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고개, 수많은 이야기 4] 인조가 기다리는데..수만 병력 12km 앞 고개서 사라졌다
병자호란 중 벌어진 조선 최악의 패전
1년 전 이괄의 도움으로 광해군을 몰아내 왕위에 오른 인조는 공주로 피신한다. 인조의 첫 번째 파천(播遷)이었다. 한성 무악재의 ‘안현전투’에서 이괄군은 관군에 궤멸한다. 이괄은 한명련 등과 함께 광희문-삼전도-광주로 빠져나갔지만 한성에서 영남을 잇는 경안역 근처에서 반군 수하인 이수백·기익헌 등에게 목이 베어 죽음을 맞는다. 2월 12일이었다. 인조는 공주 공산성에 도착하기 하루 전 그 소식을 듣는다. 이괄의 수급을 확인하고 22일 환궁한다. 이괄의 머리는 창끝에 꽂혔다.
인조는 1627년 1월 정묘호란 때 강화로 두 번째 파천을 한다. 그리고 병자호란. 청군은 공성전을 피하며 한성으로 들이닥친다. 이 교수는 "청군이 상인으로 위장하는 기만술로 압록강을 건너 길을 뚫은 뒤, 조선군이 지키는 성과 대치할 최소의 병력만 남기고 한성으로 속도를 냈다"고 설명했다. 13년 전 도주하던 이괄군 일부가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에 들어가 조선의 국방 정보를 불었다는 건 이미 밝힌 바 있다.〈중앙SUNDAY 1월 2일 자 25면〉
강화로 가는 길이 청군에 막히자, 인조는 이괄의 도주로와 같은 광희문을 통해 도성을 벗어난다. 광희문은 도성 내 시신을 내보낸 문이다. 시구문이라고도 한다. 광희문을 이용한 왕은 인조가 유일하다. 인조는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같은 길을 간 이괄의 목에서 흘러나온 피로 물들었을 경안역이 지척이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근왕(勤王)' 명령을 내린다. 근왕은 왕을 위해 충성을 다한다는 뜻이다. ‘적병이 남한산성을 포위한 지 벌써 엿새…빨리 달려와 군부의 위급함을 구하게 하라(인조실록 1636년 12월 19일).’ 비변사를 통해 경상감사 심연이 납서(蠟書·밀로 봉한 비밀문서)를 받는다. ‘나는 지혜가 부족하고 어질지 못하여 너희 사민을 저버린 바가 많았도다. 너희는 각자의 지혜와 힘을 모아서…북으로 진군할지어다…이에 교시하노니 잘 생각하고 알아서 행하여 주기를 바라노라(인조실록, 병자호란사).’
상관의 ‘알아서 하라’는 말만큼 엄한 게 없다. 심연은 군사를 모은다. 그 수가 4만(연려실기술, 병자일기)이라고도 하고, 8000(조선왕조실록, 병자호란사)이라고도 한다. 3만설(심연 묘비문, 하담파적록)도 있다.
심연은 끌어모은 병력을 서둘러 왕이 있는 남한산성으로 보낸다. 허완(68·경상좌도 병마절도사)과 민영(54·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선세강(61·안동 영장) 등이 앞서 출발했다. 이의배(61·공청도 병마절도사) 등도 합류한다. 심연은 뒤따라가기로 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는 “당시 각지에서 남한산성으로 향한 근왕군은, 현역 정예병보다 의병과 속오군이 훨씬 많았다”며 “게다가 보급품이 모자라, 이미 추위와의 싸움에서부터 지고 있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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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경기도 광주에는 대설주의보가 내렸다. 홍민자(69) 광주시 문화관광해설사는 “쌍령전투를 떠오를 수 있는 곳은 정충묘와 이후락이 세운 비석 정도”라고 말했다. 그는 “국수봉 남쪽 곤지암천변에는 허완의 병력이, 대쌍리 쪽에는 민영의 병력이 진을 치고 있었다”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홍 해설사는 “임진왜란 때 일본에서 귀화한 김충선의 150여 명 병력도 있었다”고 했다.
공조참의 나만갑은 남한산성에서 병자호란을 기록한다. 그의 『병자록』에 따르면 허완은 정예 조총수를 진영 가운데에 집중 배치했다. 진영 바깥쪽이 약해지게 됐다. 화약을 2냥씩(조총 격발 분량에 대한 해석이 3발, 5발,10발 등으로 갈린다) 나눠줬다.
1월 3일 아침. 청군 33명이 국수봉 능선에서 벼락처럼 내려왔다. 선세강이 춥더라도 능선에 진영을 구축하자고 했으나 허완이 묵살하지 않았던가. 때늦은 후회다. 약한 고리인 허완의 최전방 포수들이 난사했다. 화약이 떨어졌다. 화약을 더 달라고 소리쳤다. 적이 이 말을 용케 알아듣고 돌진. 선세강이 홀로 화살 30여 발을 쏘았으나 모두 청군의 목방패에 맞고 떨어졌다. 선세강은 적 화살에 맞아 죽었다.
적병이 목책 안으로 쇄도했다. 중상급 포수들은 총 한번 쏘지 못하고 무너졌다. 허완은 세 번이나 부축 받아 말에 오르려 했으나 번번이 떨어져 밟혀 죽었다. 다른 기록에는 자결했다고 한다. 남급의 『병자일기』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흩어진 병사들이 목책을 넘지 못하고 넘어지면 그 뒤로 계속 시체가 쌓였고, 목책을 넘은 병사는 추락해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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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한 교수는 “잊고 싶은 전투인 데다, 청나라를 의식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쌍령전투는 군사학 연구 대상이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너무 많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쌍령에서 허무하게 졌고 수많은 이들이 죽었음은 확실하다.
대쌍고개 위로 거센 눈발이 날린다. 근왕군이 쌍령에 도착한 1636년 섣달그믐처럼.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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