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SK 소송 '부끄럽다'며 공개 개입 나선 총리 [재계 인사이드]
美정치권서 해결 요구한다며 "정말 부끄럽다"
양사 경영진에 "낯 부끄럽지 않냐" 호통도
재계 "민간기업 소송에 공개 개입..부적절"
“제가 양사 최고 책임자와 연락을 했습니다. ‘낯 부끄럽지 않습니까. 국민들께 이렇게 걱정을 끼쳐드리면 됩니까. 빨리 해결하십시오’ 권유했는데 아직도 해결이 안 되고 있습니다.”
지난 28일 정세균 국무총리가 방송기자클럽 초청토론회에 나와 이런 말을 했다. 여기서 양사는 LG에너지솔루션(옛 LG화학 전지사업본부)과 SK이노베이션이다. 이들은 전기차 배터리 기술을 놓고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에서 영업비밀 침해 소송, 미 델라웨어주(州) 연방법원에서 특허침해 소송을 벌이고 있다. 정 총리는 미 정치권도 두 기업의 원만한 문제 해결을 요청한다면서 “정말 부끄럽다”고까지 했다.
지난 2019년 4월 LG의 제소로 시작된 ‘세기의 소송전’은 햇수로 3년째에 접어들었다. 오는 2월 10일 최종 판결이 나온다. 결과에 따라 어느 한 쪽은 큰 타격이 불가피하다. 최악의 경우 전기차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미국 수출 자체가 막힐 수 있어 심각하다. 정 총리가 공개적으로 양측에 합의를 압박한 것도 소송 결과가 자칫 ‘K 배터리’ 위축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럴 가능성이 작지 않다. 두 기업이 서둘러, 원만히 사태를 매듭지어야 하는 이유다.
그럼에도 정 총리의 발언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의 기업관이 어두웠던 관치(官治) 시절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기업인 출신(1978~1995년 쌍용그룹 근무)이라는 총리의 발언이기에 충격파가 더 크다.
정 총리는 양사 경영진에 연락해 ‘낯 부끄럽지 않느냐. 빨리 해결하라’고 했다고 직접 말했다. 전 국민이 지켜보는 생방송에서 마치 무용담 얘기하듯 자신의 행위를 읊은 것이다. 정 총리가 부처 장관들에게는 그렇게 말 할 수 있을지언정(하긴, 그는 자영업자 손실보상 제도화에 신중해 하는 기획재정부를 향해 “이 나라가 기재부의 나라냐”라고 호통을 쳤다), LG와 SK는 엄연히 민간 기업이다. 영업비밀과 특허 침해 여부를 놓고 소송을 벌이는 기업 경영진에 연락해 합의를 압박(이정도면 중재가 아니다) 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을 자랑하듯 공개한 그의 행위를 재계는 쉬 납득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배터리가 아니라 메모리 반도체 기술을 놓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미국 ITC에서 소송전을 벌여도 그것이 정말 낯 부끄러운 일이냐는 것이다. 국내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신성장 분야 첨단 기술을 놓고 당당하게 특허 경쟁을 벌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오히려 자랑스러운 일 아니냐는 반문도 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기업의 자율 경영과 재산권에 대한 인식이 바닥 수준”이라고 비판했다. 이병태 카이스트 교수는 정 총리의 발언을 두고 “바로 이런 행위들 때문에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나타나는 것”이라면서 “국내 글로벌 기업이 기술 개발을 했는데 이를 도용당해도 정치적 압력에 그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다면 어느 기업이 기술 개발을 하고, 어느 누가 한국 기업에 투자를 하겠느냐”고 꼬집었다.
총리가 ‘K배터리’를 언급하며 기업들에 애국심을 강요한 것도 듣기 거북하기는 마찬가지다. 급성장하는 글로벌 전기차 배터리 시장의 3분의 1을 점유하고 있는 ‘K배터리’는 LG에너지솔루션·SK이노베이션·삼성SDI 3사가 기울인 피나는 노력의 결과물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LG와 SK는 국내 기업이긴 하지만, 이들은 글로벌 기업이다. 한국 기업이라는 동질감은 있겠지만, 글로벌 시장에서는 국적 구분이 필요 없는 경쟁사다. 이들은 국내보다 해외 시장에서 일으키는 매출이 더 크다. 이런 두 기업을 향해 “작은 파이를 놓고 싸우지 말고 큰 세계 시장을 향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총리가 충고(?)하는 것은 보기 민망한 일이다.
오히려 지식재산권 침해 사안에 대한 우리 정부의 단호한 입장 표명이 우리 기업들이 보유한 핵심 기술을 호시탐탐 넘보는 후발 주자들에 대한 무언의 압박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을 곱씹을 필요가 있다. 최종 판결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K’자(字)만 붙으면 대동단결해 소송을 풀어야 하는 것인가.
두 기업을 향해 “정말 부끄럽다”고 한 정 총리의 발언을 다룬 한 기사에는 이런 댓글이 달렸다.
“당신이 더 부끄럽다.”
정 총리는 왜 부끄럽다는 얘길 들었을까. 혹, 민간 기업을 향해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이래라 저래라’ 해서는 아닐까. 세계 시장을 주름잡는 기업인에게 ‘낯 부끄럽지 않냐. 빨리 해결하라’고 얘기할 정도로 그들을 자신의 부하쯤으로 생각하는 총리의 마인드가 너무 부끄러웠던 것은 아닐까.
/한재영 기자 jyha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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