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금치에 설탕이라도 뿌렸나.. 왜 이리 달고 아삭하지?

김성윤 음식전문기자 입력 2021. 1. 30. 03:09 수정 2021. 1. 31.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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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경남 남해 '보물초' 수확해보니
서너 뿌리 겨우 캤을까. 함께 시금치 수확하던 경남 남해 주민 이경이씨는 벌써 저만큼 앞에 있었다. 낫을 처음 쥐어본 기자에게 쪼그리고 앉아서 하는 시금치 수확이 여간 고되지 않았다. 시금치밭 뒤 바다에 해무가 짙게 끼었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낫 끝으로 흙을 찍어서 뿌리가 걸리면 잡아당기라고요!”

지난 22일 경남 남해 ‘보물초’ 밭에서 함께 수확하던 이경이(55)씨 목소리가 차츰 높아졌다. “별로 어렵지도 않은 걸” 몇 번이나 알려줘도 제대로 못 하니 답답한 모양이었다.

십수 년 해온 분이야 쉽겠지만 낫을 손에 쥐어본 게 이날 처음인 기자에겐 보통 고된 일이 아니었다. 날씨가 많이 풀렸다지만 땅은 여전히 얼었는지 낫이 쉽게 파고들지 못했다. 겨우 낫에 뭔가 걸리면 뿌리가 아닌 줄기. 이때 낫을 잡아당기면 잎이 잘렸다. “이건 (상품 가치가 없어서) 못 판다고요.”

더듬더듬 서너 뿌리 겨우 캤을까. 쪼그린 자세로 있으니 발바닥이 아프고 허리가 끊어질 듯했다. 잠시 일어나 허리를 펴려다 눈치가 보여 둘러보니 이씨가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그는 저만큼 앞에 있었고, 그가 수확한 보물초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이씨는 “그래 가지고 일당 받겠나!”라고 웃으며 소리쳤다. 남해읍 이윤건(69) 이장은 “한 사람이 하루 캐는 양이 저기 비닐봉지 8~10개요. 봉지 하나에 10㎏이 들어가니까 하루 작업량이 적어도 80㎏은 된다”고 했다.

◇단풍 든 시금치? 서울사람은 그 맛 몰라

보물초는 남해군에서 재배하는 시금치 이름이다. 남해군이 지난해 10월 상표출원을 마쳤다. 이전까지는 ‘남해초’ ‘남해 시금치’ ‘남해섬초’ 등으로 다양하게 불렀다. 남해군 농업기술센터 최은진 유통지원팀장은 “우리 시금치가 유명해지니 남해안에 있는 다른 지자체에서도 자기들 시금치에 ‘남해’가 들어간 이름을 사용해 독자 브랜드를 만들게 됐다”고 했다.

경남 남해 ‘보물초' 시금치는 100% 노지 재배한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남해는 남해안 전체를 아우르는 말이니까 다른 지역에서 사용 못 하게 할 수 없더라고요. ‘보물섬초’로 할까도 검토했지만 특허청에서 ‘신안군 비금도에서 상표출원한 섬초가 있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해서 보물초로 최종 결정됐습니다.” 보물섬은 남해군의 별칭이다.

남해에서 생산하는 시금치는 보물초라고 따로 부를 만큼 특별하다. 일단 엄청나게 달다. 이윤건 이장은 “당도가 14브릭스(brix) 이상까지도 나온다”고 했다. 14브릭스면 귤 중에서도 아주 잘 익어서 단맛이 강한 귤 수준이다. 이 이장이 밭에서 시금치 잎 하나를 골라서 따 주었다. 남해안 해안선처럼 요철이 심한 잎 테두리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설탕물에 담갔나 싶을 정도로 달고 아삭했다. 눈 감고 먹으면 사과나 생대추라고 착각할 정도.

“우리는 이걸 ‘단풍이 들었다’고 해요.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고 서리·눈 맞으며 얼었다 녹았다 해야 이런 색이 나와요. 이런 시금치가 달지만 도시 소비자들은 몰라요. 초록색 시금치만 선호하지요.”

‘단풍’ 든 시금치(오른쪽)와 일반 시금치. 남해 주민들은 “눈·서리 맞으며 얼었다 녹았다 하며 붉게 물든 시금치가 더 달고 맛나다”고 했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시금치는 본래 가을에 씨 뿌려 봄에 먹었다. 추운 겨울을 바깥에서 견디면서 단맛이 응축됐다. 요즘은 하우스 등 시설에서 재배하거나, 여름 등 더울 때면 고랭지에서 재배한다. 덕분에 사시사철 시금치를 먹게 됐다. 하지만 시금치 특유의 단맛이 사라졌다. 제철이 아닐 때, 시설 재배한 시금치는 심심하다. 농민들은 ‘물시금치’라고도 부른다.

보물초는 겨울에 노지에서만 재배한다. 9월 중순부터 10월 초까지 파종하고 11월 10~15일부터 캐기 시작해 2월 말~3월 초까지 수확한다. 이윤건 이장은 “50~60일 정도 자랐을 때가 제일 상품 가치가 높다”고 했다. 날씨가 추울수록 당도가 올라간다. 12월 25일 전후부터 설 전까지 가장 맛이 좋은 이유다.

시금치를 브랜드화한 건 보물초가 유일하진 않다. 경북 포항에서 1980년대 ‘포항초’라고 이름 붙인 게 최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전남 신안 비금도에서 ‘섬초’가 인기를 끌고 있고, 경북 영덕 영해면에서도 ‘영해초’를 생산한다. 노지와 하우스 재배가 섞여 있지만 남해 보물초는 100% 노지 재배한다. ‘겨울’과 ‘바다 옆 밭’이라는 재배 환경은 모두 같고, 그래서인지 싱겁지 않은 단맛과 도톰한 잎의 씹는 맛이 같다.

노지 시금치 생산량은 남해군이 가장 많다. 전국 생산량의 40.7%를 차지한다. 최은진 팀장은 “남해군은 대부분 농가가 고령이라 하우스 재배를 하기 힘들다”며 “비교적 손이 덜 가는 노지 시금치는 농한기 효자 작물”이라고 했다.

◇낙지가 시금치에 밀려 조연으로!

남해 사람들은 보물초를 어떻게 먹는지 궁금해 남해전통시장 안 ‘이모야식당’을 찾았다. 손맛 좋기로 이름 난 식당 주인 하명점(55)씨가 ‘시금치 초절임’이라는 남해 향토음식을 내왔다. 빨갛게 무친 시금치 사이사이 낙지가 섞여 있었다. 값비싼 낙지가 ‘고작’ 시금치에게 밀려 조연으로 출연하는 요리는 처음 봤다. 새콤달콤한 양념에 아삭한 시금치와 쫄깃한 낙지의 궁합이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우리 남해에선 시금치가 제철인 겨울에 많이 해먹는 음식이에요. 일반 나물 무치듯 시금치를 데쳐서 참기름과 소금에 미리 무쳐요. 그런 다음 초고추장과 식초, 설탕에 버무립니다. 오늘은 낙지를 넣었지만 조개, 갑오징어 등 그때그때 제철인 해물을 따로 데쳐서 넣고 버무리죠. 시금치 자체가 워낙 맛있기 때문에 뭘 해도 좋아요. 살짝 데쳐서 소금만 살짝 뿌려 숙회처럼 먹어도 훌륭한 요리가 돼요. 잡채나 된장국에 넣어도 맛있고요. 사실 생 걸 그냥 갈아서 먹어도 맛있어요. 과일 주스 같죠.”

남해 주민들이 겨울에 즐겨 먹는 '시금치 초절임'./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남해에서는 시금치 뿌리를 제거하지 않고 음식에 사용한다는 점도 독특하다. 대개 시금치 나물을 다듬을 때 뿌리 위 줄기 부분을 자르지만, 남해에서는 뿌리를 남겨둔 채 칼집을 넣어 3~4등분 한다. 하명점씨는 “뿌리가 진짜 맛있는 부분”이라며 “당도가 뿌리에서 잎으로 올라오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보물초는 뿌리가 일반 시금치와 달리 빨강에 가까운 선명한 분홍빛으로, 이파리에 드는 ‘단풍’과 비슷하다.

붉은빛이 뿌리에서 줄기 아랫부분까지 고루 퍼졌으면 맛있는 시금치라고 봐도 된다. 잎이 두껍고 표면에 윤기가 돌면서 만져보면 단단한 시금치도 품질이 뛰어나다. 잎이 너무 넓거나 길게 자라있고, 꽃대가 올라온 시금치는 별로다.

노지 시금치는 흙과 이물질이 많이 묻어있을 수밖에 없다. 물로 깨끗이 씻어 키친타월이나 신문지에 싸서 냉장고에 두면 2주까지는 보관 가능하다. 끓는 물에 소금을 넣고 30초가량 데쳐 한 번 사용할 분량씩으로 나눠 비닐에 싸서 냉동 보관해도 편리하다. 남해군이 운영하는 남해몰에서 제대로 된 보물초를 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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