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보공단 필수노동자, 고맙지만 정규직은 안됩니다
[경향신문]
국민건강보험공단(이하 건보공단) 고객센터 상담사는 하루에 몇통의 민원전화를 받을까. 지난 1월 26일 ‘국민건강보험 고객센터 민간위탁 적절한가’ 국회 토론회에서 한 상담사의 업무일지가 공개됐다. 이에 따르면 고객센터 상담사는 오전 9시 3분 첫 상담(지역 건강보험료 조정·2분 7초 소요)을 시작으로 18시 퇴근 시간까지 113건의 상담을 처리한다. 113건의 상담 중에는 45초짜리 임신·출산 진료비 해지 상담도 있었고, 11분이 넘는 임의계속가입자 관련 상담도 있었다. 8시간 노동 가운데 휴식시간은 ‘0’분이었다. 점심시간 1시간(11시 33분~12시 33분)을 제외하고 상담이 중단된 시간은 단 15분. 화장실 이용을 위해 네 차례 자리를 비운 시간이었다.
건보공단 고객센터 상담사는 재난 상황에서 사회 기능을 유지하는 ‘필수노동자’로 분류된다. 코로나19 확산 이후 건보공단 고객센터 상담사들은 질병관리본부 콜센터(1339)로 걸려오는 코로나19 관련 상담 업무도 떠맡았다.
■민간업체가 다루는 민감 개인정보
그런데 필수노동자가 된 상담사의 노동환경은 전보다 열악해졌다. 상담콜수는 2019년 대비 최대 40% 이상 증가했는데 인력충원과 처우 개선은 이뤄지지 않았다. 일자리의 질은 여전히 취약하다. 임금은 여전히 최저임금 수준에 머물러 있다. 건보공단 고객센터 상담사는 공단과 도급계약을 맺은 민간위탁운영사 소속 노동자다. 이들 일자리에는 도급업체의 임금 중간착취와 허술한 개인정보 관리, 취약한 효율성 문제가 녹아 있다. 정부는 이들을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대상으로 분류했다. 하지만 4년째 이들은 정규직 전환 논의 테이블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건보공단 고객센터는 총 7개로 12개 도급업체가 맡아 운영한다. 1623명(상담인력 1451명, 관리인력 172명, 2020년 기준)의 고객센터 소속 상담사들은 건강보험 자격과 보험료, 보험급여, 건강검진, 4대 사회보험 징수통합 등 1069개 상담 업무를 다룬다.
모든 고객센터 상담은 고객의 주민등록번호 13자리가 필요하다. 상담사는 고객 주민등록번호를 토대로 주소와 소득, 직장 이력, 진료내역, 교정시설 수용 이력 등 개인정보 대부분을 열람할 수 있다. 개인의 진료개시일과 입·내원 일수, 요양기관명뿐만 아니라 본인만 확인 가능한 건강검진 일자도 확인 가능하다. 민감한 개인정보를 민간 도급업체가 쥐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인정보는 어떻게 다뤄지고 있을까. 지역 고객센터 소속 이민영씨(가명·20대)는 상담콜이 뜰 때마다 제증명 발급 업무가 아니길 바란다. 상담 과정에서 본인이 아닌 제3자에게 제증명을 발급한 경험이 있어서다. 물론 제증명 발급 매뉴얼을 따랐다. 고객의 주민등록번호와 이름, 주소와 가족관계를 확인했다. 신분증 진위 여부를 비롯한 정보확인 지침을 지켰고 절차를 밟아 제증명을 발급했다.
업무가 끝나자 고객은 ‘본인이 아니고 사실은 회사 동료’라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만약 제증명을 악용해 대출 사기를 벌인다면 막을 방법이 없다. 지침에 따라 이행한 업무이기 때문에 상담사와 도급업체, 건보공단은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씨는 “상대방이 미리 정보를 알고 속이려고 작정하면 당할 수밖에 없다”며 “상담사 잘못이 아니라 해도 누군가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괴로웠다”고 말했다.
고객센터를 통해 개인정보를 빼내려는 시도는 현장 상담사들이 종종 겪는 일이다. 정보 유출이 의심되는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상담사는 적극 대응하지 못한다. 추가 질문을 하거나 개인 확인 절차를 늘리면 고객은 반발한다. 일부 고객은 상담사를 상대로 ‘불친절’ 민원을 넣기도 하는데 이는 급여 삭감으로 이어진다. 상담사 등급은 ‘SS’에서 ‘D’로 분류된다. 불친절이 뜨면 등급이 깎이고 등급에 따라 인센티브와 급여도 삭감된다. 박지원 공공운수노조 국민건강보험고객센터지부 총무실장은 “상담사가 개인정보보호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면 오히려 불이익을 받게 되는 구조”라며 “상담사의 노력에 기대는 방식은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건보공단 측은 “개인정보보호를 위해 매월 정기적으로 협력사 자체 개인정보보호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며 “건강보험 업무 과정에서 가입자의 권리(보험급여를 받을 수 있는 자격 처리)와 이익(4대 사회보험료, 보험급여비용, 장기요양급여 등)을 결정하는 경우 반드시 건보공단 직원이 직접 수행한다”고 밝혔다.
■공단사번 부여하고 이력 관리
고객센터의 민간위탁 운영 방식은 공공기관의 경제적 효율성 강화를 위해 이뤄진 조치다. 그렇다면 얼마나 효율적일까. 고객센터의 민간위탁에 투입되는 비용은 약 1198억원(2020년 4월~2022년 3월)이다. 고객센터 상담사 1인당 평균 도급 단가는 약 307만원 정도로 추산된다. 그런데 상담사 급여는 평균 210만원(세전) 수준이다. 1인당 100만원가량이 도급업체 ‘관리비’로 흘러간다. 그런데 고객센터 사무실과 시설·장비, 유지·보수 모두 건보공단에서 제공한다. 상담사에 투입되는 교육과 교재도 공단에서 담당한다. 도급업체는 사실상 인력·실적 관리 업무만 전담한다. 이재훈 사회공공연구원 연구위원은 “민간위탁으로 들어가는 일반관리비, 이윤과 부가가치세액 등으로 오히려 예산이 낭비된다. 해당 예산을 상담노동자 처우 개선에 활용할 경우 숙련노동자 확보와 서비스 질 향상 효과가 이뤄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민감한 개인정보를 다루는 고객센터 상담사 업무는 숙련 노동을 요구한다. 건보공단은 이들에게 별도의 사원번호(공단사번)를 부여하고 업무 수행과 근태, 교육 이력을 관리한다. 상담사 관리를 위해 도급업체가 바뀌더라도 공단사번은 유지된다. 상담사의 직무능력 관련 시험내역과 점수내역도 공단이 통합 관리한다. 1월 27일 국민건강보험고객센터지부 총파업투쟁 선포 기자회견에 참석한 13년차 상담사 이연화씨는 “공단사번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는데 소속은 4번 변경됐다. 13년 동안 일하며 달라지지 않는 건 최저임금과 처우뿐이다”라고 말했다.
고객센터 상담사들은 열악한 노동환경과 처우 개선을 요구해왔다. 상담사가 처한 노동환경을 다룬 기사에는 이들의 노동을 ‘단순 안내’로 폄하하는 댓글이 달린다. 이들의 상담은 본사로 업무를 이관하는 역할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사실일까. 고객센터 고유 업무는 진료확인번호 승인 및 취소, 홈페이지 등 관련 상담 업무, 장기요양기관 청구 원격 상담 등 5가지 정도다. 그 밖의 업무는 고객센터와 공단에서 동시에 수행 가능하다. 대부분의 업무 영역이 겹치거나 연계돼 있다. 고객센터에서 공단으로 업무를 이관하는 경우도 있다. 이때 고객센터 상담사는 고객에게 업무 처리를 위한 자료 요청을 안내하고 필요한 고객정보 탐색 작업 등 1차 업무를 처리한 뒤 공단에 이관한다. 경인고객센터 상담사 서민선씨(가명·38)는 “업무 처리에 필요한 서류와 개인정보, 상담 내역을 보고서처럼 작성해야 한다”며 “오류가 있으면 보고서가 반려 조치될 정도로 상담사들이 꼼꼼하게 작업을 한 뒤 공단 담당자에게 업무를 이관한다”고 말했다.
■고객센터 노조는 협의회 참여 못 해
건보공단 고객센터는 정규직 전환 대상이다. 정부는 2017년 발표한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에서 건보공단 고객센터와 같은 민간위탁 기관도 정규직화를 추진한다고 밝혔다. 비슷한 업무를 하는 국민연금공단, 근로복지공단 소속 노동자는 이미 정규직 전환이 이뤄졌다. 하지만 건보공단 고객센터 정규직 전환은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2019년 10월 신설된 고객센터 민간위탁 사무 논의 협의회에서 한 차례 회의를 한 뒤 모든 논의가 중단됐다. 그나마 고객센터 노조는 협의회에 참여하지 못한다. 지난해 7월 고용노동부는 “고객센터 노조의 협의기구 직접 참여는 객관적 합리적 판단이 곤란해질 수 있다”며 노조의 참여를 불허했다.
김성희 교수(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는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은 과도한 차별을 합리적 차이로 바꾸는 게 목적”이라며 “인천공항 정규직 전환 과정에서 불거진 공정성 논란 이후 정부가 정규직 전환 이슈를 방치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정규직 전환은 청년 일자리 빼앗기가 아니라 사회 전반의 일자리 질을 높일 수 있는 정책이다. 정부가 전면에 나서 반발 여론을 설득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 건보공단 측은 “고객센터는 기간제나 파견·용역근로자와 달리 민간위탁으로 업무 성격과 공단과의 관계가 전혀 다르고 고객센터에 대한 정부의 직고용 방침도 명확하지 않은 상황”이라며 “형평성 논란 등 공단 내외부의 극심한 반발과 부정적 여론 등 여러 문제를 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접근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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