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반도체, 통 큰 투자 이끌 오너 리더십도 국가 전략도 없었다
도시바·히타치 등 1~3위 휩쓸어
미국 반덤핑 통상공세 극복 못 해
D램 치킨게임·시장변화 대응 실패
반도체 세계대전 - 일본 몰락의 반면교사
미·일 반도체 협정 10년에 손발 묶여
영광의 순간은 짧았다. 1993년 다시 미국에 시장점유율 1위를 빼앗겼고, 1992년엔 신생 삼성전자에 D램 분야 1위를 내줬다. 1990년대 가전 시장 변화와 2000년대 치킨게임에 대응하지 못하며 일본 기업들은 반도체시장에서 사실상 자취를 감췄다. 현재 세계 10대 반도체 기업(매출 기준) 중 일본 기업은 9위의 키옥시아(전 도시바)가 유일하다.
미국 정부의 강력한 견제가 일본 반도체 산업 추락의 시발점이었다. 1986년 체결된 ‘미·일 반도체 협정’이 상징적 사건이다. 1980년대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와 인텔·마이크론 등은 일본 반도체 기업들의 독주를 저지하기 위해 덤핑 혐의로 잇따라 제소했다. 이에 미·일 정부가 중재에 나서며 일본의 미국 반도체 수입 확대·덤핑 판매 금지 등의 내용을 담은 비대칭 협정을 체결했다. 일본 반도체 산업을 좌지우지할 카드를 쥔 미국은 이후 일본 측이 협정 이행을 게을리한다고 몰아붙이며 ‘수퍼 301조’까지 동원해 일본의 발목을 잡았다. 그러면서 미국은 반도체공동개발기구(SEMATEC)·반도체연구협회(SRC) 등을 설립해 자국 반도체 경쟁력 강화에 나섰다.
이런 가운데 1990년대 후반 D램 공급 과잉은 일본 반도체 기업에 결정타가 됐다. 실적 부진이 이어져 일본 기업이 하나둘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D램 시장에서 후지쓰가 1999년 철수한 데 이어 NEC·히타치는 사업부를 분사해 엘피다메모리로 통합했고, 도시바는 2001년 물러났다.
수직계열화 덕 ‘소부장’은 경쟁력
일본 반도체 회사들은 마진이 적은 D램을 포기하는 대신 미국처럼 시스템 반도체 시장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이에 정부 산하 기관인 산업혁신기구 주도로 ‘2012년 시스템 반도체 생태계 구축’ 계획을 세웠다. 2003년 히타치·미츠비시가 시스템 반도체 부문을 분리, 합작해 현재 자동차용 반도체 전문인 르네사스를 세웠다. 르네사스를 중심에 두고 NEC일레트로닉스·후지츠·파나소닉을 합병시켜 시스템LSI 사업을 통합하는 방안을 진행했다. 더불어 1990년대 대만 TSMC가 보편화한 팹리스·파운드리의 수평 분업 모델도 도입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미 세계적으로 인텔·자일링스·알테라·퀄컴 등 미국 팹리스 회사와 대만 TSMC 간의 공고한 협업 체계가 갖춰졌다. 특히 시스템 반도체 원천 기술을 가진 인텔·퀄컴 등과 소프트웨어·서비스 회사인 마이크로소프트·구글 간 협업으로 정보기술(IT) 분야의 표준을 장악했다. 일본 반도체 회사들은 이 생태계에서 배제됐다.
일본 반도체 기업들은 오너십 부재 속에 정부에 끌려가다 통 큰 투자의 골든타임도 놓쳤다. 삼성전자는 2005~2007년 인텔보다도 2000억엔 많은 8210억엔(당시 약 8조 2000억원)을 설비에 투자해 D램 분야 리더십을 굳혔다. 같은 기간 도시바 투자액은 3250억엔, 소니 1467억엔에 그쳤다. 그나마 일본은 1990년대까지 디자인·개발·웨이퍼 제조·테스트·판매 등 모든 사업을 한 회사가 모두 맡는 수직계열화 방식을 고수한 덕에 소재·부품·장비 분야의 경쟁력은 지켰다.
일본 반도체 신화의 몰락은 한국 기업에도 시사점이 크다. 미·중 패권전쟁의 틈바구니에서, 그리고 미국 또는 중국과의 맞대결에서 어떻게 대응할지 정교한 전략이 필요하다. 그나마 천문학적 투자 결정도 내릴 수 있는 삼성과 SK의 탄탄한 오너십은 일본과 다른 점이다.
김유경 기자 neo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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