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고용보장제에 주목하라

홍기빈 정치경제학자 2021. 1. 30.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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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코로나19 사태 이전부터 미국과 영국의 진보경제학자들이 주장했던 ‘고용보장제’라는 정책이 있다. 장기 실업에 빠진 사람들 중 일을 하고자 하는 이들은 모두 정부의 재정으로 최저임금에 일정한 수당 패키지를 더한 임금으로 고용하여 일자리를 제공하자는 아이디어이다. ‘자연 실업률’로 대표되는 주류 경제학의 사고방식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이 무슨 황당한 포퓰리즘이냐고 여겨질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로 노동시장이 곳곳에서 붕괴하고, 다시 활발한 고용이 민간 부문에서 살아나는 날을 기약하기 힘들게 된 지금 이 정책은 많은 이들이 심각하게 고려하는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이제 기본소득만큼이나 익숙한 이름이 되어가고 있다.

홍기빈 정치경제학자

황당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와 동일한 일들을 이미 우리는 곡물시장과 금융시장에서 하고 있다. 쌀이라는 곡물을 시장의 수요 공급에만 맡겨둔다면 그 가격도 불안정할 것이며, 초과 공급이 발생하는 경우에는 쌀이 그대로 폐기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생산하려고 1년간 허리가 부러졌던 농민들은 소득 감소 등 여러 고통을 안게 된다. 쌀과 주요 농산물은 여기에 맡겨두기에는 너무나 소중하며 사회적인 파장이 크다. 그래서 우리는 추곡수매가 정책이라는 것을 몇 십년째 시행해왔고, 이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시행 중이기도 하다. 금융시장에서 유동성의 공급을 시장의 변덕에만 맡겨 뒀다가는 유동성 과잉이 나타나기도 하고, 또 패닉의 순간에는 신용 경색이 벌어져서 금융기관들이 차례로 무너지고 시스템 자체가 붕괴한다. 이를 막기 위해 150년 전부터 유동성을 무제한으로 공급하는 ‘최종 대부자’가 존재했고, 20세기 들어 이것이 중앙은행을 기점으로 한 은행 시스템으로 제도화됐다.

칼 폴라니는 현대의 자기조정시스템의 가장 큰 불안 요인은 본래 상품이 될 수 없는 자연(즉 곡물), 화폐, 인간을 시장의 수요 공급에만 내맡기는 데에서 나타난다고 갈파하였다. 그래서 곡물이나 화폐에 대해 방금 본 것처럼 수요공급의 논리를 넘어서는 정부의 개입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왔다. 그렇다면 인간, 즉 노동시장에 대해서는 왜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되는가? 장기적인 대량 실업이 노동자 개인과 그 가족은 물론 사회 전체에 얼마나 큰 손상을 입히는가를 따져보면 곡물이나 화폐의 경우 그 이상이 아닌가? 고용보장제는 이러한 농산물시장에서의 추곡수매 정책과 금융시장에서의 최종 대부자 제도를 노동시장에 적용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렇게 낯설거나 기상천외한 제도라고 할 수 없다.

주류 경제학자들의 낯익은 반론은 이러하다. 첫째, 재원을 어떻게 할 것인가. 둘째, 이 제도가 임금 상승을 낳아 인플레이션 악순환 고리를 만들지 않겠는가. 이 두 질문은 연결되어 있다. 이 제도를 옹호하는 자들의 반론은, 첫째, 최저임금으로 고용하므로 민간 노동시장의 고용주들은 거기에 월 1만원만 얹어도 이론상 얼마든지 노동시장으로 인력을 흡수할 수 있게 된다. 둘째, 고용보장제로 일하는 인력 풀의 크기는 경기순환에 역행하게 된다. 호황기에는 실업자가 줄어들게 되므로 그 프로그램이 축소될 것이며, 반대의 경우에는 확장될 것이다. 따라서 고용보장제는 인플레이션이 아니라 오히려 경기순환의 진폭을 완화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셋째, 미국의 경우 역사적 데이터에 근거하여 시뮬레이션을 해보면 그 프로그램의 재정 지출의 크기는 GDP의 1% 정도에 불과할 것으로 예측된다. 한국의 경우 십 몇 조원 정도가 되겠거니와, 이로 인해 발생하는 경제적·사회적 편익을 생각한다면 절대로 크다고 할 수 없는 액수이다.

작년 코로나19 사태의 와중에서 이 고용보장제는 이미 실험에 들어갔다. 오스트리아 남부 노동청은 옥스퍼드대학의 경제학자들과 함께 고용보장제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마리엔탈 지역에서 3년간의 실험을 작년 10월부터 시작하였다. 1년 이상 실업 상태에 있는 이들을 국가의 재정으로 연소득 3만유로의 돈으로 “고용”한다. 어차피 실업수당 및 각종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에 들어가는 예산을 1인당으로 환산하면 기존에도 그와 동일한 액수가 지급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고용된 이들은 2개월간 직업상담사 및 여러 전문가들과의 상담을 통하여 자신이 할 수 있으며 할 의욕이 있는 일을 선택한다. 예를 들어 목수 일을 하기로 한 사람은 3년간 동네와 지역을 돌면서 개별 가정의 가구 수리를 비롯하여 마을에 필요한 여러 가지 일들을 하게 된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2024년에 이 실험의 보고서를 제출하기로 하였다. 코로나19 사태로 노동시장의 위태로운 상태에 직면한 우리 또한 이러한 고민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홍기빈 정치경제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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