓰지 않을 것임은 명백하다. 대신 <포제서>는, 형광빛이 감돌아 더욱 냉정하게 느껴지는 푸른색 조명 속에서의 테이트와 에이바의 성교 장면을 통해 남성-여성의 성교에 여성-여성의 성교를 겹쳐놓는다(남성인 테이트의 몸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여성인 보스). 그러면서 영화는 ⑤섹스-젠더에 대한 고전적 질문을 던지는 듯 보인다. 더구나 테이트는 현실에서는 애인 에이바의 지배를 받고, 정신은 보스에게 지배되어 있는 껍데기 남성인지라 이 질문은 더 흥미로워질 것 같다.

훔친 몸을 이용할 수 있는 시간은 사흘. 시간이 지나면 너와 내가 엉겨붙어 혼란 속에 빠진다. 조이앤시네마 제공

자아의 충돌, 경계 넘나들다

그런데 사실, 여성-남성을 떠나, 보스의 자아의 경계는 이미 희미하다. 회사는 에이스인 그녀가 숙주로부터 빠져나온 다음 담배파이프(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를 즉각 떠올리게 하는)와 박제된 나비(변태를 하는 이 곤충이 상징하는 바를 굳이 적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같은 소지품으로 자아의 ‘이상 없음’을 테스트해준다. 그럼에도 그녀는 남편과 아들을 만날 때마다 자연스러운 스스로를 연기하기 위한 연기연습을 해야 한다.

이런 설정을 통해 <포제서>는 또 다른 흥미로운 포인트를 드러낸다. 두뇌해킹, 즉 타인의 뇌에 침투했다가 자신으로 돌아오는 일의 반복은 결국 ⑥예술가(특히 스토리텔러)들의 작업에 대한 비유이기도 한 것이다. 이는 보스를 관리하는 스태프인 ‘거더’(제니퍼 제이슨 리)와 보스가 암살계획을 세우면서 ‘줄거리(narrative)는 뭐죠?’ ‘캐릭터에 더 부합해요’ 같은 대사들을 주고받는 장면이나, 보스가 침투 대상을 몰래 관찰하면서 그의 말투를 연습해보는 장면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영화는 중반의 암살 장면을 전후로, 몸의 주도권을 놓고 테이트와 보스의 자아가 서로 충돌하다가 결국에는 서로 엉겨붙어 버리는 단계로 나아간다. 그러면서 다시 ③‘나’란 무엇인가?라는 사이버펑크의 고전적인 주제로 돌아가는데, 그것은 도피 중인 테이트의 은신처에 직장동료 ‘에디’(라울 바네자)가 갑자기 찾아오면서 더욱 전면에 부각된다.

이 장면 이후 영화가 파고드는 질문은 <토탈 리콜>(물론 1990년의 폴 버호벤 감독 버전)이 중반의 ‘이 알약을 삼켜요’ 장면에서 관객에게 던진 질문, 즉 ‘이 장면 이후의 주인공은 원래의 그 주인공인가, 아니면 주인공이 선택한 주인공의 허상인가’라는 질문에서 기본적으로 벗어나지 않고 있다. 아마도 이것이 이 복잡 모호해 보이는 영화가 그다지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포제서>가 건드리고 있는 여러 질문들은 우리가 오랫동안 수많은 작품을 통해서 이미 접해왔던 것들이고, 그에 대한 <포제서>의 통찰이나 질문 또한 그 영화들이 도달한 지점을 넘어서지 못한다. 하여, <포제서>에서 눈여겨볼 만한 대목으로 남는 것은 결국 이 영화의 비주얼이다. ‘고전적인 촬영기법과 특수효과로 사이버펑크 계열의 에스에프를 만든다’는 각본가 겸 감독 브랜던 크로넌버그(맞다. 눈치채신 것처럼 그는 데이비드 크로넌버그의 아들이다)와 촬영감독 카림 후세인의 시도는 이 영화를 볼만한 것으로 만든 가장 큰 요인이겠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포제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나 화려하고도 매력적인 캐스팅이다. 이건 역시나 아버지의 후광 덕에 가능했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 자원들로 만들어낸 것의 완성도다. 아버지 찬스를 썼건 아니건 작품이 그런 것 정도는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탁월하다면, 우리는 아버지의 이름이 아니라 작품을 먼저 이야기하고 기억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나아가 그가 아버지 찬스를 통해서라도 그런 작품을 만들 자원을 손에 넣게 된 것을 다행스럽게 여길 테니까.

아닌가? 필자는 역시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

계속되는 암살 작전, 탈출구도 필요없는 것처럼 보였던 완전범죄 기획은 결국 침투한, 침투된 자아 사이의 혼란이 발생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조이앤시네마 제공
▶ 한동원 영화평론가. 병아리감별사 업무의 핵심이 병아리 암수의 엄정한 구분에 있듯, 영화감별사(평론가도 비평가도 아닌 감별사)의 업무의 핵심은 그래서 영화를 보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에 대한 엄정한 판별 기준을 독자들께 제공함에 있다는 것이 이 코너의 애초 취지입니다. 뭐, 제목이나 취지나 호칭 같은 것이야 어찌 되었든, 독자 여러분의 즐거운 영화보기에 극미량이나마 보탬이 되자는 생각만큼은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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