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만나는 북한 문화유산] ⑮ 개성의 세계문화유산

정창현 머니투데이미디어 평화경제연구소장 2021. 1. 30.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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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500년 도읍지로 흥망성쇠의 유적 간직
2013년 세계문화유산 등재 이후 보존·관광사업 활기

[편집자주]북한은 200개가 넘는 역사유적을 국보유적으로, 1700개 이상의 유적을 보존유적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지역적 특성상 북측에는 고조선과 고구려, 고려시기의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지난 75년간 분단이 계속되면서 북한 내 민족문화유산을 직접 접하기 어려웠다. 특히 10년 넘게 남북교류가 단절되면서 간헐적으로 이뤄졌던 남북 공동 발굴과 조사, 전시 등도 완전히 중단됐다. 남북의 공동자산인 북한 내 문화유산을 누구나 직접 가 볼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대하며 최근 사진을 중심으로 북한의 주요 문화유산을 소개한다.

(서울=뉴스1) 정창현 머니투데이미디어 평화경제연구소장 = 고려의 500년 도읍지 개성(개경)은 고려가 멸망과 함께 쇠락의 길을 걸었다. 고려 말의 유학자 야은(冶隱) 길재(吉再)는 그러한 개성을 둘러보고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匹馬)로 도라드니/ 산천(山川)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 듸 업다/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라고 읊었다.

태종 이방원(李芳遠)의 왕자 시절 스승이자 고려 말의 혼란한 정치를 개탄하며 치악산에 들어가 은거했던 운곡 원천석(元天錫)은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秋草)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적(牧笛)에 부쳤으니/ 석양에 지나는 객(客)이 홀로 눈물 겨워하노라"라고 고려의 흥망을 회고하기도 했다.

서울에서 불과 70km 떨어졌지만 휴전선 장벽에 가로막혀 여전히 가깝고도 먼 도시다. 2007년부터 1년 정도 개성관광이 진행돼 11만 명이상의 남쪽 관광객이 찾기도 했지만 벌써 중단된 지 12년이 넘었다.

201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북한이 신청한 '개성역사유적지구'에 대해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결정했다. 개성역사유적지구에는 개성성 성곽, 개성남대문, 만월대, 개성첨성대, 숭양서원, 표충비, 선죽교, 고려성균관, 왕건왕릉, 공민왕릉, 칠릉떼, 명릉떼 등 12개 개별유산이 포함됐다. 이때부터 개성의 역사유적에 대한 보존과 국제관광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북한은 2003년 개성직할시를 개성특급시로 축소해 황해북도로 편입시켰다가 2018년경 다시 직할시(특별시)로 변경하고 개풍구역(과거 개풍군)과 판문구역(과거 판문군)을 포함시켰다.

송악산 능선에 남아 있는 발어참성(勃禦塹城)의 서쪽 성곽 모습. 발어참성은 고려가 성립되기 전인 896년에 축조된 성으로 외성 성벽을 겸하고 있는 북벽, 서벽과 동벽의 북쪽 일부 구간만이 남아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30.© 뉴스1

개성시 북쪽에는 진산(鎭山)인 송악산이 있고, 서쪽에는 지네산(오공산), 남쪽에는 용수산, 동쪽에는 부흥산이 솟아 있다. 개성시를 둘러싸고 있는 이 산들을 이어 쌓은 것이 개성성(개성외성 또는 나성이라고도 함)이다.

고려는 수도인 개경을 방위하기 위해서 초기부터 여러 성곽을 쌓았다. 궁성, 황성, 외성(나성), 그리고 1392년(조선 태조 2)에 완공된 내성(반월성)이 있었다. 이러한 성곽들은 자연지세를 그대로 이용해 축성됐다.

918년 고려를 건국한 왕건이 919년(태조 1) 수도를 개성으로 옮기면서 발어참성 안의 만월대에 궁성을 쌓고 궁궐을 새로 지었다. 궁성은 정궁인 본궐(만월대 등으로 불림)과 국왕과 관련된 시설들을 둘러싸고 있다. 궁성에는 동서남북으로 4개의 문이 있었다. 황성은 궁성을 둘러싸고 있는 성곽으로, 성 안에는 중앙관청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황성은 송악산을 주산으로 해서 쌓은 발어참성(勃禦槧城)을 기반으로 쌓았다. 발어참성(국보유적 제129호)은 898년 도읍을 철원에서 송악(개성)으로 옮긴 후 905년 다시 철원으로 천도할 때까지 태봉(泰封)의 도성이었다.

신라 말 궁예(弓裔)는 후고구려를 세웠고, 후에 국호를 태봉으로 바꿨다. 발어참성은 896∼898년에 왕건(王建)이 궁예의 명을 받아 축성했고, 둘레가 약 4.7km 정도 됐다. 내성과 외성 성벽을 겸하고 있는 북벽과 서벽, 그리고 동벽의 일부는 돌로 쌓았고, 나머지는 흙으로 쌓았다. 고려 건국 후 발어참성은 궁성을 지키는 황성 역할을 했다.

개성성(외성)의 서쪽 성곽 모습. 개성성에는 동서남북의 4대문과 중문 8개, 소문 13개가 있었고 중요한 성문에는 옹성과 치(雉)를 쌓았다. 현재 성문은 모두 없어지고 터만 일부 남아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30.© 뉴스1

외성(국보유적 제130호)은 궁성, 황성, 그리고 일반 거주지인 5부방리(五部坊里) 등을 포괄하는 성곽으로 거란의 침략에 방비하기 위해 쌓았다. 11세기 초 거란의 침입이 있은 뒤 강감찬(姜邯贊)의 건의에 따라 1009년(고려 현종 즉위년) 공사가 시작되어 착공 21년 만인 1029년(현종 20)에 완공됐다.

개성성 서쪽 성곽 시작부분에 세워져 있는 세계문화유산 표식비.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30.© 뉴스1

외성은 송악산 남쪽 사면과 남산을 둘러 시가지 전체를 포위하듯이 쌓았는데, 둘레는 약 23km, 성벽의 높이는 약 3~4m 정도 된다. 30만 이상의 노동력이 동원됐으며, 성벽의 재료는 주위 조건에 따라 돌 혹은 흙을 사용했다. 외성에서 돌로 쌓은 부분은 북쪽 송악산 능선의 성벽으로부터 서쪽 눌리문 부근까지의 구간으로, 길이는 5.5km에 달한다. 나머지 17.5km에 해당하는 성벽은 모두 토성이다. 조선시대 한양성이 약 18km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외성의 둘레가 23km이었다는 것은 그 규모가 상당히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사> '악지'에는 "거란이 개경에 침입해서 궁궐을 불태웠다. 현종이 개경을 수복하고 나성을 쌓자 나라 사람들이 기뻐서 노래(金剛城)를 불렀다"라고 기록돼 있다.

내성은 황성과 외성 사이에 쌓은 성곽이다. 1391년부터 약 2년에 걸쳐 쌓은 내성은 고려 말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 등을 겪은 후 외성 안의 주요 부분을 방어하기 위하여 축조한 것이다. 외성의 서쪽 성벽 눌리문 부근에서부터 능선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와 남대문과 동대문을 거쳐 북쪽 성벽 북소문 부근까지 약 11km로 뻗어 있다. 현재 내성은 남대문, 건물터 등이 일부 남아 있다.

내성의 서쪽 문이었던 눌리문(영추문). 발어참성과 내성, 외성이 만나는 지점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30.© 뉴스1

내성의 정남문인 남대문(국보유적 제124호)은 1393년에 완성됐고, 1900년(고종 37)에 고쳐지었으나 6·25전쟁 때 파괴되어 1954년에 복원됐다. 남대문은 화강암 축대 위에 세운 단층 문루로, 축대의 한가운데에 홍예문을 냈다. 문루는 정면 3칸(13.63m), 측면 2칸(7.96m)으로 지어졌다. 고려 말의 건축기법을 잘 보여주는 문루로 평가된다.

내성의 정남문인 남대문 정면 모습. 현판은 조선전기의 명필인 석봉 한호(韓濩)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30.© 뉴스1
내성의 정남문인 남대문 뒷면 모습.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30.© 뉴스1

문루 안에 원나라 장인들이 만든 연복사종(演福寺鐘, 국보유적 제136호)이 보존되어 있다. 이 종은 1346년(고려 충목왕 2) 원나라 종장(鐘匠)이 만들어 고려시대에 창건된 개성 연복사에 걸었던 범종으로, 1563년(조선 명종 18)에 연복사의 화재 때문에 개성 남대문루에 옮겨 걸었다. 국립 경주박물관에 있는 성덕대왕 신종보다 약간 작은 거종(巨鐘)으로 조선시대에는 새벽 4시와 밤10시 성문을 열고 닫을 때 종을 쳐서 알렸다는데 그 소리가 매우 맑아 100여 리까지 퍼졌다고 전한다.

내성의 남문인 남대문에 옮겨져 걸려 있는 연복사종. 14세기에 주조된 동종(銅鐘)으로 지름 1.9m, 높이 3.12m, 두께 0.23m, 무게 약 14톤의 큰 종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30.© 뉴스1

궁성 안에는 왕이 거주하는 궁궐이 있었다. 그러나 919년부터 1361년까지 있던 고려의 왕궁은 1361년(고려 공민왕 10) 홍건적의 침입으로 전부 불탄 후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왕궁터(만월대터, 국보유적 122호)는 개성시 서북쪽에 솟아있는 송악산의 남쪽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흔히 고려 궁궐(법궁, 정궁)의 이름은 만월대라고 알려져 있다. 만월대라는 이름은 원래 궁성 안에 음력 정월보름달을 바라보기 위해 만들어 놓았던 망월대(望月臺)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만월대란 이름은 고려 궁궐이 폐허로 변한 조선시대에 들어와 붙여진 것이다.

12세기에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자신이 보고들은 경험을 글과 그림으로 남긴 서긍(徐兢)의 '고려도경'에도 궁궐의 전각 이름만 나올 뿐 정작 궁궐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고려사'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명칭은 '본궐(本闕)'이다. 중국 당, 송, 원나라처럼 궁궐의 이름이 따로 없었을 가능성도 있다.

왕궁의 궁전들은 크게 중심 건축군과 서부 건축군, 동부 건축군으로 갈라진다. 중심 건축군은 3개의 큰 궁전건물과 기타 부속건물들로 구성돼 있었다. 현재 중심 건축군의 맨 앞에는 길이가 60m를 넘고 높이가 7.8m나 되는 웅장한 축대가 있다. 이 축대에는 중심 건축군으로 오르는 33단으로 된 4개의 계단이 있다.

고려 왕궁터인 만월대로 올라가는 4개의 계단. 33단으로 된 4개의 계단을 오르면 기본 정전인 회경전터가 나온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30.© 뉴스1
만월대터 전경. 만월대는 고려왕조 개국부터 멸망에 이르는 470여 년 동안 왕궁으로 사용됐던 곳이다.© 뉴스1

이 계단 위에 기본정전(왕이 공식적인 의식을 거행하는 궁전의 한 부분)인 회경전 터가 있다. 회경전은 앞면 9간, 옆면 4간으로서 왕궁에서 제일 큰 나래채 건물이었다. 회경전 앞에는 문무백관들의 조회를 받던 넓은 마당이 있었고 그 뒤에는 장화전 터가 있다. 중심 건축군 터의 서쪽 낮은 지대에는 20여 채의 궁전건물들이 있었던 서부 건축군 터가 있다. 여기에는 회경전 다음가는 지위에 있던 정전인 건덕전이 있었다.

고려왕들은 중요한 행사나 의식, 중대한 국사토의를 할 때를 제외하고는 보통 건덕전에서 정사를 보았다. 이곳에는 여러 개의 편전과 침전(만령전) 등의 건물, 사당, 절들이 있었다. 서부 건축군의 대부분은 아직도 땅속에 묻혀 있다.

만월대터 발굴성과에 기초해 그린 고려 왕궁과 회경전 앞 태조 왕건의 행차 모습. 이 그림은 왕건릉 입구 정자각에 전시돼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30.© 뉴스1

중심 건축군 터의 동쪽 낮은 지대에는 동부 건축군 터가 있다. '고려도경'에 따르면 여기에는 세자궁(왕의 후계자로 선정된 왕자가 거처하는 왕궁의 한 부분)인 수춘궁이 있었다. 회경전터를 중심으로 궁성 동쪽 벽까지 약 135m, 서쪽 벽까지 약 230m이며, 남쪽 벽의 성문인 승평문(昇平門)까지 약 250m이다.

만월대터 서쪽에는 고려시대 천문관측을 위해 축조한 첨성대(국보유적 제131호)가 남아 있다. 919년(고려 태조 1) 연경궁을 세울 때 축조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천문 관측기구를 올려놓았던 축대만 남아 있다.

첨성대는 네모난 5개의 주춧돌 위에 화강석 기둥을 세우고 2.2×2.2m 크기의 돌마루를 깐 형태로, 7세기경에 축조된 경주 첨성대와는 구조가 다르다. 각 기둥은 크기 0.4×0.2×2.8m, 지면에서 돌마루까지의 높이는 2.3m이다. 땅바닥에서 돌마루까지는 디딤돌이나 사다리로 오르내렸을 것으로 짐작되나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첨성대의 돌마루와 기둥에는 관측기구들을 설치하는 데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름 12cm, 깊이 9cm의 구멍 1개와 지름 4cm, 깊이 3.5cm의 구멍 2개가 있다.

고려시기에 세워진 만월대 인근의 첨성대 전경. 현재 화강석을 다듬어 만든 축대 부분만 남아 있다. 축대의 높이는 2.8m이며, 한 변의 길이는 2.6m이다. 조선시대 작품인 만월회고(1612년)에는 고려 왕궁터와 함께 곁에 있는 첨성대가 지금의 모습대로 그려져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30.© 뉴스1

고려 왕과 왕족의 무덤 중에서는 개성의 서쪽 만수산과 봉명산 일대에 자리 잡고 있는 왕건왕릉, 공민왕릉, 명릉떼, 칠릉떼만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무덤인 현릉(顯陵, 국보유적 제179호)은 개성 남대문에서 북서쪽으로 3.5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송악산의 지맥인 만수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왕건과 신혜왕후 유씨를 함께 묻은 단봉 합장릉으로, 943년에 조성되었으나 역대 왕들의 보호가 각별해 전란이 있을 때마다 묘를 옮겼다. 현재의 능은 1993년에 복원하면서 대대적으로 개건한 것이다.

3단 축조 형식으로 웅장하게 개건된 무덤 앞에는 고려 개국공신을 비롯한 문인 및 무인 석상이 세워져 있다. 무덤 안의 동쪽 벽에는 매화와 청룡이 그려져 있고, 서쪽 벽에는 노송과 백호가 그려져 있는 것이 확인됐다.

고려 태조 왕건과 왕비의 무덤인 현릉(顯陵) 입구 모습.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30.© 뉴스1
고려 태조 왕건과 왕비의 합장묘인 현릉(顯陵)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30.© 뉴스1

공민왕릉(恭愍王陵, 국보유적 제123호)은 왕건릉의 서쪽 봉명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왕비 노국공주의 무덤인 정릉(正陵)과 나란히 있는 쌍무덤으로, 동쪽의 것이 정릉이고 서쪽의 것이 공민왕릉인 현릉(玄陵)이다. 공민왕은 1365년(고려 공민왕 14) 왕비가 죽자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감독하여 9년이라는 오랜 기간에 걸쳐 방대한 무덤 공사를 벌였다.

무덤 구역은 가로로 긴 직사각형의 3개의 층단과 맨 아래의 경사층단으로 되어 있다. 현릉은 왕비의 무덤과 함께 동서 40m, 남북 24m 정도 되는 상단 한 가운데에 나란히 놓여 있다. 현릉의 봉분은 지름 13m, 높이 6.5m이다. 화강암으로 12각의 호석을 돌리고 그 면석에 구름을 탄 12지신과 연꽃무늬를 섬세하게 새겼다. 고려의 능제에서는 왕과 왕비의 무덤을 합장하거나 따로 조성하다가 공민왕릉에 이르러 처음으로 같은 곳에 장사지냈다. 특히 문인석과 무인석을 구별하여 세운 점 등은 후에 조선의 왕릉제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공민왕릉은 남아 있는 고려 왕릉 가운데 가장 보존상태가 좋다.

고려 31대 공민왕과 왕후의 무덤인 현릉과 정릉(玄陵·正陵) 뒤쪽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30.© 뉴스1
고려 31대 공민왕과 왕후의 무덤인 현릉과 정릉(玄陵·正陵) 전경. 왼쪽이 공민왕(현릉), 오른쪽이 노국공주의 무덤(정릉)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30.© 뉴스1

공민왕릉 초입의 오른쪽에는 광통보제선사비(廣通普濟禪寺碑, 국보유적 제152호)가 서 있다. 광통보제선사(廣通普濟禪寺)라는 절의 내력을 기술한 고려 말기의 석비로, 이 절을 중건한 1377년에 건립됐다. 이 사찰은 고려 공민왕이 왕비인 노국공주의 명복을 빌었던 사찰이다. 비신 전면에는 이색(李穡)이 짓고 한수(韓修)가 쓴 비문이 해서체로 새겨져 있는데 손상이 심해 거의 알아볼 수 없다. 다행히 '목은집(牧隱集)'에 비의 원문이 전한다.

공민왕릉 초입에 있는 광통보제선사비(廣通普濟禪寺碑). 1377년 건립됐고, 공민왕의 왕비인 노국공주의 원찰이었던 광통보제선사의 내력이 기록돼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30.© 뉴스1

한편 왕건릉에서 서남쪽으로 언덕을 넘어가면 명릉군(明陵群) 또는 명릉떼(보존유적 제549호)라고 부르는 세 개의 왕릉이 나온다. 서쪽부터 제1릉, 제2릉, 제3릉의 순서로 약 40m~70m의 거리를 두고 나란히 있다. 현재 행정구역상으로는 개성시 해선리다. 그중 제1릉을 고려 29대 충목왕의 무덤인 명릉(明陵)으로 본다. 나머지 2개의 왕릉은 조선시대에 나온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개성부 서쪽 12리에 있다"라고 기록된 고려 25대 충렬왕(忠烈王)의 경릉(慶陵), 26대 충선왕(忠宣王)의 덕릉(德陵)일 가능성이 있다. 명릉군 제2릉에서 동쪽으로 300m 정도 떨어진 곳에 충렬왕비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의 무덤인 고릉(高陵, 보존유적 제545호)이 있다.

개성시 해선리 왕건릉의 서남쪽에 있는 명릉군(明陵群) 전경. (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1.01.30.© 뉴스1
개성시 해선리 왕건릉의 서남쪽에 있는 명릉군(明陵群)의 ‘제1릉’ 전경. 고려 29대 충목왕의 무덤인 명릉(明陵)으로 추정된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30.© 뉴스1

왕건릉 서쪽에서 북쪽으로 난 소로를 따라 낮은 언덕을 넘어 가면 '칠릉골'이 나온다.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없는 7개의 고려 왕릉(칠릉군 또는 칠릉떼라고 부름)이 자리 잡고 있어 붙은 지명이다. 7개 무덤의 주인은 확인되지 않았고, 대체로 고려 중기부터 후기까지 조성된 왕후와 왕비,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개성시 해선리에 있는 칠릉군 전경. 모두 능주가 확인되지 않았고, 고려 중기부터 후기까지 시기에 조성된 왕후와 왕비,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1.01.30.© 뉴스1

남과 북은 고려 궁성터인 만월대터를 2007년부터 2015년까지 총 7차에 걸쳐 공동으로 조사해 약 40여 동의 건물터와 금속활자, 청자, 도자기 등 약 1만 6500여 점의 유물을 발굴하는 성과를 올렸다. 특히 북한은 김정은 위원장이 2014년 '민족유산보호사업은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빛내는 애국사업이다'이란 제목의 담화를 발표한 것을 계기로 문화유산의 대외, 남북교류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향후 남북관계 풀리면 남북 사이의 문화유산분야 교류가 활성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sseol@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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