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재구성]"안 나오는 대출, '작업' 해드립니다"..강남 왕상무의 기막힌 수법

정혜민 기자 2021. 1. 30.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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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대출 허점 노리고 1년 6개월 사이 12억원 뜯어내
협박과 폭력, 친구 살해 등 끔찍한 범죄로 이어지기도
© News1 DB

(서울=뉴스1) 정혜민 기자 = '왕상무'(43)가 서울 강남구에 사무실을 차렸다. 왕상무의 손을 거치면 신용등급이 낮거나 직장과 담보가 없어 대출을 못받는 사람에게도 쉽게 대출금이 나왔다.

전형적인 '작업대출'이다. 서류를 조작해 저축은행의 저신용 대출을 받아내는 금융사기 범죄다.

◇1년6개월 만에 총 12억원 대출 사기

왕상무의 범행은 2017년 8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왕상무와 공범 7명은 작업대출 의뢰인 A씨가 컴퓨터 도소매업체 B사를 운영하는 것처럼 허위로 사업자등록을 했다. 사업을 실제 하는 것으로 가장해 실사를 받고 여기에 속은 서울신용보증재단의 한 지점에서 1300만원 상당의 신용보증서를 발급받았다.

이들은 이때부터 2019년 1월까지 1년 6개월 사이에 55회에 걸쳐 저축은행 등으로부터 12억3251만원을 대출받았다. 그 동안 조직원은 15명으로 늘었다.

이들은 대출의뢰인이나 대출의뢰인 법인 명의 신용카드로 일명 카드깡, 상품권(기프트카드)깡을 해 현금을 마련한 다음 자신들이 관리하는 회사가 대출의뢰인 명의로 된 법인과 물품 매매를 하는 것으로 꾸몄다.

이렇게 대출의뢰인의 신용을 높인 뒤 부동산담보 대출, 자동차매매대금 대출(마이카 대출), 새희망홀씨 대출, 사잇돌대출 등 서민대출상품으로 대출을 받았다.

이들은 일정 기간 대출금 이자만 내고는 개인회생이나 파산 등을 신청해 원금은 갚지 않을 생각이었다.

왕상무의 작업대출 사무실은 분업화 조직을 방불케했다.

왕상무가 직할하는 1팀은 2팀과 3팀에 지시를 전달하고 조직을 관리했다.

건강보험료와 체납 세금, 미납 신용카드 대금을 위한 운영자금은 대출의뢰인이나 법인 명의 신용카드로 카드깡, 기프트카드깡을 해 마련했다.

중소기업진흥공단, 신용보증기금, 기술신용보증기금에 제출할 사업자 대출 서류를 작성하거나 사업 관련 특허를 만들기도 했다. 순환거래(가장거래)에 필요한 물품도 매입 또는 판매했다.

2팀은 대출의뢰인을 모집하고 은행 등을 상대로 작업대출을 실제로 받아냈다. 작업대출의 핵심 역할을 바로 2팀이 했다.

이들은 대출의뢰인들이 4대보험 적용 회사에 근무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 서류를 허위로 만들었다. 사실상 제대로 된 거래 활동을 하지 않는 유령법인 사업체를 설립하게 하고 공유사무실을 임차해 사업장으로 위장했다.

서울서부지법 형사9단독(부장판사 박수현)은 지난 22일 전체 범행을 총괄한 왕상무에게 징역 8년, 1팀장 김모씨 징역 7년, 2팀장 이모씨 징역 2년을 선고했다. 이 밖의 조직원들은 각각 징역 4년, 3년, 2년, 1년 등을 선고받거나 집행유예에 처해졌다.

재판부는 "소득이 적거나 신용이 낮아 은행 대출을 받기 어려운 사람을 위한 서민대출상품 등을 악용해 대출금을 편취하고 보험계약의 가입, 유지 의사 없이 보험계약을 체결해 수당을 편취한 것"이라고 봤다.

그러면서 "이러한 범행이 서민대출제도 등의 운영을 크게 저해하고 실제 필요한 서민의 대출 기회를 박탈해 결국 일반 국민과 다수 보험가입자에게 피해를 입힌다"고 판시했다.

포털 사이트에 '작업대출'을 검색하면 관련 광고를 쉽게 찾을 수 있다. © 뉴스1

◇작업대출 범죄 꾸준…협박·사기 범죄로도 이어져

실제 포털사이트에서 작업대출을 검색하면 작업대출 알선 사이트를 쉽게 볼 수 있다. 최근에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나 메신저 등으로 숨어든 작업대출 사무소도 많다.

2015년에는 작업대출에 명의를 빌려주지 않겠다는 친구를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10대와 20대 일당 11명이 경찰에 붙잡혔다. 이들은 피해자를 풀어주면 자신들을 신고할 것 같아서 우발적으로 범행했다고 진술했다.

2019년 크리스마스에는 작업대출 일당이 경기 성남의 한 가정집에 닭강정 33만원어치를 보내는 방법으로 협박하기도 했다. 애초에 이 사건은 학교폭력 괴롭힘 문제로 알려졌다.

하지만 알고 보니 피해자가 작업대출을 의뢰했다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대출 직전 도망가자 보복하기 위해 저지른 범행이었다. 이 일로 작업대출 조직원들은 물론 피해자 역시 대출 사기에 가담한 피의자로 경찰 조사를 받았다.

◇금융감독원 작업대출 소비자 경보 발령

작업대출이 기승을 부리자 지난해 7월 금융감독원은 청년층 대출희망자를 대상으로 작업대출에 대한 '소비자 경보'(주의)를 발령한 바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작업대출 이용자는 대부분 20대인 대학생과 취업준비생들로 대출금액은 비교적 소액인 400만~2000만원 수준이었다.

금융감독원은 작업대출업자에게 통상 대출금의 30%를 수수료로 지급해야 하고 연 16~20% 수준의 대출이자를 저축은행에 납부해야 하므로 실질적으로는 경제적 부담만 가중된다고 경고했다.

또 작업대출 의뢰인도 대출과 관련해 허위 또는 위·변조 자료를 금융회사에 제출하면 형사처벌 대상이 될 뿐 아니라 금융질서 문란행위자로 등재돼 모든 금융거래가 제한된다고 강조했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유혹에 빠져 소액을 대출받으려다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작업대출을 사전에 막기 위해 저축은행들과 함께 비대면 대출 프로세스를 강화하고 각 은행의 대출 시스템을 보완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hemingway@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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