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타고 방방곡곡 - 옥천]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옥천 가는 버스가 없다?
'서울 가는 버스 없시유~' 수화기 너머 들려온 옥천터미널의 대답이다. 그렇다. 서울, 그리고 경기도와 인천 등 수도권에서 버스를 타고 충북 옥천으로 바로 갈 수는 없다. 버스 노선이 폐지된 거다. 하루 한차례 부천을 오가는 버스가 있었지만, 이마저도 코로나 여파로 잠정 중단, 사실상 폐지된 거나 다름이 없다. 수도권에서 버스로 옥천을 가려면 대전복합터미널이나 청주터미널로 가 여기에서 옥천행 시외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대전에서는 607번 시내버스를 이용해도 된다.
대전복합터미널에서 시외버스로 옥천터미널까지는 30분 정도 걸린다. 청주는 거리도 더 멀고 차편도 적다. 충북 옥천이지만, 사실상 충남, 대전 생활권이다. 처음 만난 옥천터미널, 단촐한 신형 건물이다. 시외버스보다는 대전을 오가는 607번 시내버스가 더 많다.
▲ 솔향기에 취하다 보면 한반도가 눈 아래~
첫 행선지는 산 정상에서 눈 아래로 한반도 지형을 볼 수 있는 둔주봉이다. 강원도 영월 한반도면 선암마을 한반도 모양처럼 둔주봉에서도 한반도를 확인할 수 있다.
둔주봉행은 옥천 읍내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출발하는 안남면행 버스를 타는 걸로 시작한다. 오늘 버스 안은 백발의 어르신과 나, 둘뿐이다. 읍내에서 둔주봉 첫 출발점인 안남초등학교까지는 30분 남짓 걸린다. 물비늘 반짝이는 대청호를 끼고, 산허리를 돌아가는 길이 지루하지 않다. 주민들이 소담소담 살아가는 안남면 소재지. 백발의 어르신은 운전기사에게 나를 다음 정류장에 내려주라는 말로 친절함을 베푼다. 뒤 안 돌아보며 말하는 어르신, 충청도 양반 인심이 흐뭇하다.
아담한 안남초등학교 뒷길을 따라 조금 오르면 상쾌한 솔향기, 솔바람이 발길을 맞는다. 쭉 뻗은 소나무 기운이 머리를 맑게 한다. 30분 정도 부지런한 걸음질. 땀이 송골송골 맺힐 때쯤 하늘이 넓어지고 눈이 트인다. 해발 270미터, 눈을 왼쪽으로 돌리면 또 다른 대한민국, 한반도가 펼쳐진다.
금강이 땅과 함께 만든 특이한 광경이다. 바람소리에 따뜻한 겨울 볕을 친구 삼아 유유한 모습을 보고 있으니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
아래 '한반도'에서 오른 바람이 솔을 만나 향을 풍기고 가슴 재우는 소리를 전한다
겨울은 강을 타고 바다로 향하고 얼음 아래 연어처럼 오르는 봄은 벌써 비늘을 털어낸다
북이 아닌 남으로 향하는 산맥들 뒤로, 거꾸로 겸허하게 돌아보게 하는 또 다른 시선은 선사한다
봉을 오르는 젊은 연인들 봄을 캐는 산비탈 여인들 연분홍 참꽃 필 날이 멀지 않았다
▲ 정지용과 육영수 '향수와 꿈의 고장'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 대는~' 향수의 옥천, 지용의 옥천. 향수의 시인 정지용 생가는 옥천 읍내에서 멀지 않다. 옥천읍 향수길 56번지. 아담한 두 동 초가집이 눈을 채운다. 주변은 주택과 상가, 카페들이 들어서 옛 모습을 가늠할 수 없지만, 사립문 달린 초가집만으로도 시인의 맘속으로 들어가는 듯하다.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이 노래를 할 당시에는 몇몇 초가에 넓은 들녘이 펼쳐져 있었을 텐데, 작품에 등장하는 실개천도 지금은 콘크리트로 정비가 돼 있다. '향수와 별똥, 호수'가 많이 알려진 시인 정지용의 대표작인데, '할아버지'란 시에서도 지용의 마음과 당시의 분위기를 잘 읽을 수 있다.
할아버지가 담배ㅅ대를 물고 들에 나가시니, 궂은 날도 곱게 개이고,
할아버지가 도롱이를 입고 들에 나가시니, 가문 날도 비가 오시네.
'정지용과 향수'는 옥천의 근간이 됐다. 옥천 읍내 곳곳의 다리나 건물 콘크리트 벽에는 지용의 시, 시화들이 그려져 있다. 식당, 아파트, 인력사무소 등 간판에도 '향수와 지용'은 선택 아닌 필수가 됐다. 한 도시가 이렇게 문학 작가를 추앙하는 경우가 또 있을까 싶다.
정지용 생가에서 700m 떨어진 곳에는 단촐한 초가집과는 상반되는 육중한 기와집 군락이 들어서 있다. 다름 아닌 고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 생가다. 집안에 들어선 대나무 숲이 무수한 옛 얘기를 대변해 주는 듯하다.
같은 마을, 지척인 거리에 시인은 초가집, 영부인은 대궐 같은 기와집. 인근 죽향초등학교 선후배인 두 사람의 너무나 다른, 아이러니한 운명과 역사다. 정지용 시인은 1902년생, 육영수 여사는 1925년생. 시인이 23년 선배다. 죽향초등학교에는 옛 교사가 있는데, 고무신에 책보를 맨 두 사람의 모습이 서려 있는 듯하다.
▲ '향수'보다 더 유명해진(?) '물쫄면'
요즘 옥천에는 시인 정지용, 영부인 육영수보다 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게 있다. 혹시 물쫄면이라고 들어보시고, 드셔보셨는지? 1978년 장사를 시작해 지금까지 팔고 있는 옥천 읍내 한 분식집의 음식 메뉴다. 방송에 소개된 이후 지금은 인근 지역은 물론 멀리서 라이더들까지 찾아와 먹고 가는 말 그대로 핫한 맛집 대표 음식이다.
멸치 육수에 노란 면발, 여기에 메추리알, 다진 소고기 등을 넣어 만든 쫄면인데, 자극을 주는 강한 맛은 아니고 입안에 은근히 여운을 남기는 평양냉면 끝맛 같은 그런 중독성을 준다. 주인의 빠르고 친절함이 더해 손님 순환도 잘 되고 그러다 보니 만족도 또한 높다. 가격도 비싼 편은 아니다. 사장님 이름은 육00 씨. 우리나라에 옥천 육 씨밖에 없으니 고 육영수 여사 먼 일가로 보면 된다.
▲ 터미널 지킴이의 고민, 옥천의 고민
옥천터미널은 노부부가 지킨다. 오랜 세월 터미널 오가는 사람들을 만나고 생활하면서 바쁜 인생을 보냈는데 요즘은 고민이 많다고 한다. 점점 줄어드는 손님에 혹시나 터미널이 없어지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예순일곱 양성심 할머니 다섯 살 많은 주 씨 남편과 터미널을 지킨다 할머니는 표를 팔고 남편은 매점 물건을 팔고
터 잡은 지 20년 숱한 사람을 맞고 보낸 터미널 이젠 동서울 가는 버스도 끊기고 하루 한 대 부천 소풍터미널길도 막히고
옆 읍내 영동터미널은 문을 닫았다며 걱정이 태산인 노부부
아랑곳없이 또박또박 표를 끊는 할머니 줄고, 끊기고, 막히는 세월 속에 강단의 손끝은 오늘도 꿋꿋하게 터미널을 지킨다
'향수의 고장, 포도의 고장' 옥천도 고민이 하나 있다. 줄어드는 인구. 자연 감소도 있지만, 옥천이 대전 생활권이다 보니 인구가 점점 대전 쪽으로 빠진다. 주소지가 옥천이면 교육 환경이 좋은 대전 쪽으로 진학이 안 되다 보니 대전으로 터전을 옮기는 사람이 많은 거다. 전국 지자체 226곳 가운데 옥천의 인구 순위는 173위, 5만 5백 명 정도다. 174위는 전남 완도인데 4만 9천9백 명. '인구 5만'이 주는 어감이 다르기 때문에 옥천이 '마지막 5만' 지키기에 사활을 거는 거다.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가슴을 따뜻하게 하고, 울리기도 하고, 부풀게도 하는 시와 그 시인을 품은 옥천. 터미널 매표원 할머니도, 5만 인구를 지키고, 또 포도 농사 풍년으로 옥천 사람들도 기뻐하는 올해가 되기를 응원하고, 기대한다.
[ 구본철 전국부장 / koosfe@naver.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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