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욕감 커져가는 푸틴의 선택은
국내외 여론 눈치를 봐야 하는 푸틴의 고민 깊어져
무시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다.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없다. 그 이름을 입에 담기조차 싫은 자. ‘현대판 차르’라는 별칭까지 붙은 블라디미르 푸틴(68) 러시아 대통령에게도 그런 인물이 있다. 알렉세이 나발니(44).
나발니는 모스크바 태생의 변호사이자 정치활동가다. 반부패 재단을 만들어 푸틴과 집권 통합러시아당, 그 지지 기반인 올리가르히(신흥재벌 세력)의 부패와 정경유착을 폭로하고 민주화 시위를 주도해왔다. 현재 푸틴에 가장 강력하게 맞서는 정당 ‘러시아의 미래’의 공동창립자이자 대표다. 2013년 모스크바 시장 선거에서 27.2%를 득표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2018년 대선에선 러시아 선거관리위원회가 나발니의 ‘횡령죄’ 유죄판결(집행유예)을 이유로 출마 자격을 박탈했다. 나발니는 푸틴의 정치적 술수라고 주장한다.
주말이던 2021년 1월23일(이하 현지시각), 러시아 전역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수도 모스크바를 비롯해, 서쪽 끝 상트페테르부르크부터 극동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주요 도시 100여 곳에서 ‘나발니 석방’을 요구하는 동시다발 시위였다. 참가자가 최소 10만 명(러시아 독립언론)에서 많게는 30만 명(나발니 쪽 주장)으로 추산됐다. 현지 언론들은 이날 러시아 전역에서 체포된 시위자만 3500명이 넘는다고 보도했다.
매주 시위 예고한 나발니 쪽
이날 시위에 불을 댕긴 건, 일주일 전 나발니의 귀국과 체포였다. 1월17일, 나발니는 독일에서 귀국편 비행기에 올랐다. 앞서 2020년 8월 국내에서 비행기로 이동하던 중 의문의 독극물에 중독돼 사경을 헤매다가, 다음달 독일로 이송돼 치료받고 가까스로 생명을 건진 지 다섯 달 만이었다. 명백한 암살 시도였으나 배후는 확인되지 않았다. 모스크바로 돌아온 나발니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체포돼 수감됐다. 앞서 밝힌 ‘횡령죄’ 집행유예 의무를 위반했다는 이유였다.
나발니는 독일에서 치료받을 때 독일 시사주간 <슈피겔> 인터뷰에서 “내가 돌아가지 않는 것은 푸틴이 자신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신변 위협을 무릅쓴 귀국을 예고했다. 수감된 다음날엔 지지자들에게 트위터 메시지로 “두려워 말고 거리로 나가라.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미래를 위해 나가라”고 독려했다.
나발니의 ‘옥중 투쟁’은 시위 촉구에 그치지 않았다. 1월19일, 흑해 연안에 1천억루블(약 1조5천억원)을 들여 지은 초호화 리조트 단지가 푸틴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탐사보도물 동영상을 공개해 파문을 낳았다. ‘푸틴을 위한 궁전’이란 제목이 붙은 1시간52분 길이의 동영상은 하루 만에 조회 수 500만 회를 넘겼다. 1월21일엔 푸틴이 내연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로 알려진 루이자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공개했다. 1월26일, 푸틴은 이른바 ‘푸틴 궁전’의 소유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푸틴의 모욕감은 나날이 커지는데
나발니의 행보는 목숨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도박에 가깝다. 푸틴이 21년째 집권 중인 러시아에서 푸틴을 위협하는 비판자와 정적은 살아남기 힘들었다. 더욱이 푸틴은 2020년 헌법 개정으로 종신 대통령의 길을 터놓았다. 푸틴 집권 이후 지금까지 러시아에서 암살당하거나 의문사한 야권 지도자와 비판적 언론인, 인권 변호사는 최소 40명이 넘는다. 나발니 자신도 암살 위기에서 살아남았으나, 위축되지 않은 대담함과 지지자들의 대규모 시위에 힘입어 저항의 구심으로 정치적 위상을 더욱 탄탄히 다지게 됐다. 나발니는 러시아의 조지아 침공(2008년)과 우크라이나령 크림반도 합병(2014년)을 지지하는 등 러시아 민족주의 성향을 보인 까닭에 지지층을 확장할 여지도 있다.
나발니 쪽은 ‘반푸틴 민주화’ 주말 시위를 계속 이어갈 태세다. 푸틴이 ‘푸틴 궁전’의 소유 의혹을 부인한 바로 그날, 나발니의 수석보좌관 레오니트 볼코프는 “1월31일 낮 12시. 러시아의 모든 도시. 나발니의 자유를 위하여. 모두의 자유를 위하여. 정의를 위하여. 자세한 내용은 곧 공지.”라는 트위터 메시지를 띄웠다. “23일 시위의 경험은 자유민이 공포(푸틴의 유일한 무기)보다 더 강하다는 걸 보여준다”고도 했다. <모스크바 타임스>는 “2차 시위는 나발니가 최대 3년6개월 징역형을 받을 수 있는 2월2일 재판을 앞두고 열린다”고 보도했다.
러시아 당국은 ‘나발니 석방’ 시위가 본격적인 ‘푸틴 퇴진’ 시위로 번지는 것을 차단하는 데 촉각을 곤두세웠다. 유럽의 러시아 관련 정보기관의 한 전문가는 최근 미국 언론에 “나발니가 독살 위기를 넘긴 뒤 매번 푸틴을 압도하며 모욕감을 안기고 있다”며 “나발니의 생존은 (푸틴에게) 큰 문제”라고 말했다. 그러나 당장 푸틴이 나발니를 제거할 가능성은 작아 보인다. 수감 중인 그를 살해하는 것은 반정부 시위에 기름을 끼얹는 격인데다, 전세계에서 지켜보는 눈을 의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푸틴은 최근 10년 새 나발니의 강력한 존재감에도 그 이름을 언급조차 한 적이 없다. 의도적인 무시다.
정재원 국민대 교수(러시아·유라시아학과)는 “지금 러시아에선 나발니가 사실상 유일한 푸틴의 대항마”라며, 그러나 “현재 러시아가 맞닥뜨린 도전을 푸틴이라는 한 독재자의 문제로만 협소하게 봐선 안 된다”고 짚었다. 러시아는 2000년 중반 고유가 행진을 기반으로 경제성장을 이룬 뒤 석유·가스 수출 의존도가 높은 경제구조의 다각화와 지역 균형발전을 추구했다. 이를 위해 푸틴은 서구와의 관계 개선을 기대해왔다. 정 교수는 “푸틴 스스로 독재자들의 말로를 너무 잘 아는 만큼, 당장 무리수를 두기보다 퇴임 이후를 염두에 둔 유화책을 찾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문제는 푸틴의 희망과 현실이 다르게 흘러간다는 점이다. 특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내전 개입과 크림반도 합병, 시리아 내전 개입 등 지정학적 팽창 전략은 서구의 강력한 견제와 경제제재 강화를 불렀다. 2021년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 시대가 끝나고 조 바이든 정부가 출범한 것도 푸틴에겐 달갑지 않다. ‘인권과 민주주의’ 프레임에 발목 잡힐 게 뻔하다. 푸틴은 안팎의 적대적 환경에서 ‘강력한 지도자’ 소명에 더 집착할 가능성이 크다.
‘강력한 지도자’에 더 집착할 듯
이런 가운데 푸틴이 권력 이양을 진행 중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1월27일 우크라이나 신문 <키예프 포스트>는 자국의 정보국 백서를 인용해 “푸틴의 건강 문제가 직무를 수행하기 어려울 만큼 명백히 나빠지고 있으며, 권력 이양이 이미 진행 중”이라고 보도했다. 우크라이나 정보국은 “푸틴이 퇴임하더라도 러시아의 글로벌 야망이나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라며 “중기적인 시나리오의 기본은 푸틴이 (권력의 정점에) 있든 없든 러시아에서 ‘푸티니즘’이라는 국가 모델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에 대해 러시아 대통령실 대변인은 “논평할 게 하나도 없는 헛소리”라고 일축했다.
갈 길이 먼데 날이 저물기 시작하면 마음이 바쁘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지금, 공은 나발니가 아니라 푸틴에게 넘어가 있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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