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위기때 끌어안고 대화.. EU 다시묶은 '무티 리더십'[글로벌 포커스]
17일(현지 시간) 미국 CNN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올해 9월 정계 은퇴 예정이라는 소식을 전하면서 이같이 보도했다.
16년간 유럽 최대 강대국인 독일을 통치해 온 메르켈 총리는 ‘유럽연합(EU)의 수장’, ‘정상들이 존경하는 정상’으로 통했다. 2018년 캐나다 퀘벡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회의에서도 자유무역을 주장하는 메르켈 총리는 보호무역을 들고나온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 대통령과 충돌했다. 미국을 제외한 나머지 G7 국가들도 자유무역을 지지한 터라 이를 두고 ‘트럼프가 고립됐다’는 외신 보도가 쏟아졌다. 메르켈 총리와 트럼프 전 대통령이 서로 노려보고 있는 사진은 화제가 됐다. 이후 메르켈 총리는 글로벌 자유무역의 수호자, 미국 일방주의에 대항하는 유럽의 지도자로 전 세계에 각인됐다.
○ 물러날 채비하는 독일 최초 여성 총리
메르켈 총리가 정계 은퇴를 선언한 계기는 2018년 지방선거에서의 부진이다. 메르켈 총리가 이끄는 기독민주연합(CDU·독일 집권당)은 헤센주 선거에서 27%를 득표하는데 그쳤다. 메르켈 총리는 “2021년까지인 이번 임기가 끝나면 차기 총선에 출마하지 않겠다”며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선언 이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발발하고 메르켈 총리는 ‘대체 불가의 리더십’으로 독일을 방역 모범국가로 만들었다. 코로나19 위기를 잘 헤쳐 나가는 그를 독일 국민들은 여전히 신뢰하지만 그는 은퇴 선언을 번복하지 않았다. 올해 열리는 G7 정상회의는 메르켈 총리의 마지막 G7 외교가 될 것으로 보인다.
○ 누구나 알지만, 다들 그녀를 몰랐다
메르켈 총리는 유년 시절을 공산주의 체제인 동독에서 보냈다. 서독에 살던 아버지 호르스트 카스너와 어머니 헤를린트 옌츠슈는 1954년 당시 생후 8주의 메르켈을 데리고 동독으로 이주했다. 카스너는 목사, 옌츠슈는 주부였다. 이들은 동독에서 목회 활동을 시작했다.
메르켈 총리는 어렸을 때부터 수학과 러시아어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10대 시절 그는 러시아어 올림피아드에서 상을 받아 모스크바 여행도 다녀왔다. 그때 산 음반이 비틀스의 ‘노란 잠수함(Yellow submarine)’이다. 그는 비틀스, 그중에서도 폴 매카트니의 팬으로 알려져 있다.
젊은 시절의 메르켈이 지금의 이미지처럼 늘 반듯했던 것은 아니었다. 라이프치히대 재학 시절 그는 살 집을 구하지 못해 주인이 없는 빈집을 개조해 ‘불법 거주’를 했다. 첫 번째 남편과 이혼했을 때는 그의 아버지는 ‘기독교의 가치관에서 어긋난다’며 그를 나무랐다.
항상 의연하고 강단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치 초년병 시절엔 여린 모습도 보였다. 그는 1991년 37세에 독일 역사상 최연소 장관(여성청소년부)에 올랐다. 노회한 관료들은 젊은 여성 장관을 대놓고 무시했다. 메르켈이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 당시 이스라엘 주재 독일 대사가 그녀를 홀대해 메르켈이 눈물을 쏟은 일화도 전해진다.
○ 정치적 고비마다 ‘무티 리더십’
메르켈은 인도주의를 내세워 국경을 개방했다. 독일 내 반발 여론이 확산하는 가운데 2016년 서베를린에서 튀니지 난민이 ‘트럭 테러’를 일으키며 난민에 대해 반발하는 민심이 폭발했다. 대연정 파트너인 당시 호르스트 제호퍼 내무장관(당시 기독사회당 대표)은 국경 개방에 대해 ‘엄청난 실수’라며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대연정이 붕괴 직전까지 가자 메르켈 총리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고 난민 수용 정도를 낮춰 사태를 수습했다.
최근의 위기는 코로나19 확산이다. 메르켈 총리는 올해 신년사에서 “지난해가 재임 중 가장 힘든 기간이었다”고 말했다. 일본 마이니치신문은 사설에서 “메르켈은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소통하며 국민과 공유한다. 이 때문에 국민들은 그를 신뢰한다”고 평가했다. 반면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해선 “근거도 없이 바이러스가 빨리 사라질 것이라는 주장을 퍼뜨렸다”고 비판했다.
메르켈 총리는 국제사회에서도 자유주의와 연대를 상징하는 지도자였다. 현재의 EU가 유지될 수 있었던 데에도 메르켈 총리의 노력이 있었다. 그리스 경제위기,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코로나19까지 덮친 EU는 지난해 해체 위기에 몰렸다. 메르켈 총리는 당시 5000억 유로(약 670조 원) 규모의 유럽부흥기금을 조성해 코로나19로 타격을 입은 남유럽 국가들을 위한 기금으로 돌려놓으며 EU를 다시 한데 묶는 데 성공했다. 헤럴드 제임스 프린스턴대 교수(역사 및 국제관계)는 프로젝트신디케이트 기고문에서 “메르켈 총리는 그간 보여준 능력을 다시 능가했다”고 평가했다.
2014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갈등 사태가 벌어졌을 때도 메르켈 총리는 중재자로 나서 대화를 이끌어냈다. 이달 열린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에서 메르켈 총리는 “이쪽은 미국이고 저쪽은 중국이라면서 집단을 이루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신(新)냉전을 경계했다.
메르켈 총리에게 늘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있다. 바로 ‘무티(Mutti·엄마) 리더십’이다. 2013년 메르켈 총리가 이끄는 기독민주연합이 선거에서 압승하자 생겨난 신조어로 ‘메르켈리즘(Merkelism)’이라고도 한다. 잭슨 제인스 미국 현대독일학회장은 메르켈리즘(무티 리더십)을 “양 극단을 철저히 배제하면서 화합을 이끌어 내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메르켈 총리의 특징은 ‘극도의 차분함’이다. 독일 언론은 메르켈 총리가 과거 물리학자 시절 베를린 아들러쇼프(Adlershof) 중앙연구소에서 지루한 물리학 실험을 끊임없이 반복했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종종 언급한다. 그러면서 “(메르켈은) 콘라트 아데나워(독일연방 초대 총리)처럼 감각에 의지하거나, 빌리 브란트(서독의 4대 총리)처럼 대중과의 논쟁에 몸을 던지지도 않는다”고 평한다.
○ ‘메르켈하다’, 우유부단하단 비판도
메르켈 총리도 늘 호평만 받은 것은 아니었다. 2015년 난민 문제가 심각해졌을 때 ‘올해의 독일어’로 선정된 단어는 ‘메르켈하다(Merkeln)’였다. 우유부단하고 극도로 수동적이라는 뜻이다. 혼란 속에서 총리가 빨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생겨난 말이었다.
2018년 난민 포용정책을 후퇴시켰을 때는 진보진영의 비판을 받았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유럽 자유주의의 기수로 통하던 지도자가 국내 압박에 굴복해 화려하게 변심했다”고 비판했다. 토마스 클라인브로크호프 독일마셜펀드 베를린 사무소장은 “메르켈의 정치적 자산이 고갈됐다”고 비판했다.
유럽의 주도권을 독일에 내어준 영국에서는 ‘반(反)메르켈’ 정서가 높은 편이다. 영국 텔레그래프는 최근 “메르켈은 브렉시트에 그 어떤 정치인보다도 책임이 크다. EU의 분열은 메르켈의 재앙적인 유산”이라며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이는 브렉시트로 영국 내부에서 혼란이 가중되자 비난의 화살을 독일 메르켈 총리에게 돌린 측면도 있다.
최근에는 독일 슈피겔이 코로나19 사태를 복기하는 기사에서 “독일은 오스트리아보다 늦게 접촉금지령을 발동했다. 메르켈은 소중한 시간을 허비했다”고 지적했다. 지금은 독일이 유럽의 모범 방역국가로 꼽히지만 초기 대응 문제는 메르켈 총리의 실책으로 꼽힌다.
○ 메르켈리즘은 이제 시작이다
메르켈을 비판하는 이들도 있지만 메르켈 총리가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정치인 중 한 명이라는 데는 이견이 거의 없다.
올 초 CNN은 “사람들은 메르켈에게 먼저 끌리고 그다음에서야 CDU에 끌린다”고 평가했다. NYT는 “난민 포용 정책으로 한때 위기에 몰렸지만 코로나19 위기에서 특유의 ‘무티 리더십’으로 지지율이 고공행진 중”이라고 했다. 이코노미스트는 “메르켈이 퇴임을 준비하면서 독일 국내 정치가 혼돈에 빠질 조짐”이라고 했다. 메르켈 총리의 퇴임이 가져올 독일과 유럽 정치의 공백을 우려하는 분석이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지도자가 바뀌면 제일 먼저 하는 게 전임자 정책 지우기다. 하지만 메르켈 총리의 경우는 좀 다르다. 독일에서는 “그의 유산을 계승해야 한다”는 여론이 지배적이다. 메르켈 총리의 후임자는 ‘메르켈보다 잘할까’가 아니라 ‘과연 메르켈만큼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하고 메르켈과 비교하는 여론 시험대를 통과해야 한다.
최근 CDU의 새 대표로 선출된 아르민 라셰트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지사는 차기 독일 총리에 오를 것이 유력하다. 독일 도이체벨레는 ‘메르켈리즘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그가 단 한 번도 메르켈 총리와 공개적으로 대립한 적이 없다고 보도했다.
독일뿐 아니라 EU 내 다른 국가에서도 메르켈리즘은 계승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최근 유럽은 난민 문제와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극우 포퓰리즘 세력이 확산되고 있다. ‘헝가리의 트럼프’로 불리는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총리,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 등은 EU 장기예산안, 코로나19 경제회복기금 등에 사사건건 거부권을 행사하며 ‘반(反)EU’를 외치고 있다. 프랑스도 2022년 차기 대선 여론조사에서 극우 진영의 마린 르펜 국민연합(RN) 대표가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을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트럼프 전 대통령 재임 동안 유럽에 뿌려둔 ‘트럼피즘(Trumpism)’의 씨앗도 자라고 있다. 고립주의와 반(反)세계화, 인종차별주의와 포퓰리즘을 내세운 트럼피즘이 EU의 정신적 토대를 갉아먹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정치매체 폴리티코는 올 초 미 의회를 습격한 극단주의 세력 중 하나인 큐어넌(QAnon)이 유럽에서도 확산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메르켈의 퇴장으로 유럽 내 정치지형이 극우로 기울 수 있다는 전망이 있는 가운데 많은 이들은 중도주의, 다양성과 포용주의, 인권중심주의를 내세운 메르켈리즘이 더욱 필요한 시기라고 입을 모은다. 올 초 CNN은 “메르켈의 시대가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 어쩌면 이제 막 시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보도했다. EU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메르켈의 영향력은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 파리=김윤종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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