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믈리에는 음료 매개로 나라의 문화 전달하는 전도사" [마이 라이프]

최현태 2021. 1. 30.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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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亞 베스트 소믈리에 대회' 우승 최준선 소믈리에
아버지가 건넨 와인 한잔이 인생 바꿔
비강 가득 채운 풍성한 와인향에 매료
2010년 소믈리에 되려 佛 유학길 올라
5번 도전 끝에 작년 한국 대회 트로피
3번째 출전 아시아 대회서도 우승 기염
과거 좌절 경험 되레 큰 약으로 작용
1단계 와인 오픈해 서비스 과정 평가
2단계 블라인드로 와인 공통점 맞춰야
6단계의 까다로운 평가 '지옥의 관문'
최근 미쉐린 3스타 레스토랑 스카우트
한식 종류별로 궁합 잘맞는 와인 있어
다음 목표는 세계소믈리에대회 제패
2020 아시아 베스트 소믈리에 대회에서 우승한 최준선 소믈리에가 서울 장충동 호텔신라 미쉐린 3스타 레스토랑 라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최 소믈리에는 세계소믈리에대회에도 도전할 계획이다.
앞에 놓인 와인 4잔. 시음을 한 뒤 품종은 물론, 생산 지역, 빈티지, 와인의 공통점까지 맞혀야 한다. 하지만 아무런 힌트가 없다. 주어진 시간은 단 5분. 혀와 비강이 감지한 맛과 향을 뇌 세포에 축적된 방대한 와인 정보와 아주 빠르게 대조해 한 치의 오차 없이 정답 카드를 골라내야만 한다. 하지만 무대에 서면 야속하게도 시간의 법칙은 여지없이 무너져 2배속으로 돌리는 영화처럼 쏜살같다. 점점 초조해지는 소믈리에. 이마에 식은땀이 송송 맺히기 시작한다. 최고의 소믈리에 자리에 오르는 것이 이토록 힘든 것인가. 오기와 포기를 오가며 고뇌하던 소믈리에는 시험 종료 직전 유창한 불어로 와인을 설명하며 외친다. “공통점은 모두 부르고뉴 화이트 와인입니다.” 정답을 맞혔다는 확신에 그제야 안도하는 옅은 미소가 얼굴에 번진다. 대회를 마치고 시상대 맨 꼭대기에 오른 남자의 눈가는 촉촉하다. 미쉐린 3스타 레스토랑 호텔신라 라연의 최준선(35) 소믈리에. 그는 지난달 프랑스 농식품부(MAA)가 주최하고, 소펙사 코리아가 주관하는 ‘2020 제6회 아시아 베스트 소믈리에 대회’ 결선에서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우승해 아시아 최고 소믈리에로 우뚝 섰다.

#힘겨운 다섯 차례 도전, 아시아 최고 소믈리에를 선물 받다

29일 라연에서 만난 최 소믈리에는 마스크로 얼굴 절반을 가렸지만 와인업계에 소문날 정도로 준수한 훈남의 외모는 감출 수 없다. 그런데 다소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지난달 아빠가 돼서 요즘 밤잠을 설친단다. 겹경사다. 아시아 베스트 소믈리에 대회 우승을 안겼으니 ‘복덩이’가 틀림없다며 덕담을 건넸다. “대회를 마친 지 한달이 조금 넘었지만 아직 결선 현장에서 심장을 때리던 고동소리가 귓가에 생생하네요. 대회 준비하느라 숱한 밤을 지새우며 시음을 반복했는데 그동안의 노력이 보상받은 것 같아 너무 기뻐요.” 결선 현장의 긴박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대회 뒷얘기를 풀어 놓는 최 소믈리에의 눈빛 속에는 힘들었던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펼쳐진다.

최 소믈리에는 무려 ‘5수’ 끝에 아시아 소믈리에 ‘왕좌’에 앉았다. 1회 대회 우승자 안중민 소믈리에(SPC그룹)에 이어 한국인으로 두 번째 쾌거다. 우리나라의 경우 아시아대회는 소펙사 코리아가 주관하는 한국 소믈리에 대회 1, 2위가 출전한다. 최 소믈리에는 처음 도전한 2016년 준결선에서 떨어졌고 2017년 2위, 2018년 6위, 2019년 2위에 이어 다섯 번째 도전 끝에 지난해 한국대회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한국 1위로는 처음 나간 아시아 대회에서 우승까지 휩쓸면서 한국 소믈리에 1위의 클래스를 제대로 보여준 셈이다. “2019년 국내대회 결선 시상식 영상을 보면 두 사람을 세워놓고 우승자 이름을 부를 때 허탈해하는 제 표정이 묻어나요. 나름대로 무난하게 치러 내심 우승을 기대했는데 또다시 2위를 하니 좌절감이 들더군요. 그런데 한국대회 2위가 오히려 나중에 큰 약이 됐어요. 덕분에 아시아대회에 두 차례나 나가면서 예비고사를 제대로 치렀죠.출제 문제들을 분석해 파일을 만들었고 이를 토대로 실전같은 연습을 거듭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게 됐답니다.”
#지옥의 관문에서 살아남다

결선은 대회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실시간으로 생중계돼 손에 땀을 쥐게 했다. 우승을 다툰 상대는 싱가포르의 다이스케 시부야(Daisuke Shibuya)와 대만의 쓰 하오(Szu Hao). 둘 중 누가 우승해도 당연할 정도로 체계가 잡혀 있는 실력 있는 소믈리에들이다. “쓰 하오는 프랑스 학교 후배예요. 대만에서 아주 유명한 소믈리에로 여유가 넘치고 유쾌하죠. 반면 시부야는 매우 차분하고 꼼꼼하게 서비스를 풀어가 상대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소믈리에랍니다.”

3개국을 화상으로 연결한 대회는 와인 잔과 식기를 모두 같은 것으로 준비할 정도로 심사는 공정했다. 하지만 한국 선수에게 매우 불리한 점이 하나 있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가 적은 싱가포르와 대만 소믈리에들은 마스크를 쓰지 않은 반면 최 소믈리에만 마스크를 쓴 채 대회에 나서 시음 때마다 마스크를 내렸다 썼다 하느라 큰 불편을 겪었다.

결선답게 과제의 난이도가 매우 높았다. 1단계는 셀러의 와인을 오픈해 손님에게 서비스하는 과정으로 제한시간은 6분이다. 와인은 샤토 르 퓌 에밀리옹 2017로 일반 와인과 달리 밀랍(하드 왁스)으로 밀봉돼 있고 세그먼트(잔여물)가 많은 바이오 다이내믹 방식으로 양조했다. 따라서 오픈 방식과 서비스하는 방법이 일반 와인과 많이 다르다. 소믈리에는 이를 재빨리 파악한 뒤 적절한 오픈 방법을 결정해 서비스해야 하는데 여기서 소믈리에의 경험과 전문성이 드러난다. 밀랍을 제거하지 않고 나이프를 꽂아 그대로 코르크를 뽑아내면 밀랍이 떨어져 나간다. 하지만 경쟁 소믈리에들은 당황한 듯 밀랍을 제거하려 나이프로 병목을 돌리거나 제대로 뜯지 못해서 서비스를 아예 하지 못했고 최 소믈리에만 정확하게 오픈했다. 더구나 와인은 병입 전 필터링을 완벽하게 하지 않기 때문에 세그먼트를 가라앉히는 디캔팅을 반드시 해야 하는데 최 소믈리에는 다른 선수와 달리 정확하게 디캔팅해 점수를 얻었다.
2단계는 블라인드 테이스팅. 주어진 와인 4잔을 시음하고 품종, 생산 지역, AOC, 빈티지를 식별하고 와인 간 공통점까지 설명해야 한다. 정답은 모두 부르고뉴 지역의 화이트 와인. 품종만 알리고테, 소비뇽블랑, 샤르도네로 달랐고 샤르도네는 부르고뉴 북부 샤블리 지역과 남부 코트 드 본 지역 2종이 나왔다. 최 소믈리에만 부르고뉴 와인이라는 공통점을 맞혔다. 3단계는 제시된 사진 10개를 보고 와인 산지를 맞히는 문제로 제한시간은 불과 2분이다. 최 소믈리에는 산지를 8∼9개 맞혔고 상대방은 3개 정도에 그쳤다. “화면을 터치하면 3장씩 바뀌어서 찰나의 순간에 산지를 파악해야 하는 어려운 문제였어요. 다행히 프랑스 유학 시절 부르고뉴 산지를 거의 돌아다닌 것이 큰 도움이 됐답니다.”
4단계는 7분 동안 샴페인 1잔, 브랜디 사워 2잔, 드라이 마티니 2잔을 서비스하는 과제였고 5단계는 제시된 마스 드 도마스 갸삭 퐁 드 갸삭 매그넘 2004 와인에 대해 3분 동안 설명해야 했다. 마지막 6단계는 소믈리에들을 매우 당황하게 만들었다. ‘2017년 샤토 라 퐁 로쉐에서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라는 질문에 1분 안에 답해야 했다. 제시된 와이너리는 보르도 메도크 그랑크뤼로 정답은 “기후온난화 등으로 유기농 와인 생산을 중단했다”였다. 상대 소믈리에들은 전혀 대답을 포기했고 최 소믈리에만 “날씨에 큰 변화가 있어서 작황이 매우 안 좋았다”고 답해 완벽하지는 않지만 점수를 얻었다.
#인생을 바꾼 아버지의 와인

사실 그에게는 오래전부터 ‘소믈리에 DNA’가 흐르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사람을 만나는 직업을 동경했어요. 특히 카지노 딜러에 끌려 제주의 대학에서 호텔관광을 전공하려 했죠. 하지만 교사이던 부모님들이 단호하게 반대해 깔끔하게 포기했답니다. 그리고 선택한 것은 천문학과예요. 왜냐고요? 당시 한국 위성 발사 성공으로 비전이 높아 보였거든요. 하하.”

최 소믈리에는 대학생 때까지만 해도 와인을 전혀 몰랐는데 아버지가 건넨 와인 한잔이 그의 인생을 바꿨다. 프랑스 보르도 샤토 다가삭 1997년 와인으로 소주만 마시던 시절, 잔에서 피어나는 향수 같은 와인 향이 비강을 가득 채우는 신기한 경험은 새로운 세상을 열어 줬다. 이에 의경 복무를 마친 뒤 본격적으로 와인책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다 2007년 한국 소믈리에 대회에서 우승하는 유영진 소믈리에(비스타 워커힐 서울 델비노)의 멋진 모습에 반해 2010년 짐을 싸 프랑스로 떠났다. 알자스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불어를 공부하고 부르고뉴 본의 농림부 산하 와인스쿨 CFPPA에 입학해 소믈리에 과정 2년, 양조 과정 1년을 마쳤다. 또 2년 동안 부르고뉴 본의 와이너리 도멘 기요(Guyot)에서 양조를 섭렵했다. “수확기에 들어가 허드렛일부터 시작했어요. 봄에 잎이 자라면 솎아주고 많이 자라면 가지가 휘지 않게 묶어주고 밭도 갈았죠. 와인 산지들을 거의 돌아다녔고 매일 와인을 시음하면서 프랑스 음식도 두루 경험했답니다. 당시 경험들이 큰 자산이 된 것 같아요.” 최 소믈리에는 아내도 이때 만났다. 그는 프랑스 파리의 미슐랭 레스토랑인 퐁텡블루(Fontainbleu), 악셀(Axel)에서 1년 동안 현장 경험도 쌓고 부르고뉴의 대학 테루아 에 데구스타시옹(Terroir et Degustation)에서 디플로마 과정을 마치고 논문을 쓴 뒤 한국에 돌아왔다.
#미쉐린 3스타 레스토랑 소믈리에의 길

2015년 두가헌에서 소믈리에를 시작한 그는 최근 실력을 인정받아 미쉐린 3스타를 받은 호텔신라 라연으로 스카우트됐다. 라연은 한식 레스토랑이다. 한식과 와인의 페어링이 쉽지 않을 것 같다. “부르고뉴 뫼르소 지역 샤도네이가 감칠맛이 많이 나 한식과 아주 잘 어울려요. 고기 요리는 프랑스 론의 오래 숙성된 샤토네프뒤파프와 철떡궁합이죠. 고추를 툇마루에서 말릴 때 나는 알싸한 향이 풍겨 고춧가루를 쓴 음식과도 잘 어울려요. 청량감 있는 스파클링은 국물요리와 궁합이 좋답니다.”

그에게 소믈리에란 어떤 직업일까. “프랑스에서 와인은 그림이나 예술처럼 하나의 문화로 여겨지죠. 소믈리에는 음료를 매개로 각 나라의 문화를 전달하는 전도사랍니다. 와인이 생산된 곳의 문화와 여행지, 유명 인물 등을 전달해 식탁을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거죠.”

이제 그의 시선은 세계 소믈리에 대회로 향한다. 지난해 세계소믈리에협회 디플로마(골드레벨)를 받아 한국국제소믈리에협회(KISA)가 주관하는 한국대표 선발대회 출전권도 얻었다. 아직 세계소믈리에 대회에서 결선에 오른 한국인은 없다. 미쉐린 3스타 레스토랑의 소믈리에를 발판으로 그가 세계 정상에 우뚝 서는 모습을 그려본다.

글·사진=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egye.com

최준선 소믈리에는 ●1986년 서울 출생 ●마포고-충북대 천문학과 중퇴 ●프랑스 최고 소믈리에 과정(CFPPA BP Sommelier)·양조 책임자 과정(CFA BPREA) 졸업 ●부르고뉴 대학 테루아 에 데구스타시옹(Terroir et Degustation) 졸업· 논문 ‘뉘생조르주 마을 포도밭의 위치에 따른 와인의 변화’ ●한양사이버대학교 호텔관광외식경영학과 졸업 ●2017·2109년 한국 소믈리에 대회 준우승, 아시아 베스트 소믈리에 대회 출전 ●2020년 한국소믈리에대회 우승 ●2020년 제6회 아시아 베스트 소믈리에 대회 우승 ●2018년 프랑스 최고 소믈리에 자격증 획득 ●세계 소믈리에 협회 자격증 골드 레벨 획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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