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명을 쓰고 12년의 옥살이를 한 의사

김형민 2021. 1. 30.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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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 의해 왜곡된 여론은 종종 심각한 폭력으로 작용해 증거와 진실을 뒤덮는다. 응징을 부르짖는 정의감이 우리를 인격 살인의 공범으로 전락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되뇔 필요가 있다.
ⓒYouTube 갈무리아내 살인 누명으로 복역하다 12년 만에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 샘 셰퍼드. 그리고 아내 마릴린과 아들.

아빠가 어렸을 때에는 엄청나게 많은 ‘미드’가 한국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들였다. 그중 〈두 얼굴의 사나이〉를 빼놓을 수는 없겠구나. 이 드라마에는 네게도 익숙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바로 녹색 괴물 헐크.

〈두 얼굴의 사나이〉 속 주인공은 빈약한 체구의 의사 데이비드였지. 그는 연구 도중 감마선에 잘못 노출돼 돌연변이를 일으켰고, 그 결과 분노를 터뜨릴 경우 자기도 모르게 눈이 돌아가고 온몸이 근육질로 팽창한 녹색 괴물로 변신하게 된다. 당시 보디빌더로 유명했던 루 페리노가 ‘결코 찢어지지 않는 쫄쫄이 바지’를 입고 괴물 역으로 열연한 것이 ‘헐크’의 오리지널이야.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 데이비드는 살인 누명을 쓰고 떠돌이 생활을 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살인 누명을 쓴 의사 캐릭터는 1970년대 미국 드라마에서 꽤 익숙한 클리셰였어. 〈도망자〉는 아내 살해범이라는 누명을 쓰고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의사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야. 미국에서도 대히트를 쳤거니와 한국에서도 흑백 TV 시대에 두 번 재탕되었고, 컬러TV 시대가 개막하자 “〈도망자〉 이제 컬러로 보시라!”는 카피를 날리며 삼탕까지 감행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1993년에는 명배우 해리슨 포드 주연 영화 〈도망자〉로 총결산되기도 했지. 그런데 이 〈도망자〉 이야기는 실제 모델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해. 현실 속에서 아내를 죽였다는 혐의로 체포됐지만 끝까지 무죄를 주장했던 기구한 사내가 실제로 존재했거든. 그의 이름은 샘 셰퍼드 (1923~1970)였지.

1954년 7월4일 일요일 밤, 오하이오주에 살던 의사 샘 셰퍼드는 이웃들과 함께 저녁을 거나하게 즐겼고 이웃들이 돌아가기도 전 소파에 쓰러진 채 곯아떨어졌다. 아내 마릴린은 이웃 부부를 돌려보낸 뒤 2층 침실로 올라갔고 일곱 살배기 아들도 침대에서 곤히 잠들었지. 소파에서 잠든 셰퍼드가 눈을 뜬 것은 아내의 비명 때문이었어. 다급하게 내지르는 비명에 2층으로 올라간 그는 방에 누군가가 있는 것을 발견하지만 이내 둔기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지.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셰퍼드는 참혹하게 피살당한 아내를 발견했어. 곧바로 아들에게로 달려갔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아들은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아들 방에서 나오던 그의 눈에 후다닥 도망치는 누군가가 포착됐다. “거기 서!” 셰퍼드는 필사적으로 그를 뒤쫓았고 뒷덜미를 잡아챈다. 침입자는 머리가 덥수룩한 백인 남자였지. 그러나 셰퍼드는 되레 그에게 두들겨 맞고 다시금 의식을 잃는다. 아침이 왔을 때, 끔찍한 현장에 경찰들이 들이닥쳤고 수사가 시작됐다. 아내를 살해한 둔기는 현장에 남아 있지 않았고, 집 안의 금품이 상당수 없어진 상태였다. 늘 발생하는 강도 살인과 다를 게 없어 보였지만 경찰과 언론은 의심의 눈초리를 셰퍼드에게로 돌린다.

“아내는 얼굴이 다 부서질 만큼 잔인한 공격을 받고 죽었는데 정작 남편은 범인과 두 차례나 마주친 뒤 격투를 벌이고도 살아남았다? 말도 안 된다! 범인은 남편이야!” 특히 언론은 별 증거도 없이 샘 셰퍼드를 범인으로 예단해버렸다. 후일 연방법원 판사 한 명은 이렇게 얘기하며 혀를 내둘렀지. “언론 재판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이 사건이야말로 완벽한 사례가 될 것이다.” 그중 지역 언론 〈클리블랜드 프레스〉는 글자 그대로 칼춤을 추는 망나니 같았다. “왜 아직 셰퍼드가 투옥되지 않았는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대놓고 전면에 실었고 “시간 끌지 말고 그를 처넣어라”는 선동을 서슴지 않았지. 셰퍼드는 아내 살인범으로 체포되고 말았단다.

이후에도 흥분한 언론은 기사 수백 건을 생산하며 셰퍼드를 살인자로 몰아갔어. 지역 라디오 방송에 ‘셰퍼드의 정부(情婦)이며 그와의 사이에 아이를 두고 있다’는 정체불명의 여성이 출연할 지경이었으니. 언론은 그야말로 북 치고 장구 치고 태평소 불며 추임새까지 넣은 셈이었지. 여론은 펄펄 끓어올라 경찰을 압박하고, 증거를 들여다봐야 할 배심원들을 겁먹게 했으며, 판사조차 편견의 포로로 만들었다. 셰퍼드에게 유리한 증언과 증거는 고스란히 배격되는 가운데 일사천리로 유죄가 떨어진다. 2급 살인죄에 종신징역형.

하지만 샘 셰퍼드는 누명을 벗기 위해 끝까지 노력했다. 자신은 아내를 죽이지 않았다고 항변하며 수차례 재심을 신청한 끝에 1966년 그는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석방되었어. 옥살이로 12년의 세월을 보낸 뒤였지. 여기에는 저명한 법의학자 폴 커크의 공이 컸어. 사건 직후 출동한 경찰은 셰퍼드가 물에 젖은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고 보고한 바 있다. 아내의 얼굴을 40회 이상 둔기로 공격한 범인이라면 면바지와 가죽 벨트에 혈흔이 튀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던 거지. 그 밖에도 현장 증거는 셰퍼드의 유죄를 입증하기에는 역부족이었어. 벽에 튄 혈흔을 볼 때 범인은 왼손잡이이고 그는 오른손잡이라는 점, 현장에 아내의 것이 아닌 혈흔이 상당량 떨어져 있는데 정작 그는 말짱하다는 점 등의 이유를 들어 폴 커크는 셰퍼드의 무죄를 주장했다. 미국 대법원이 ‘셰퍼드 재판은 카니발 분위기에서 이뤄졌다’고 비판한 것이 이해되지 않니?

ⓒ시사IN 신선영32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은 윤성여씨.

증거와 진실을 뒤덮는 흙더미

출감 후에도 살인 혐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던 셰퍼드는 의사 생활을 이어가지 못한다. 그가 택한 직업 가운데 하나는 매우 의외다. ‘더 킬러’라는 닉네임의 프로레슬러로 데뷔한 거야. 로프에 몸을 던지고 상대방의 목을 조르고 메다꽂으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날 자신과 격투를 벌였던 상대를 상상하며 헤드록을 걸진 않았을까. 하지만 매일같이 들이켰다는 엄청난 양의 위스키는 그의 몸을 갉아먹었고 감옥에서 나온 지 단 4년 만에 간질환으로 세상을 떴다.

1993년 영화 〈도망자〉가 개봉하며 사건이 다시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자 이를 계기로 샘 셰퍼드의 아들은 재수사를 요구했다. 그 결과 참혹한 살해 현장에서 셰퍼드도, 아내 것도 아닌 제3자의 혈흔이 발견됐어. 그 피는 다른 범죄로 감옥에 갇혀 있던 리처드 에벌링이라는 사람의 것이었지. 그는 셰퍼드의 집에서 유리창 청소 일을 할 때 손이 베여 떨어진 피라며 범행을 부인했다. 이후 에벌링은 자신이 살인을 하긴 했으나, 셰퍼드의 청부에 의한 것이었다고 폭로를 하기도 하지. 그러다가 곧 다시 증언을 뒤집었고, 오락가락하는 증언을 일삼다 진실을 품은 채 세상을 떴다. 2000년 셰퍼드의 아들은 오하이오 법원에 재심을 신청했으나 법원은 그가 결백하다는 확증 또한 없다며 기각했으니 이 사건의 진실은 이제 공식적으로 역사 속에 묻혔다고 할 수 있겠다.   

셰퍼드의 아내를 잔인하게 죽인 건 과연 누구였는지 확인할 수 없게 돼버렸지만, 이 끔찍한 범죄로부터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적지 않다. 범죄를 규명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분노도 정의감도 사명감도 아닌 건조한 증거일 뿐이라는 평범한 명제. 언론에 의해 왜곡된 여론은 종종 심각한 폭력으로 작용해 증거와 진실을 뒤덮는 흙더미가 된다는 사실, 응징을 부르짖는 정의감이 우리를 인격 살인의 동조자 내지는 공범으로 전락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재삼재사 되뇔 필요가 있을 거야. 당장 우리에게는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20여 년간 옥살이를 하고 32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은 윤성여씨 같은 생생한 본보기가 있지 않니.

김형민(SBS Biz PD)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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