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매단 나무는 사슬인가 사랑인가

윤성근 2021. 1. 30.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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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무 취했다. 흐르는 세월, 술, 어둠에. 내 혈관들은 너무 혹사당했다."

절판된 책을 찾으러 온 손님은 사연을 말하기에 앞서 느닷없이 시를 암송했다.

"실은 한 십 년 전 즈음에 그 책을 내다 버렸습니다. 다른 책들도 다 버렸죠. 작은 사업을 하나 벌였는데 시쳇말로 망했거든요. 도망치듯 서울을 떠나면서 모두 처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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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주의자의 꿈〉
장석주, 청하, 1981년 초판
ⓒ윤성근 제공

“…나는 너무 취했다. 흐르는 세월, 술, 어둠에. 내 혈관들은 너무 혹사당했다.”

절판된 책을 찾으러 온 손님은 사연을 말하기에 앞서 느닷없이 시를 암송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노래하듯 읊은 그 시는 장석주의 ‘완전주의자의 꿈’이라는 작품이다.

“어떻습니까? 완전하게 다 외웠지요? 아니, 이 경우엔 완벽하다고 해야겠지만요. 허허.”

L씨는 그렇게 말하면서 커다란 눈을 몇 번 끔뻑거렸다. 그러나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작품 전문을 술술 외울 정도로 애착이 있는 시집인데 왜 그 책을 찾는 것일까? 그런 정도 책이라면 당연히 소장하고 있어야 할 텐데 말이다.

“실은 한 십 년 전 즈음에 그 책을 내다 버렸습니다. 다른 책들도 다 버렸죠. 작은 사업을 하나 벌였는데 시쳇말로 망했거든요. 도망치듯 서울을 떠나면서 모두 처분했습니다.”

그런데 〈완전주의자의 꿈〉만은 다시 갖고 싶다며 내게 다음과 같은 사연을 풀어놓았다.

L씨의 아버지는 매우 엄격해서 어릴 때부터 자식이 실수하거나 학교 성적이 떨어지면 불같이 화를 냈다. 이 세상은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기 때문에 앞서지 않으면 뒤처질 뿐이라는 얘기를 지겹게 반복했다. L씨는 그런 아버지가 무서워서 자신을 완벽주의자로 만들기 위해 단련했다.

〈완전주의자의 꿈〉은 L씨가 고등학생일 때 만난 책인데, 당연히 그 솔직한 제목에 이끌려 충동적으로 샀다. 그러나 정작 시를 읽어보니 도무지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말만 가득했다. L씨는 화가 났지만 늘 그렇듯 곧 그 시집을 정복하고 싶은 욕망에 휩싸였다. 내용이야 어찌 됐든 무작정 시를 외우기 시작했다. 어린 완벽주의자는 한 달 정도 시집이 닳도록 읽고 쓰면서 거기 있는 모든 작품을 암기했다.

그 사건은 L씨에게 커다란 자신감을 가져다주었다. 시집은 마치 그에게 부적과 같았고 어디를 가든 늘 지니고 다녔다.

“그야말로 승승장구였지요. 대학입시, 자격증 시험, 대기업 취직도.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저 자신을 혹독하게 단련하며 노력한 결과라고 믿었습니다. 사업을 시작한 초창기에도 행운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여기까지 단숨에 이야기를 이어오던 L씨는 잠시 말을 끊었다.

자신을 완벽한 사람이라 믿었고 그런 그는 자기 세상을 완벽하게 만들 수 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어느 날 우연한 문제로 인해 잘나가던 사업은 바닥으로 꺼꾸러졌다. L씨는 이해할 수 없었다. 서울 시내에 건물까지 갖고 있던 그가 방 두 개짜리 월셋집으로 이사하는 데에는 채 1년도 걸리지 않았다.

이제야 이해하게 된 그 시들

“그래도 저는 지금 생활에 더 만족합니다. 세상은 완벽하게보다는 가치 있게 사는 게 좋다는 걸 배웠기 때문이죠. 앞서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를 다그치기보다 나와 타인을 사랑하면서 함께 걸어가야지요. 저는 완벽주의자도 완전주의자도 아니지만, 어릴 때 전혀 알 수 없던 그 시들이 하는 말을 이젠 조금씩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게 저를 기분 좋게 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L씨는 시집의 다른 구절을 암송했다.

“친구여 우리를 매달고 있는 나무는 무엇일까. 그것은 사슬인가, 아니면 사랑인가?”

‘애인에게’라는 시다. 자기 자신은 물론 세상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는 그의 깨달음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다. 낡은 시집을 받아들고 책방 문을 나서는 L씨의 얼굴이 환하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온전한 사랑을 마음에 품은 따뜻한 표정이었다.

윤성근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대표)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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