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 이두호는 말했다 "내 닮지 마라. 니 길로 가라."
[경향신문]
“내 닮지 마라. 니 길로 가라.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만화가 이두호 화백(77)은 제자들에게 자유롭게 자기 뜻을 펴라고 가르쳐왔다. 따지고 보면 자신이 걸어온 삶이 그랬다. 그는 중학생 시절부터 만화책을 낼 정도로 젊은 나이에 만화계에 입문했지만, 자신이 진정 원하는 작품세계를 구현하기까지 오랜 기간 고민을 거쳤다. 1996년부터 만화에 ‘청소년 유해 매체’란 오명이 붙으며 논란이 가중되던 시기 만화 심의 철폐에 앞장서다 1998년에는 한국만화가협회장까지 맡은 이유도 자신의 길을 온전히 걷기 위해서였다. <머털도사> 시리즈와 <임꺽정>, <객주> 등 선 굵은 역사만화로 한 시대를 풍미한 그를 1월 26일 경기 부천시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 있는 작업실에서 만났다.
-만화계에 몸담은 오랜 개인사가 어떻게 시작됐는지 궁금하다.
“중학생 때부터 하긴 했지만, 그땐 만화가가 꿈은 아니었고 화가를 꿈꾸면서 그림에 도움이 되려고 그렸다. 그런데 군대 갔다 와서 대학(홍익대 미대)에 재등록을 못 했고, 급하게 생활은 해야 하니까 박기정 선생님 만나서 그때부터 만화에 관심은 가졌는데, 그때까지도 사실 만화가로 살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1970년대 작품들은 장르가 다양한데 일관적이진 않았다.
“그땐 출판사에서 야구·축구만화 그려달라면 야구나 축구할 줄도 모르는데 그려주고 그랬지. 요구대로 별걸 다 그리니까 목적과 수단이 바뀌었다 싶어 회의감이 들었다. 지금보다 편집자들이 힘이 있고 깐깐하게 요구하던 분위기이긴 했지만, 대본소용 만화 화실처럼 심하게 간섭을 당하고 그러진 않아서 그래도 다행이긴 했다.”
-그러다가 1980년대 들어서면서 역사만화를 중심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회의감이 들어서 ‘이렇게 할 게 아니다’ 하는 생각에 친한 동료작가 한희작 선생한테 2년 동안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했지. 물론 스토리 그런 건 내가 짜서 전해주고. 그 2년 동안 작은 방에다 100호짜리 캔버스 갖다 놓고 유화만 그리기도 하고 그러다 약속한 2년이 다 돼가는 거야. 그때 어느 날 같은 화실에서 만화를 그리던 한 선생 모습을 옆에서 봤는데 그 모습이 보기 좋더라고. ‘그려야 한다,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막 들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일종의 살풀이한 시간이었구나 했다. 그러고 나니 전에는 자부심도 없었는데 긍정적으로 생각도 바뀌고 스스로 자긍심도 생겨 만화에 의미가 있더라.”
-이 화백의 작품들은 ‘바지저고리 만화’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역사만화 중에서도 조선시대 배경이 대부분이다.
“그때부터 만화 그리기로 마음먹고 나니 어떤 만화를 그릴지 정해야겠더라. 내가 좋아하는 걸 곰곰이 생각해보니 옛날 신라 진흥왕 때 이야기처럼 역사를 좋아하는데, 그렇다고 한국역사를 총체적으로 다할 순 없으니 조선시대로 정하자고 마음먹었지.”
-고향이 대구 옆 경북 고령 시골인 것도 그런 결정에 영향을 미쳤나.
“고령에서 살다가 6·25전쟁 끝날 무렵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대구로 나와서 쭉 살았다. 시골에 살 때 그 동네 주민 중에 옛날 벼슬깨나 했던 집안사람이 살아서 그 집 손주가 자기가 무슨 우선권이라도 가진 것처럼 거들먹거리고 다녔다. 난 그게 미워서 두드려 팼다가 혼나고, ‘부랑쟁이’ 같은 짓을 많이 했다.”
-작품에 나오는 인물도 권위에 저항하거나 독립적인 인물이 많아서 닮은 듯하다.
“내가 태생이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주인공 중에 잘생긴 인물이 별로 없다. 실존인물이 나오는 <임꺽정>이나 원작이 있는 <객주> 빼고는 거의 없다. 그래서 독자들한테서 ‘왜 이리 못생겼냐’고 항의를 받은 적도 있고, 동료 만화가들이 좀 잘생긴 주인공을 그려보라고 하기도 했다. 나는 그냥 ‘잘생기면 다냐’ 하면서 독자들 눈치 안 보고 웃고 말았다.”
-그런 자세가 1990년대 후반 만화계 심의 논란 때도 표출된 것 같다.
“사실 내가 주제넘게 앞장설 때가 아니었는데 ‘왜 우리가 이렇게 편견에 당해야 하나’ 싶어서 은근히 화가 나더라고. 그때 제일 문제가 된 작품이 이현세 <천국의 신화>와 양영순 <누들누드>였다. 내가 1998년부터 만화가협회 회장도 했지만 한 해 전인 1997년부터는 간행물윤리위원회 윤리위원도 맡았는데 간윤 회의에서 이 두 작품을 문제 삼았다. 반대 목소리를 낸 사람이 나를 포함해 단 둘뿐이었다. 그때 조용히 있다가 손을 들고 2분만 발언하겠다고 한 뒤, <누들누드>는 유럽이나 일본에서 나왔다면 박수받을 작품이고, <천국의 신화>도 이전까지 신화를 만화로 그려보겠다는 발상이 없었을 만큼 대단하고 애들이든 어른이든 봐도 될 내용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지. 그러고 나니까 분위기가 좀 바뀌어서 결국 간윤에선 문제 삼지 않게 됐다.”
-만화가 청소년에게 유해하다는 편견이 강할 때 그에 맞섰지만 <머털도사>를 비롯해 정작 본인의 만화는 그런 시비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지금도 아쉬운 것은 (연재를 시작할 때) 완벽하게 준비를 해놓고 스토리까지 다 써놓고 캐릭터를 차분하게 구상해본 적이 없다는 거다. 머털이가 대표적인데, 갑자기 연재 부탁이 와서 시간 없다고 안 한다고 했다가 세 번이나 부탁을 받아 어쩔 수 없이 하게 됐거든. 매일 일 때문에 밤새던 때였는데 바로 내일까지 8페이지 줘야 한다는 게 급하게 생각났어. 뭘 할까 생각하다가 정 생각이 안 나니까 어릴적 애들끼리 고기잡이하고 진달래 따먹으러 다니면서 ‘구름 타고 신선처럼 살고 싶다’고 얘기하던 기억이 나서 그렇게 급조했지.”
-대표작인 <머털도사>가 그렇게 후다닥 만들어진 줄은 몰랐다.
“애쓴 놈은 안 자라고 아무 데나 키운 놈이 잘 자란다고.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인 건 반응이 없었다. <머털도사>는 첫 연재를 하고 한 3개월 지나니까 편집부에서 원고에 식자 붙일 때 서로 먼저 보자고 난리가 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머털이의 캐릭터도 그렇지만 여러 작품에서 등장하는 주인공 장독대 같은 인물들의 이름은 어떻게 지었나.
“처음 ‘새벗’에 연재할 때 제목이 <도사님 도사님 우리 도사님>이었다. 그런데 그쪽이 기독교 계열이니까 ‘도사’를 바꿔달라고 하길래 ‘연재 안 하면 되지’ 그러다가 결국 <옛날옛적 털삼이>로 바뀌었고, ‘소년경향’에서 전부 다시 그리면서 제목을 <머털도사>로 다시 바꾼 거다. 장독대는 원래는 홀로 독(獨)을 쓰는 ‘독대’로만 이름을 지었다가 어느 날 장독대가 눈에 띄길래 성을 장씨로 붙였지. 또매는 ‘또 매맞을 짓한다’는 뜻으로 그렇게 지었고.”
이두호 화백의 대표작인 <머털도사> 시리즈는 한국사를 주 내용으로 한 교육용 만화로도 인기를 끌고 있고, <임꺽정>과 <객주>는 장편임에도 절판되지 않고 꾸준히 읽히는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다. 80을 바라보는 그는 연재 활동을 계속하고 있지는 않지만, 작업실 한켠에 다 써서 닳아버린 펜촉을 모으는 병을 두고 차곡차곡 채워갈 정도로 손에서 펜과 붓을 놓지 않고 있다. 최근에는 어떤 그림을 그리냐고 묻자 그는 화첩 하나를 꺼내 가로로 길게 이어진 소나무 그림을 보여줬다.
-요즘 어떤 활동을 하는지 근황이 궁금하다.
“연재는 못 한다. 누가 하자고는 하는데 나보다 집사람이 걱정해서…. 대신에 좋아하는 일 이것저것 한다.”
-좋아하는 일이라면 그림인가.
“캔버스도 갖다 놓고 몇장 그리기도 하고, 집 앞 올림픽공원에 가서 소나무를 스케치해 그걸 보고 그림을 그리기도 하지. (화첩 하나를 꺼내며) 여기 자세히 보면 글자가 들어 있다. (한 글자씩 읽으며) 매일 거울은 보면서 마음의 거울은 왜 안 봐?”
-굳이 소나무인 이유가 있나.
“소나무는 자기가 뻗고 싶은 대로 가지를 뻗다가 싫으면 돌아오지. 그래서 모양도 다 다르고 색깔도 다 다르게 그렸다.”
-이 화백의 성격과도 닮은 듯하다. 대학에서 교수로도 제자들을 많이 양성했는데 그때도 개성을 중시했나.
“만협 회장할 때 코 꿰어서 끌려가 한 것처럼 교수도 처음에는 안 하겠다고 고사했다. 가르친다는 데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도 교수가 찾아오고 학교에서도 찾아오니 나는 ‘말씀 같은 말씀을 하세요. 대학도 1년 반 다니고 졸업도 못 했는데 뭘 가르치라는 거냐’ 그랬지. 그러니까 그냥 그림 그리는 거 보여주면 된다고 하더라고.”
-그렇게 만화가가 실제로 어떻게 만화를 그리는지 보여준다고 시작한 게 ‘지옥캠프’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졌다.
“대학교에 가보니까 만화가를 하겠다는 애들이 시간 따지면서 그리는 걸 보고 이렇게 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방학 첫날부터 1주일 동안 하루 14시간 엉덩이 붙이고 같이 그릴 사람은 오너라 하면서 시작했다. 나도 똑같이 그 시간 동안 만화 그리니까 언제든 내 작업 모습 봐도 된다고 했지. 그 캠프가 쭉 이어지다 이현세 선생이 맡고부터는 능력이 좋아서 네이버에서 지원도 받고 한 덕에 세종대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심사를 거쳐 100명씩 모아 진행할 정도가 됐다.”
-교수 때 제자 중에는 누가 제일 떴나.
“하일권이나 국중록, 이젠 그들도 중견이 됐다. 그런데 인사하러 못 오게 한다. 만화가가 작업을 해야지 찾아올 시간 어딨냐고 혼내는데 그래도 억지로 오긴 오더라.”
-제자들이 보통은 스승을 닮게 마련이고 이 화백 고유의 화풍을 잇는 것도 의미가 있을 텐데.
“나는 학생들이나 문하생들에게 ‘내 닮지 마라. 니 길로 가라’ 그랬다. 배움이 끝날 무렵에는 단편 몇개를 순전히 네 스타일 그림으로 그리고 스토리도 직접 짜보라고 했다. 보통은 선생 필체 닮게 마련이지만 오히려 반대로 전혀 닮지 않게 자기 개성 담은 단편 몇 작품을 그리면 자기 스타일이 생기니까.”
-이 화백의 스타일은 선 굵은 역사만화가 대표적인데, 그 안에서도 변화가 있었나.
“내가 만화천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고우영 작가다. 예전에 한번 인터뷰할 때 기자가 나한테 고우영처럼 위트 있고 재미있게는 안 그릴 거냐고 묻더라. 그때 난 ‘몬한다’고 답했다. 난 유행하는 위트를 넣을 줄 모르고 대신 조선시대를 그리기로 작심했으니 당시의 말을 사전 찾아 뒤져가면서 표현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말 공부를 해보려고 시작한 게 <객주>였다.”
-<객주>는 원작 소설도 그렇고 만화도 높은 평가를 받는데 어떤 배경에서 시작하게 된 건가.
“한 연재처와 <객주> 그리자고 얘기가 됐고 김주영 작가를 좀 소개해 달라고 했다. 만나보니 대본소용 만화공장에서 <객주>를 만화화하겠다는 제의가 들어왔다네. 그러면서 김 작가가 묻는 말이 ‘이 선생은 <객주> 왜 그리려고 하냐’ 하길래 난 ‘좀 배우고 싶다’고 했다. 그러니까 ‘이 선생 그림이 마음에 든다’면서 다른 데서 부른 원작료보다 훨씬 적게 받겠다고 하더라. 난 그것보다 조금 더 줬고. 서로 영수증 쓸 생각도 안 하다가 다방에서 나오는 길에 갱지 자른 메모지에다 끄적였지. 그러면서 ‘만화는 만화가 맘대로 그리쇼’ 그러더라고. 나는 ‘너무나 당연한 말씀이죠’ 그러고선 원작과는 다르게 등장인물들 내 맘대로 죽이고 살리고 바꿨어. 다른 소설가들은 되게 까다로운데 김 작가는 전혀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나랑 마음이 맞더라.”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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