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중'에서 '곤혹'으로..문재인 정부 '대일 강경책' 선회하나?
[경향신문]
갈등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한일관계는 상호 보복이 오가며 수교 이후 최악의 상태다. 문제의 근원은 일본의 역사적 가해다. 한국 정부는 역사와 경제, 안보 등을 분리하는 투 트랙 대응 전략을 세웠다. 하지만 역사문제를 다룬 사법부 ‘판결’과 함께 전략이 사라졌다. 양국의 경제·안보 협력은 멈췄다. 국가 간 문제를 해결하는 외교도 작동하지 않고 있다. 일본과의 모든 관계가 역사문제에 동조되는 사실상 원 트랙 상황이 됐다.
취임 이후 문재인 대통령은 일본과의 역사문제에 강경했다. 역사문제를 다룬 사법부 판결은 존중했다. “가해자인 일본 정부가 ‘끝났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며 피해자 중심주의를 강조했다. 하지만 임기를 1년여 남기고 상황이 변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지난 1월 21일 “일본과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미래지향적인 관계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교착상태에 빠진 한일관계에 변수가 생겼다.
■사법부 판결에 종속된 외교
일본에 강경했던 문재인 대통령의 태도가 미묘하게 변했다. 발단은 지난 1월 8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12명이 일본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승리한 것이다. 서울중앙지법 민사34부(재판장 김정곤)는 “피고 일본국은 원고들에게 각 1억원씩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이에 가토 가쓰노부 일본 관방장관은 즉각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맞섰다. 이 상황을 두고 문 대통령은 지난 1월 18일 “솔직히 조금 곤혹스러운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역사 문제를 둘러싼 소송에서 문 대통령의 기존 입장은 “사법부 판결을 존중한다”는 것이었다.
이날 또 다른 발언에서도 변화는 감지됐다. 문 대통령은 “(일본 자산이) 강제집행 방식으로 현금화된다든지 판결이 실현되는 방식은 양국관계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밝혔다. 이 발언에 충격받는 것은 2018년 일본 미쓰비시중공업 등을 상대로 대법원에서 승소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다. 이들은 미쓰비시중공업의 국내 자산 강제매각을 진행하고 있다. 삼권분립에 따라 사법부 판결에 개입할 수 없다던 기존 입장이 미묘하게 달라진 것이다.
대통령 발언의 변화는 사법부 ‘판결’ 뒤에 숨은 ‘대일 외교’의 현실을 보여준다. 손열 동아시아연구원 원장은 “법적 해결은 외교적 노력을 모두 한 뒤 최후 수단으로 선택해야 한다”며 “정부는 강제동원이나 위안부 재판이 진행되는 것을 보고만 있다가 뒤늦게 한일관계가 중요하다는 인식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박정진 일본 쓰다주쿠대 교수는 “삼권분립도 중요하지만 일본 정부를 향해 이 원칙만 말하는 것은 행정부 차원에서 해야 할 외교적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변화는 기존 입장과도 모순을 만든다. 문 대통령은 2015년 체결된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를 두고 “한국 정부는 그 합의가 양국정부 간 공식적 합의였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말했다. 위안부 합의는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해결’ 원칙에 입각해 있다. 이는 위안부 합의가 “절차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중대한 흠결이 확인됐다”며 피해자 입장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문 대통령 발언과는 배치된다.
그동안 정부는 “위안부 합의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합의를 파기하겠다는 뜻은 아니다”는 모호한 입장을 밝혀왔다. 문 대통령은 이를 ‘인정 한다’는 것으로 분명히 했다. 일본은 국제법 위반이라는 이유로 위안부 소송 판결에 항소하지 않았다. 대신 지난 1월 23일 모테기 도시미쓰 일본 외무대신은 위안부 합의 준수를 촉구하는 담화를 냈다.
■한일관계 개선과 대북정책
그렇다면 대일 강경책을 유지하던 정부는 왜 임기 1년여를 남기고 관계 개선에 나설까. 전문가들은 ‘미국 바이든 정부 출범’과 ‘대북정책 추진’을 이유로 꼽는다. 이원덕 국민대 교수는 “대일정책 변화는 미국 바이든 정부 출범에 호응하는 성격이 강하다”며 “바이든 정부는 한·미·일 공조 체제를 강화해 중국을 견제하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그는 “사실 위안부 합의에 바이든이나 웬디 셔먼 같은 미국 정부 인사 상당수가 직·간접적으로 관여돼 있다”며 “한국 정부는 이들과의 관계를 위해서라도 일본과 관계 개선을 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손 원장 역시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한일 공조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높다”며 “지난해 가을 바이든이 차기 미국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정부는 트럼프 때보다 일본과의 관계 개선 요구 압박이 강해질 것으로 판단한 것 같다”고 말했다. 결국 정부가 미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한일관계 개선의 외교적 우선순위를 높였다는 것이다.
정부의 한일관계 개선은 ‘대북정책’이라는 거시 전략과도 연결된다. 이 교수는 “정부는 지난해 말부터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재가동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며 “이를 위해 주목한 것이 도쿄올림픽”이라고 말했다. 그는 “도쿄올림픽 전후로 남북, 북미, 북일 관계 정상화를 위한 회담 추진이 가능하다”며 “이를 위해 박지원 국정원장, 김진표 의원 등이 일본을 방문해 한일관계 개선부터 시도한 것”이라고 말했다. 양기호 성공회대 교수 역시 “대북정책의 종속변수로 한일관계가 있다”며 “대북정책 추진을 위한 환경조성으로서 일본과의 관계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러한 시도가 실제 관계 개선으로 이어질 수 있느냐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현상 유지’와 ‘개선 추진’으로 의견이 갈린다. 양 교수는 “일본 정부는 과거사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관계 개선에 나서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며 “더 이상 상황이 악화되지 않도록 관리해 차기 정부로 문제를 넘겨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가 한국과의 관계 개선에 소극적일 것이라는 이유로는 ‘선거’가 지적됐다. 박 교수는 “일본 스가 총리 잔여 임기를 고려할 때, 올해 중의원 해산 및 총선거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며 “일단, 선거 국면에 돌입하면 한국의 대일정책에 극적인 변화가 있지 않는 한 한일관계가 이슈가 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손 원장은 “스가 총리가 선거를 위해 한국 때리기에 나설 것이란 해석도 있지만 코로나19 대응과 경제 회복에 올인할 것으로 본다”며 “한일관계 문제에 힘이 분산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은 “한일관계는 진보정권인 문재인 정부에서 크게 개선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과의 역사문제를 중시하는 사람들 다수가 문재인 정부 지지층에 포함돼 있다”며 “다른 어떤 정부보다 문재인 정부가 이들을 설득해 과감한 대일 정책을 추진하기에 수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문재인 정부에서 꼬인 일본과의 관계를 직접 풀겠다는 자세로 적극 나서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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