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멘트 800만톤..숫자 정상화에서 시작하는 北 경제변화

CBS노컷뉴스 김학일 기자 2021. 1. 30. 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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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차 당 대회 중 숫자 공개된 목표..세멘트·살림집
과거에 비해 대폭 하향 조정, 2000만톤→800만톤
목표 하향조정은 숫자 정상화·북한경제 침체 반영
北 자력갱생, 각자도생 아니라 "중앙집권적 자력갱생"
北 경제 새판 짜기 진행 중..비정상적 시스템 복원
시장친화정책→"국가의 통일적 지도"아래 편재
전문가 "경제정상화이나 개혁후퇴 가능성도 있어"
연합뉴스
"건재공업 부문 800만t의 세멘트 고지 점령, 평양시 5만 세대 살림집 건설(1년에 만 세대), 검덕지구 2만 5천 세대 살림집 건설"

북한 김정은 당 총비서가 8차 당 대회에서 제시한 국가경제발전 5개년계획 과업 중 유일하게 숫자로 공개한 목표이다.

시멘트 공급과 주택 건설은 자원이 풍부한 북한이 제재와 코로나19에 따른 국경봉쇄 속에 대외 수입에 의존하지 않고 완수할 수 있는 분야라는 점에서 구체적인 경제 목표를 공개한 것으로 보인다.

◇ 80년대 전망목표에 비해 대폭 하향 조정된 경제 목표

그런데 눈길을 끄는 것은 이 목표가 과거에 비해 매우 낮게 설정된 목표라는 점이다.

김일성 주석은 지난 1980년 6차 당 대회에서 사회주의 건설 10대 전망 목표로 "전력 1000억㎾, 석탄 1억 2000만t, 강철 1500만t, 비철금속 150만t, 화학비료 700만t, 세멘트 2000만t, 직물 15억m, 곡물 1500만t, 수산물 500만t 등의 생산과 30만㏊의 간척지 개간"을 제시한 바 있다. 북한이 80년대에 제시한 주택건설 목표도 보통 15만~20만 호 건설이었다.

북한은 이후 경제 목표를 제시할 때 항상 이 전망목표를 기준으로 했고, 북한 경제가 붕괴된 90년대 '고난의 행군' 시절을 거치면서도 이 전망 목표의 공식적인 포기를 언급한 적이 없다.

시멘트 하면 2천만 톤 생산, 주택하면 20만 호 건설을 통 크게 말하던 북한이 이번에 경제 5개년 계획에서 시멘트 800만 톤 생산, 평양 5만 호 주택 건설이라는 대폭 하향된 목표를 제시한 것이다.

김병로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는 "다른 부문은 수치로 공개되지 않았지만 사정은 시멘트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아 목표를 상당히 낮추어 잡았을 것으로 짐작한다"며, "사회주의 특성상 이전보다 목표를 낮게 공표한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사회 구조에서 북한이 과거 관행을 타파하고 현실을 인정하며 실현 가능한 목표를 설정한 것은 큰 변화"라고 평가했다.

아울러 북한은 올해 예산 수입과 지출 증가율도 지난 2002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으로 잡았다.

◇ 올해 예산 수입·지출 증가율도 2002년 이후 최저 수준

북한 최고인민회의에 보고된 올해 예결산안에 따르면, 예산수입과 지출 증가율은 전년 대비 각각 0.9%, 1.1%로 나타났다.

1% 내외의 예산 규모 증가율은 김정은 총비서 집권 이후만이 아니라 지난 2002년 이후 최저수준이라는 설명이다.

경제 목표의 대폭적인 하향 수정에는 두 가지 측면이 다 있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대북제재와 코로나19 방역에 따른 무역단절, 수해 등 3중고로 인해 북한 경제가 계획 목표를 하향 조정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어렵다는 점이다.

아울러 김 총비서가 당 대회 총화에서 언급한 대로 경제 목표의 '실현 가능성을 고려한 과학적 타산', 즉 숫자의 정상화 측면이다.

연합뉴스
◇ 北 경제 침체의 반영인 동시에 경제 목표의 정상화

최지영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북한 경제의 여건이 좋지 않고 재정 규모를 확대할 여력이 충분치 않음을 보여 준다"면서도, "최근 북한 당국은 실현 가능성을 고려한 경제 정책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경제적 현실에 대한 북한 당국의 객관적 인식과 실현 가능성을 고려한 경제정책 제시는 북한 경제의 불확실성을 줄이는 요소"라고 설명했다.

북한 노동신문은 지난 26일 '새로운 5개년 계획 수행을 위한 경제 작전을 면밀하게 짜고 들자'는 제목의 사설에서 "주관적 욕망에 사로잡혀 계획을 허황하게 세우거나 적당히 세우는 현상"의 '철저한 극복'을 요구하며, "현실적이며 동원적인 전투 계획"의 수립을 강조한 바 있다.

허황된 계획이 아닌 '현실적인 계획'의 출발선이 바로 숫자의 정상화인 셈이다.

북한은 현재 미국 바이든 정부와의 비핵화 협상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불투명한 상황에서 대북제재와 코로나에 따른 무역단절 등 비상상황에 대한 자구책으로 외부의 영향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력갱생'의 새 판을 짜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경제 현실과 실현 가능성을 과학적으로 타산한 자력갱생의 정면 돌파로 경제5개년 계획을 완수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자력갱생'의 내용은 북한의 경제 단위들이 제 가끔 살아가는 각자도생이 아니라 "국가의 통일적 지도와 전략적 관리 밑에 진행하는 중앙집권적 자력갱생"이다.

◇ 중앙집권적 자력갱생 통해 국가의 경제 통제력 강화

노동신문은 지난 29일 '국가적이고 계획적이며 과학적인 자력갱생'이라는 제목의 논설에서 "결코 각 부문, 각 단위가 제 가끔 자체로 살아나가는 자력갱생이 아니"라며, "이런 관점, 경영활동 방식이 만연하면 경제사업에서 무질서와 본위주의가 조장되고 나라의 경제 발전에 엄중한 후과를 미치게 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국가적인 견지에서 경제 사업을 진행하지 않으면 여러 단위가 같은 문제 해결에 노력과 자재, 자금을 투하해 결국 사회적 노동 낭비를 초래하게 된다"고 강조했다.

'중앙집권적 자력갱생' 아래 국가의 경제 통제권을 바짝 조여 장악력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관건은 사회주의 기업책임관리제와 농업분야 포전담당제 등 김정은 시대의 시장화 촉진 정책들이 이 '중앙집권적 자력갱생' 속에 어떻게 위치하느냐이다.

생산·판매·투자 등 경영활동의 자율성을 확대하고 실적에 따른 인센티브를 보장하는 사회주의기업책임관리제와 곡물 수확량을 농민들에게 더 돌아가도록 한 포전 담당제 등 시장 친화적 정책들은 사실 북중무역 확대, 장마당 확산과 함께 김정은 시대 경제를 돌아가게 한 중요한 축이었다.

◇ 중앙집권적 자력갱생 속 시장친화 정책들의 향배는?

다만 사회주의기업책임관리제 등의 실제 운용과정에서는 군이나 당의 특권기관들이 철광석 수출 등 대외무역을 통해 막대한 수출대금을 챙기고, 정작 국가경제기관인 내각은 이를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북한 경제의 분절화가 심화된 측면이 있기는 했다.

일단 북한이 '중앙집권적 자력갱생'을 강조한다고 해서 사회주의기업책임관리제 등 시장친화적 정책들을 폐기할 가능성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시장친화 정책들이 8차 당 대회 사업총화보고에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이후 개최된 부문별 협의회에서는 심도 있는 논의가 이뤄졌다는 보도가 있었다.

아울러 지난 20일 노동신문 보도에서 조용덕 북한 내각 국장은 "최근 연간 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를 비롯한 기간공업 부문의 여러 단위를 시범 단위로 정하고 사회주의 기업책임 관리제를 현실성 있게 실시하는 사업을 내밀었다"며 그 경험을 일반화하기 위한 토의를 집중적으로 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사회주의기업책임관리제는 그동안 국가가 자재 등 필요 물자를 공급하지 못하는 중소규모의 기업을 중심으로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으나, 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 등 국가 기간공업 분야에서도 사회주의기업책임관리제가 시범적으로 도입됐고, 이를 다른 곳에 적용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는 얘기이다.

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 등 기간산업에 적용된 사회주의기업관리책임제의 구체적인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으나, 내각의 계획과 통제 아래 시장적 요소가 가미된 형태일 것으로 추정된다.

연합뉴스
◇ 김정은 "특수성 운운하며 국가의 통일적 지도 저해 현상 강력 제재"

김정은 당 총비서는 8차 당 대회 결론에서 "당 대회 이후에도 특수성을 운운하며 국가의 통일적 지도에 저해를 주는 현상에 대해서는 그 어느 단위를 불문하고 강한 제재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회주의기업책임관리제 등 시장화 정책과 대외무역을 활용해 외화를 독식한 군이나 당의 특권기관에 경고를 하면서 북한 경제의 중추인 내각에 힘을 실어준 발언으로 풀이된다.

군이나 당의 특권기관이 주도하던 각종 시장화 정책들을 '경제사령부'로 내세운 내각 주도의 통일적 계획과 통제 아래에 두고, 이를 저해할 경우 처벌하겠다는 뜻인 셈이다.

김 총비서가 '정비와 보강' 경제 전략 속에 강조한 '국가의 통일적 지도'에는 아버지 김정일 시대 고난의 행군을 거치면서 북한의 각 단위, 각 부문에서 생존을 위해 도입한 각종 비정상적 경제 관행들을 바로 잡겠다는 속내도 읽힌다.

산업연구원 이석기 선임연구위원은 "국가의 통일적 지도의 강조는 집권화냐 분권화냐의 관점이 아니라 경제 질서의 회복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며, "특정 부문의 경제행위 자체를 금지하기보다 특권 부문의 경제 행위가 경제계획 등 국가의 관리 하에서 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 現 무역단절 상황이 오히려 北 경제시스템 복원의 기회

사실 대북제재와 코로나19로 대외무역이 사실상 단절된 현재의 시점은 경제 시스템을 바로 잡을 수 있는 매우 좋은 기회라는 관측도 있다.

무역이 끊겼으니 당이나 군의 특권 부문이 내각의 통제에 반발할 가능성도 감소할 것이라는 얘기이다.

그러나 김정은 총비서의 경제 새판 짜기가 성공할지 여부는 현재로서는 불투명하다.

경제 부문의 질서를 바로잡아 시스템을 구조적으로 정비하는 일이 필요할 일이지만, 1년 동안의 국경봉쇄에 따른 무역 단절 등으로 북한 경제가 침체를 거듭하는 상황에서 국가의 경제 재집권화가 북한 내 시장을 더욱 위축시키는 등 경제적 어려움을 가중시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이다.

이석기 선임연구위원은 "국가의 통일적 지도와 내각의 경제관리 역할을 강조하는 경제관리개선 방향은 경제 운영의 정상화를 추구하는 것으로 평가되지만, 이것이 경제 개혁의 후퇴로 귀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만큼 지속적인 관찰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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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노컷뉴스 김학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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