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이 사랑하는 이 회사가 배상금 폭탄 맞은 까닭은?

정지섭 기자 2021. 1. 30.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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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시설 설치규정 무시한 미국철도회사 '암트랙'
법무부 "2013~2020년 다치거나 불편 겪은 장애인 승객에게 보상하라"
뒤늦게 25억 배상기금 책정
"보상자격 두고 줄소송 이을 것" 관측도

한국의 코레일에 해당하는 미국의 공영 철도회사인 암트랙(AMTRAK·전미여객철도공사)은 조 바이든 신임 대통령 정부에서 잘 나갈 것으로 기대되는 공기업으로 첫손에 꼽혔다. 바이든이 1973년 연방 상원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한 뒤 2009년 부통령에 취임하기 전까지 꼬박 36년을 암트랙 기차를 타고 수도 워싱턴과 자택이 있는 델라웨어주 윌밍턴을 통근했기 때문이다. 그의 열차 사랑 때문에 ‘암트랙 조’라는 별명도 붙었고, 델라웨어의 한 기차역 이름이 ‘조 바이든 역’으로 명명되기도 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부인 질 바이든 여사와 함께 대선 후보였던 작년 9월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의 기차역에서 유세를 하는 모습. /로이터 연합뉴스

바이든 행정부의 지원으로 거액의 예산이 투입돼 고속 열차 도입이나 노선 확충 등의 투자가 활발히 이뤄질 것이라는 전망도 잇따랐다. 하지만 암트랙은 조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하자마자 ‘장애인을 배려하지 않는 몰지각한 공기업’으로 낙인찍히며 배상금을 물어내게 됐다. 1990년 제정된 미국 장애인 권익증진법(Americans with Disablities Act·ADA법)을 준수하지 않고 주요 역 건물의 장애인 편의 시설 확충을 하지 않다가 30년 만에 225만 달러(약 25억1400만원)를 물어내게 된 것이다.

암트랙은 최근 이 금액을 사후 보상금으로 출연하고, 장애인 편의시설 미비로 인해서 부상 등 각종 손해와 불편을 겪었던 승객들로부터 신고를 받기 시작했다. 보상 대상은 2013년 6월 27일부터 2020년 12월 2일 사이에 뉴욕주 허드슨역 등 미 전역 33개 주 78개 기차역을 이용하다가 장애인 편의 시설 미비로 다쳤거나 각종 불편을 겪었던 사람이다. 돈부터 마련해놓고 신원 불상의 피해자들을 찾는 전례없는 사후 보상이다. 어떻게 해서 이런 상황이 벌어지게 된 걸까.

조지 H.W. 부시 대통령이 1990년 6월 장애인권익증진법에 서명하고 있다./AP, ShareAmerica

30년전 고(故) 조지 H.W. 부시 대통령 집권 2년차이던 1990년 6월 26일 역사적인 ADA법이 제정됐다. 5630만명에 이르는 장애인들이 직장과 학교, 교통 등을 아우른 모든 일상생활 분야에서 차별받지 않도록 한다는 취지로 제정됐다. 모든 대중·공공시설들이 장애인이 이용하는데 불편이 없도록 의무적으로 관련 편의 시설을 갖춰야 하는 법적인 근거가 마련됐다. 기차역도 당연히 여기에 포함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기차역의 시설 개선은 지지부진했다.

휠체어 이용자들이 엄두를 낼 수 없는 가파른 계단과 경사, 비장애인 전용으로 설계된 화장실과 주차장, 제대로 된 방향안내판도 하나 없는 역이 허다했다. 표 판매 창구의 턱이 지나치게 높은 곳, 승강장 안전시설이 제대로 갖춰져있지 않아 위험천만한 곳들도 많았다. 이 때문에 장애인들이 안전사고로 다치거나 불편을 겪는 일이 다반사였다. 1990년 ADA법이 통과될 때 암트랙에는 20년 기한이 주어졌다.

미국의 한 기차역에서 승객들이 암트랙 열차에 오르고 있다. /암트랙 홈페이지

법 제정 후 20년이 되는 2010년까지 모든 역사에 장애인 이동을 위한 각종 편의시설을 갖춰놓도록 한 것이다. 암트랙이 만성적인 적자와 재원 부족에 시달리는 공기업이라는 점, 편의 시설 설치 공사에는 상당부분 시일이 소요된다는 점을 감안해서 내린 조치로 풀이됐다. 그럼에도 33개주에 있는 78개 역사는 장애인 편의시설을 갖추지 않은 채 20년이 경과됐다. 열차 이용 장애인 승객들의 부상·불편 사례가 이어졌고, 인권단체들 사이에서는 “해도 너무 한다”며 암트랙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잇따랐다. 복지부동 공기업의 도덕적 해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는 지적도 나왔다. 결국 정부가 칼을 빼들었다.

미 법무부가 암트랙을 ‘위법행위자’로 규정하고 직접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에릭 드라이밴드 법무부 민권부문 차관보는 “교통은 장애인들이 경제·사회·문화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해주는 핵심 축”이라며 “의회가 1990년 ADA법을 통과시키면서 2010년까지 모든 역사(驛舍)의 장애인 편의 시설을 완비하도록 20년 말미를 줬지만, 암트랙은 이를 준수하지 않았다. 장애인 승객들은 참을만큼 참고 기다렸다”고 질타했다.

설경을 배경으로 달리는 암트랙 열차. /Jason Berg, 암트랙 홈페이지

소장(訴狀)을 앞세운 압박에 암트랙은 결국 백기를 들었다. 미 법무부는 법·시장질서를 준수하지 않거나 교란하고 있다고 판단되면 기업·대학·공공기관 등을 가리지 않고 징벌적 성격의 소송을 제기해 규정을 준수하거나 정책을 바꾸도록 압박해왔다. 암트랙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도 그런 맥락에서 진행됐다.

지난달 발표된 미 정부와의 합의에 따라 암트랙은 ADA법상 시설 완비 기한 3년 뒤인 2013년 6월 27일부터 법무부와 합의한 작년 12월 2일 사이에 시설 미비 정도가 심각한 78개 역에서 다치거나 불편을 겪었던 장애인 승객들을 위한 사후 보상기금 225만달러를 출연했다. 암트랙은 지난 29일부터 우편·팩스·이메일·온라인 등으로 피해 접수를 시작했으며 마감 시한은 5월 29일이다. 하지만 보상금은 225만 달러로 한정돼있고 액수도 충분하다고 하기 어려운데, 얼마나 많은 신청이 접수될지 가늠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라 보상 절차가 원활하게 진행될지 의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미국 기차역의 한 매표창구. /암트랙 홈페이지

암트랙은 “역사 편의 시설 미비로 육체적 또는 감정적 손상을 입었던 경우” “해당 역 주변에 살았거나, 방문했거나, 방문하고 싶었던 경우” 등으로 보상 신청 요건을 폭넓게 잡아놓았다. 이 때문에 보상 자격 여부를 두고 별도의 소송이 벌어질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암트랙은 법무부와의 합의에 따라 보상금 외에도 대대적 시설 투자에 나선다. 향후 10년동안 135개 기차역을 장애인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바꾸기로 했다. 이 중 90개 역은 완전히 새로 짓는다. 장애인 승객들의 각종 요청 사항을 신속히 처리하도록 승무원들을 교육하고, 역사 편의 시설 전담을 맡을 부사장직도 신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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