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대립으로 끝나선 안 될 '알페스' 논란.."사이버 성폭력 재인식 계기 돼야"

김태영 기자 youngkim@sedaily.com 2021. 1. 30.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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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 그룹 짝지은 2차 창작물 '알페스'
일부 도 넘은 내용들로 도마 위에 올라
현행법상 성범죄로 처벌하기는 어려워
"'온라인 에티켓' 관점으로 알페스 봐야"
"사이버 성범죄 인식 제고로 이어지길"
청와대 홈페이지에 지난 11일 올라온 알페스 관련 국민청원. /청와대 홈페이지 캡처
[서울경제]

실존 인물을 커플 형태로 짝지어 등장시키는 2차 창작물, 이른바 ‘알페스(RPS·Real Person Slash)’가 남긴 논란은 현재진행형이다. 청와대 홈페이지에 지난 11일 ‘남성 아이돌을 성적 대상화하는 알페스를 처벌해 달라’는 국민청원이 올라오고 관련 문제가 공론화된 이후, 알페스 110여 건에 대한 수사가 의뢰돼 경찰이 수사에 착수했다. 이 과정에서 ‘여성 팬들이 남성 아이돌을 성착취하고 있다’는 프레임이 강조되며 논쟁은 성 대결로 비화됐다. 전문가들은 소모적 갈등을 경계하면서 이번 논란을 계기로 다양한 형태의 사이버 성폭력에 대한 인식이 제고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30일 대중문화계에 따르면 알페스는 1970년대 후반 영화 ‘스타 트렉’의 팬들이 등장인물 ‘커크’와 ‘스팍’을 활용해 소설을 만든 것이 시초일 정도로 오래된 하위 문화다. 인물들을 엮을 때 각 이름 사이에 문장 부호 ‘슬래시(/·Slash)’를 넣어 ‘커크/스팍’이라는 식으로 표기하면서 슬래시라는 명칭이 붙었다. 국내에서는 ‘팬픽’이라는 명칭으로 널리 알려졌다. 정민재 대중음악 평론가는 “알페스는 팬들이 대중 문화를 소비하는 하나의 방식”이라며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서 알페스가 개그 소재로 쓰이고, 여성 아이돌도 알페스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상황에서 모든 알페스를 ‘여성들이 행하는 범죄’라는 식으로 몰아가는 것은 위험한 접근”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지난 2016년 MBC TV 프로그램 ‘무한도전’에는 출연진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팬픽이 언급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 ‘트와일라잇’의 팬픽으로 출발한 소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전세계적인 인기에 힘입어 영화화되기도 했다.

TV 프로그램 '무한도전' 공식 트위터에 지난 2016년 6월 올라온 이미지. /사진=MBC 무한도전 공식 트위터

문제는 적지 않은 알페스에 성행위를 노골적으로 묘사하는 장면들이 나오는데, 등장인물이 아이돌 등 실존 인물이라는 점이다. 당사자가 불쾌감이나 성적 수치심을 느낄 위험이 있는 것이다. 도를 지나친 알페스는 성범죄로 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관련 논의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은 “딥 페이크 기술이 그 자체로는 불법이 아니지만 기술을 악용한 일부 영상이 성범죄에 해당되는 것처럼 알페스도 마찬가지”라며 “당사자가 원하지 않는데도 포르노 수준의 소설과 그림에 등장시키면 그건 성범죄”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현행법상 도를 넘은 알페스라 할지라도 성범죄로 처벌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 법조계의 시각이다. 성폭력처벌법은 특정 인물이 등장하는 성적 목적의 ‘허위 영상물·음성물’을 당사자의 의사에 반해 제작·반포할 시 처벌하는데 처벌 대상에 글이나 그림은 없기 때문이다. 조현삼 서한파트너스 변호사는 “정보통신망법상 음란물 유포죄는 실존 인물 등장 여부와 상관 없이 내용이 음란할 때 적용되는 것이기에 알페스도 내용이 과하면 음란물 유포죄를 물을 수 있다”면서도 “음성이나 영상이면 모르겠지만 글 형태로 되어 있는 알페스라면 성범죄로 보고 처벌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하 의원은 성폭력처벌법의 해당 조항에 글, 그림 등을 처벌 대상으로 추가하는 내용의 법안을 준비 중이다. 이른바 ‘알페스 처벌법’이다.

2012년 방영된 TV드라마 '응답하라 1997'에서 주인공이 쓴 '팬픽'을 학교 선생님이 읽어보는 장면. /방송화면 캡처

일각에서 ‘남자 아이돌을 성착취하는 알페스는 제 2의 n번방’이라고 주장하며 알페스 문제가 성대결로 번진 가운데 보다 발전적으로 논의를 이어가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은의 변호사는 “알페스는 젠더 대립이라기보다는 온라인 에티켓에 대한 문제”라며 “연예인처럼 공적 영역에 있는 사람들의 재능, 매력을 소비하는 것과 그들을 성적 대상화하는 것은 다른데 그동안 이 차이에 대한 논의가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서승희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대표 또한 “사이버 성폭력이 글, 말 등 여러 형태로 일어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현행법은 촬영물 중심으로 돼 있어 한계가 크다. 만약 알페스 금지법이 생긴다면 그 법으로 도움받을 여성이 더 많을 것이라 본다”며 “알페스 관련 논의가 부족한 법을 정비하고 사이버 성폭력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좋을 것"이라고 했다.

/김태영 기자 youngki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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