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쇠사슬과 세계

김도현 <장애학의 도전> 저자 2021. 1. 30.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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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지난 1월22일은 ‘오이도역 장애인 리프트 추락 참사’ 2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 참사를 계기로 새로운 변혁의 주체들이 한국 사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쇠사슬을 온몸에 감은 채 지하철 선로와 버스를 점거하며 이동권을 주장하는 중증장애인들 말이다. 그들에게 쇠사슬은 ‘장애인차별철폐투쟁가’의 가사처럼 “수십 년 세월을 골방에 갇혀 시설에 처박혀” 살아가도록 만드는 이 세계의 억압을 상징했다. 동시에 그 비장애중심주의적 세계를 자신의 몸과 연결해 한 뼘씩 이동시켜내는 무기이기도 했다.

김도현 <장애학의 도전> 저자

20년 동안 많은 것들이 바뀌기도 했고, 바뀌지 않기도 했다. 대다수 지하철 역사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고 저상버스와 특별교통수단이 도입되었지만, 대도시 이외 지역의 이동권은 처참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되었지만 장애인에 대한 차별도, 시혜의 문화도 여전하다. 활동지원서비스가 제도화되고 장애등급제는 단계적 폐지 수순에 돌입했지만, 장애인에 대한 사회서비스는 그들의 필요가 아닌 예산에 맞춰 정해진다.

오이도역 참사 20주년 일주일 전, 코로나19 집단감염으로 코호트 격리가 이루어진 신아원 앞에서는 긴급 탈시설 촉구를 위한 기자회견이 있었다. 이날 기자회견 현장은 바로 그 바뀌지 않음의 어떤 실체가 다면적으로 드러난 자리이기도 했다. 우선 신아원 입구의 동판에는 ‘정신지체 재활시설’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정신지체’라는 용어는 이미 2003년 ‘지적장애’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정신지체’가 ‘지적장애’로 바뀌고, 지적장애인들을 수용하는 시설의 명칭이 ‘생활시설’에서 ‘거주시설’로 바뀌었다고 해서 그들의 삶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한편 신아원 직원들이 기자회견 현수막 끈을 계속 칼로 잘라버렸기에, 참가자들은 현수막을 걸기 위해 다시 쇠사슬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기자회견 현수막과 나란히 걸린 시설 측 현수막에는 ‘더욱 노력하여 관리하겠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 동사의 목적어는 무엇이었을까? 시설에서 의도한 건 ‘코로나19’였겠지만, 자꾸 ‘장애인의 삶’으로 읽힌 건 비단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정신지체라는 낡은 용어와 장애인의 삶을 통제하고 관리하려는 욕망과 쇠사슬이 교차하는 기자회견 사진을 오래 바라보다, 나는 엉뚱하게도 “노동자가 잃을 것은 쇠사슬이요, 얻을 것은 전 세계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문구를 떠올렸다. 하지만 계급은 인간이 속한 적대적 지위이므로 사라질 수 있겠으나, 장애와 비장애는 공존해야 할 인간의 차이다. 장애인은 전 세계를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라는 세계에서 함께 살아가길 요구할 뿐이다. 또한 우리 모두는 나이를 먹으면 심신의 손상을 갖게 되고 요양원이라는 시설의 수용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이렇게 외쳐볼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가 잃을 것은 관리당하는 삶이요, 얻을 것은 지역사회다. 모든 사회 구성원이여 탈시설에 연대하라!’

작년 말부터 광화문 해치마당에서 진행되던 신아원 긴급 탈시설 촉구 농성은 다음주부터 탈시설지원법 제정을 위한 무기한 농성으로 전환된다. 이 농성이 부디 같은 계절을 반복해 맞이하지 않도록 많은 이들의 연대가 있기를 소망해본다.

김도현 <장애학의 도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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